487화 바라지 않았던 결단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요시노부의 결단은 그야말로 전면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전하!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이대로는 또 한차례 이 나라에 피구름이 일게 될 것입니다! 지번사들과의 전쟁을 되풀이하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열도와 대륙은 다르옵니다! 다른 나라들이 모두 그와 같이한다고 어찌 우리 일본마저 그 뒤를 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본은 신이 지켜주시는 신의 나라이옵니다! 전하께서 마음을 단단히 먹으시고 굳건히 조선에 맞서고자 한다면 어찌 이 나라가 쇠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 아니겠습니까!"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전하!"""
상원, 아니 귀족원은 그 대표격이었다. 그들은 요시노부가 상원까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는커녕 요시노부의 처소 앞에 모여들어서 일제히 목청을 높였다. 요시노부가 그들을 만나주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요시노부가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정을 끌어가려면 가로회의에 나서든 아니면 귀족원에 출석해 그들과 상의하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
그럼 요시노부는 그의 뜻대로 국민국가를 완성하기 위해서 좋든 싫든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대화를 해야 했던 것이다. 요시노부는 어엿한 왕이었으나, 봉건 정치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던 일본에서 도쿠가와 가문은 설령 왕실이라고 해봐야 가장 강력하고 고귀한 귀족 가문에 지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요컨대, 분명 도쿠가와 가문과 그 수장인 요시노부가 가장 강력하고 고귀한 건 사실이었으나 그들을 대신할 존재가 없는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요시노부가 무리하게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대신에 현상 유지를 꾀했던 원인이기도 했다. 도쿠가와가 명백히 우세한 건 사실이었지만, 다른 귀족들도 저 나름대로 기반을 가져 중앙의 부당한 요구에 맞설 힘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과인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 경들은 그보다도 규슈에서의 소요사태를 하루빨리 진정시킬 방도를 생각하라. 듣자니, 규슈의 지방군이 무고한 백성을 학살하고 민가를 약탈하고 있다고 들었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악귀나찰의 소행이 아닌가!"
"전하, 이는 사실과 다르옵니다. 규슈의 병사들은 단지 그 땅에 멋대로 정착하였던 지나인들이 혁명을 선동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아녀자를 겁탈하는 등 행패를 부리기에 공인된 도리로서 지나인들을 주벌하였을 뿐인 줄 아뢰옵니다!"
"그렇사옵니다. 병사들이 아무런 죄 없는 민가를 약탈하였다니요. 지금이 분메이 때도 아닐진대 어찌 그와 같은 악행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혁명을 논하는 역도들이 퍼트린 낭설이오, 누명이나이다!"
"어허, 무엄하도다! 과인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왔거늘, 어찌 경들은 내게 그릇된 낭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인가? 정녕 그대들은 과인을 귀머거리로 알고 있는 건가!"
이 무렵 일본국의 정치체제가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도쿠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한 귀족 과두정 상태였던 것도 문제였다. 쉽게 말해서, 귀족원의 의원들은 설령 요시노부가 상대라 해도 한마디도 지지 않고서 아득바득 덤벼들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무모한 일이었고, 지금 그들 또한 목숨을 걸고서 덤벼드는 수준이었지만, 지금 막지 못하면 정말로 지번이 폐지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탓에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무엇보다 이들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도 있었다. 요시노부는 이미 일흔을 앞둔 고령이었고, 요시노부의 사남이자 앞선 형제들이 요절하면서 사실상 장남으로 길러진 도쿠가와 아츠시는 요시노부처럼 무언가 일을 주도적으로 벌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아츠시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귀족이었고, 이는 그가 대부분의 지번사들과 마찬가지로 사무라이의 나라가 언제까지고 계속되기를 바라는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요컨대, 일단 지금 요시노부가 일을 저지르려는 걸 저지하고서 시간을 질질 끌기만 하면 된다는 계산이 있었다. 요시노부가 죽는 날까지 버틸 필요도 없이, 안 그래도 요시노부가 나이를 먹어서 기력이 쇠할 때도 되었으니 계속 버티고 신경을 벅벅 긁으면서 탈진시킨 다음 고령을 핑계로 은거시키면 귀족원의 승리였던 것이다.
"전하, 만일 전하께서 생각을 달리하실 수 있게 할 수만 있다면, 소인 기꺼이 이 자리에서 배라도 갈라볼 각오입니다!"
"배를 가른 다라? 좋다. 그렇다면 과인이 직접 가이샤쿠를 해주겠다! 자아, 여기 과인의 단도를 주마. 종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 종이로 싸고서 배를 가르는 시늉을 하건 아니면 생날로 배를 직접 가르건 좋을 대로 해라. 단, 과인이 연로하여 가이샤쿠를 할 적에 단칼에 베이지 못할 테니 그 점만은 양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도다!"
"저, 전하!"
"뭣 하고 있느냐? 과인은 이미 검을 뽑았다. 설마, 네놈이 과인을 능멸할 작정으로 거짓을 고한 것은 아니렷다!"
문제는 그 점을 요시노부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연로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형처럼 젊을 때 몸을 막 쓰진 않아 그보다 나이는 많아도 아직 지병에 골골거리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일흔에 근접한 그의 연로함은 나날이 기력이 쇠하고 수명이 다하고 있는 걸 몸으로 직접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그 때문에 요시노부는 젊을 때 그라면 하지 않았을 괴팍하고 얼핏 미친 것처럼 보이는 언행을 일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귀족원에서 그를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괴롭힐지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끝없는 말 돌리기와 고함지르기 따위로 괴롭힘당할 바에야 아예 노망이 난체하며 귀족원에서 먼저 기가 질리게 하려 한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그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애당초, 미친 것도 아닌데 미친 척하는 것 자체가 정상인에게는 적잖은 정신적 피로를 일으킬 수밖에는 없었다. 하물며, 이미 연로하여 기력이 쇠하고 있는 사람에게야 말할 것도 없다. 요시노부는 이따금 자신이 진정으로 노망이 난 것인지 아니면 노망이 난 시늉을 하는 것인지 끝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그런데도 요시노부는 뜻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대로 가면 우린 회맹을 탈퇴하던가, 아니면 회맹에서 요구로 하는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어가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
이 무렵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전통적인 공무휴가와 무가를 위시한 귀족들일수록 회맹을 탈퇴하는 길을 선호했고, 상인이거나 지식인일수록 회맹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는 길을 선호했다. 전자는 회맹이 일본의 전통을 해치고 있노라 불평했고, 후자는 전통을 빙자한 악습이 일본의 발전을 막고 있다고 불평했다.
요시노부는 두 가지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회맹에서 요구하는 기준은 분명하게 일본의 전통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었고, 동시에 전통을 빙자한 봉건 악습은 일본을 젊고 활력 넘치는 나라가 아닌 늙고 병들어가는 나라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사무라이의 나라가 파괴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으나, 일본이 회맹에서 탈퇴하여 아시아에서 홀로 고립되는 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전통과 회맹이 요구하는 조건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요시노부가 계획하고 있었던 것도 이쪽이었다. 무턱대고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다고 무턱대고 귀족원의 말대로 시위대를 짓밟는 것도 아니라 그 중도를 걸어가고자 한 것이다.
문제는, 귀족원에서도 시위대도 전혀 그의 바람에 공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중이 변혁을 요구하는 지금, 우리가 바뀌는 시늉이라도 하지 못한다면 그다음에는 진정으로 이 나라를 통째로 갈아엎으려는 자들이 득세하게 될 것이다! 진정 경들은 이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고 싶은 건가?"
요시노부는 매일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라이들을 몰아내자면서 혁명을 외치는 시위대도 시위대였지만, 그로서는 매일 같이 만나게 되는 귀족원이 더 얄미웠다. 그렇게 설명하고 목소리를 키우고 광인행세까지 하고 있는데도 누구 한 사람 그의 결정에 따라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 남은 건 언제나 대로의 인물들이었다. 그가 처음 집권하고 왕이 되었을 무렵부터 그에게 충성을 다해온 측근들 말이다. 이 경우 요시노부도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이대로 시간을 질질 끌다 보면 결국 패하는 건 요시노부일 수밖에는 없던 까닭이다.
이제 방법은 두 가지였다. 내전을 각오하고서 중앙군을 동원하여 지번사들을 강제로 무릎 꿇리거나, 아니면 지번사들과 손잡고서 중앙군을 동원해 시위대의 입을 틀어막던가. 전자의 선택은 높은 확률로 전통적인 봉건 사회의 파괴를 동반했고, 후자의 선택은 높은 확률로 범 아주 조약기구 탈퇴를 동반했다.
"정녕 그 길뿐인가?"
결국, 요시노부는 마음을 굳혔다. 요시노부는 그의 선택이야말로 정녕 일본과 도쿠가와를 위한 길이라고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그의 선택이 또 한차례 무수한 피가 흐르도록 만들 것이라는 걸 알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미 피가 흐르지 않고서 사태를 진압하기에는 너무 늦은 다음이었다.
"이 이상 언쟁해봐야 시간 낭비다. 근위군은 지금 당장 학생들을 경호하여 번군의 악행을 저지하라!"
"""존명!"""
요시노부는 중앙군에게 각 지번의 시위대를 호위하도록 명령했다.
* * *
일본국 규슈, 치쿠슈 지번 후쿠오카 시.
"흐흐흐! 역시나 이렇게 되었구먼."
부둣가에서 배를 기다리며 수염을 말끔히 자른 노신사가 신문을 보며 이죽거리고 있었다. 수염을 곧 남성미의 상징으로 보는 문화가 여전히 만연하던 이 시대에는 다소 드문 모습이었다. 마치 수염이 남아있으면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염 자국 하나 없이 매끈매끈한 입가는 부둣가를 오가는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들과 비교하자 더욱 도드라졌다.
그런데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은 드물었다. 이곳이 부둣가였기 때문이다. 배에서 일하는 선원들은 으레 청결을 위해서라도 면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만큼, 이 노인 또한 선원 출신이었던지라 한창 젊어서 일할 적의 버릇을 잊지 못해 아직도 열심히 면도하고 있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어째서 신문을 읽으며 웃고 있었는지도 설명되었다. 신문에는 이순신급 전함의 첫 항해가 대서특필 되어 있었다.
그가 한때 수병이었다면, 머지않은 미래 일본 또한 그와 같은 거함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라 기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전혀 달랐다. 그는 선원 출신은커녕 방랑자이자 정치가였으며 국가반역자였다. 그가 면도한 이유는 청결해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면도를 해야지만 추적자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 공화파의 거두 이토 히로부미였다.
"제아무리 그 너구리라도 일이 여기까지 커지면 이제는 천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겠지."
당연히 그가 주목하고 있는 기사는 이순신급 전함의 첫 항행 같은 게 아니었다. 그 한쪽에 있는 히로시마에서 요시노부 직속의 근위군과 지번의 사병이 대치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흑백사진에는 어두운 군복의 근위군과 밝은색 군복의 사병들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었다. 두 군대는 색은커녕 군모마저 달랐다. 근위군이 둥그런 방탄모를 쓰고 있었던 반면에, 사병들은 전열 보병을 연상케 하는 천모자를 쓰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검의 패용 유무였다. 사병은 누구나 허리춤에 일본도를 한 자루씩 패용하고 있었던 반면에, 근위군은 누구 한 사람도 허리춤에 일본도를 패용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소총에 총검을 부착하고 있었다. 총은 어디에다 두고 왔는지 근위군에 칼을 겨누고 있는 몇몇 사병의 모습은 과연 이들이 같은 나라의 군대인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구태여 거기까지 세세히 보지 않아도, 애당초 서로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는 모습은 과연 이것이 정녕 같은 나라의 중앙군과 지방군이 맞는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기사의 논조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일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고, 실제로도 별일 아닌 것처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서 구석에 처박아 두었지만, 함께 실린 사진만으로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내전이 임박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서로 대치하고 있을 뿐이지만, 누구 하나라도 먼저 발포하는 순간 간신히 평화를 되찾은 듯하였던 일본은 또다시 전란에 휩쓸릴 터였다.
"각하, 출항 준비가 앞으로 30분 안에 마무리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만 배에 오르시지요."
"음, 안 그래도 지루해서 졸고 있던 참이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이토는 만면 가득히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순탄대로였다. 물론, 아직은 갈 길이 멀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서 꼼짝없이 늙어 죽을 줄 알고 전전긍긍하던 때에 비하면 배는 나았다.
무엇보다 이토로서는 어느 쪽이든 손해 볼 가능성이 없었다. 만일 이대로 요시노부가 승리한다면 규슈에서 시위대를 도운 일본 공화파는 장차 새로이 내각이 꾸려지면서 덩달아 복권될 것이고, 반대로 요시노부가 패배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지금보다 더한 불만이 누적되어 다가올 공화 혁명을 위한 발판이 될 테니 어느 쪽이건 이토로서는 나빠질 게 없었다.
일본 공화파로서는 이번 사태에 시위대를 편들어 개입한 것 자체가 신의 한 수였던 셈이었다.
"요즈음 전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다고 하나?"
"근위군이 내려오기 전에 일을 끝내기 위해 번군 측이 상당히 서두르고 있다는 모양입니다. 이대로 가면 혁명군은 고전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보입니다만?"
"···이번에 사가에서 조선인 학생이 번군의 총을 맞고서 의식불명 상태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머지않아 조선에서 이를 문제 삼아 개입해올 것으로 보입니다."
"쯧, 또 조선 놈들인가. 아니 조선 땅에서 일이 터진 것도 아닌데 하여간에 호들갑은."
이토는 혀를 찼지만, 내심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만일 요시노부가 끝내 지번사들에게 굴복한다면 보나 마나 지번사들은 실농기구의 개입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회맹과 거리를 두려고 하거나 더 나아가 아예 탈퇴하려 들 것이고, 그럼 보나 마나 한국과 일본의 국교는 지금보다 악화할 수밖에는 없었다.
'여차하면 회맹 재가입과 일조 관계 개선을 핑계로 조선에 혁명을 지지해달라 요청해도 되겠지. 이미 러시아라는 선례가 있는데, 조선이 우리 일본이라고 가만히 내버려 두겠는가?'
말이 좋아 혁명이지 군사 정변이나 내전을 계획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경우 한국의 도움을 빌린 일본 혁명군은 한국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겠지만, 이토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 경우 그는 집권에 성공할 것이고, 그럼 그가 차근차근 한국이 일본에 채워놓은 족쇄를 풀어내면서 일본의 영웅이 되면 그만이었으니까.
다소 오만하고 기회주의적인 발상이었지만, 이토는 그것이 충분히 실현 가능한 계획이라 확신했다.
"하여간 규슈를 뜰 때는 바로 잡은 셈이군."
"과연 각하의 현안은 탁월하십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글쎄, 우선은 조슈에 한 번 가봐야 하지 않겠나? 그동안이야 고향으로 돌아갈 방도도 여유도 없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언제까지고 고향을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뿌우우-!
그때였다. 어딘가 먼 곳으로부터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이토는 그것이 처음에는 여객선이 부두에 출항을 알리기 위해 낸 소리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와는 조금 작지만, 그와 비슷한 고동 소리가 같은 방향에서 연달아 들려오고 있던 것이다.
"요란스럽기도 하군. 무슨 풍어 축제라도 하는 건가?"
이토는 그런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배에 올랐다. 그러나 배에 오르고서, 마침내 거대한 선체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있던 부두 반대편 수평선이 눈에 들어온 순간, 이토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강철의 거산이 수평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