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93화 (493/530)

493화 삼중제국

혁흔이 죽고서 장례를 치른 다음 이형은 북경의 만주 귀족들에게 한 가지 사항을 권고했다.

"만주족이기를 포기하고서 귀족으로 남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귀족이기를 포기하고서 만주족으로 남을 것인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라."

요는 이대로 청의 일원으로 남을 것인가, 대한제국의 일원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청에 계속 남아 있거든 귀족일 수는 있겠으나 만주족일 수 없으며, 만주족이기를 택한다면 더는 청에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는 딱히 이형의 강요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형이 학생운동을 무력진압하지 않는다면 늦건 빠르건 학생들의 손으로 이루어질 일들이었다.

그러므로 이형은 그들에게 그 전에 결정을 내릴 것을 권한 것이다. 만일 지금 스스로 손으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이다음에는 학생들의 손에 의한 타의로 결정하게 될 테니 말이다. 이는 이형에게 작금의 학생운동을 진압할 마음이 요만큼도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에 만주 귀족들은 경악했으나, 여론은 쉽게 하나로 모였다.

"귀하기에 만주족이지 어찌 비천한 이가 만주족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말이 옳소. 애당초, 태조께서 이 나라를 처음 일으키실 적에 팔기에는 여진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도 있었고 한인도 있었고 그 밖에 야인들도 얼마든지 있었소. 하나 그들 모두가 태조께서 만주를 통일하시는 데에 앞다투어 말을 몰았기에 비로소 그들 모두가 팔기 아래 만주족이라는 하나의 족속을 이룬 것이었잖소."

"내 말이 그 말이오. 만주족이란 결국 태조를 도와 이 나라를 일으킨 개국공신들을 달리 이르는 별칭에 불과하오. 그 말인즉슨, 만주족이 아니게 된다고 해봐야 이 별칭 하나를 포기하는 것에 불과하오. 이 고귀한 혈통이야말로 우리 선조가 이 나라를 일으키는 데에 이바지한 개국공신임을 증명하는 것이니,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족속이 아니라 선조께 이어받은 직위들이 아닐까 하오."

"옳거니! 그 말을 들으니 속이 다 뻥 뚫리는 듯하구려! 바로 그거요. 왜 내가 이리 간단한 이치를 고민하고 있었는지 모르겠구려. 내 이만 마음을 정하리다!"

처음에는 만주족과 귀족, 이 두 가지가 서로 별개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던 만주 귀족들은 이내 너무나 간단하게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는 길을 택했다. 참으로 구질구질한 변명들이었다. 만주족은 결국 개국공신의 별칭이라고 말하면서도 청이 사실상 멸망하고서 대한제국의 일개 번국으로 남아 있는 작금의 현실을 용인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그러했다.

나라와 족속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지도, 한탄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제 조상이 충신이었고 공신들이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그들은 족속보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우선시했다. 태어날 적부터 특권을 한몸에 누리면서 살아왔기에, 이미 특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결국, 그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나 누리고 있는 여러 특권이었지, 자신이 어떤 족속에 속해있는가가 아니었다.

물론 그들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일단 그들은 물론이오.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조차 만주 땅을 밟아본 적이 없던 게 어언 100여 년이었고, 그동안 만주말도 거의 잊어버려서는 만주어보다 북경 방언에 더 능했다. 혈통이야 아무튼, 북경에서 나고 자랐으며 북경 방언을 쓰고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만주족이겠는가? 이형이 생각했다시피, 이들 족속의 더욱 정확한 정체성은 북경족이리라.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죽는 날까지 그 자신의 족속과 나라에 두었던 혁흔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아니, 그들을 만주족이 아니라 북경족이라고 부른다면 나름대로 그들 자신의 정체성에 충실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역겨운 놈들."

당연히 이러한 작태를 이형이 긍정적으로 보았을 리가 만무했다. 그야말로 강남의 군벌 귀족들과 다를 바 없는 한심한 작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군벌 귀족들은 애당초 자신들을 초의 귀족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귀족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고,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청의 귀족이라고 여기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충성할 대상을 착각했던 자들과 충성할 생각이 없는 자들의 차이였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이형은 그들의 판단을 존중했다. 일부 귀족이기를 포기하고서 만주족으로 남기로 한 이들은 대한제국 국적을 부여받고서 만주로 향하는 짐을 꾸렸으며, 그 외 대다수였던 만주족이기를 포기하고서 귀족으로서 남기로 한 자들은 그대로 북경에 남았다.

청왕-혹은 연왕직이 공석이 되었으나 혁흔이 적법한 장자를 얻지 못했던 까닭에 공석이 된 연왕직은 당분간 이형이 겸직하기로 하였다. 그렇다고 청이 대한제국에 합병되거나 연합제국이 성립한 것은 아니고, 섭정에 가까운 지위였다. 애당초, 이제 와서 통합을 강행하기에는 양국 모두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한 지 오래였으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섭정으로서 이형이 내린 첫 번째 명령은 실로 단순한 것이었다.

"귀족원을 폐하고, 평민회를 국민회의로 개칭하여 단원제를 시행하도록 하겠다."

어째서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단원제였는가 하면,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적 차이를 제외하자면 구태여 의회를 두 개씩 둘만큼 문화적, 인종적 차이가 내재하여있는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영토도 단원제를 도입하면 지역발전이 불가능할 만큼 그리 대단하게 넓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여하 동쪽 만주 땅도 떨어져 나가고, 산둥반도도 황하강 이남 영토도 모두 떨어져 나가고서 거의 허베이 성 하나만 달랑 남아 있는 형국이었던 판국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형이 직접 학생운동의 손을 들어주면서, 청에서도 마침내 학생운동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 이는 동시에 귀족이라고 하는 특권 계층의 소멸을 의미했다. 물론 당장 귀족이라는 계급이 사라진 건 아니었으나, 이미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귀족원이라고 하는 그들의 처지를 대변할 정치기구를 잃어버린 만주-아니 북경 귀족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국민에 대항할 방도는 없었던 까닭이다.

"화, 황상!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황상! 분명 소신들에 만주족이기를 포기만 하면 조상께서 물려주신 지위는 지켜주실 거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연하게도 뜻하지 않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북경 귀족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아직 상중이라는 것마저 잊고서 펄쩍펄쩍 뛰며 상복을 차려입은 이형을 쫄래쫄래 쫓아다닐 지경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만 보아도, 생전 혁흔이 그들을 어르고 달래어 어떻게든 만주 귀족들의 특권을 하나둘 줄여나갈 적의 고충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혁흔과는 다르게, 이형은 그들을 어르고 달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 그랬지. 그래서 귀족으로서 남겨주지 않았소. 뭐가 그렇게 불만이오?"

"그, 그럼 이후에도 소신들이 천것들에게 해를 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씀이시지요?"

"글쎄, 그건 의회와 논하도록 하시오. 이건 일개 섭정인 내 소관은 아닌 것 같구려. 아무쪼록 평화적으로 마무리되기를 기원하리다."

그러고서 이형은 자리를 떴다. 결국, 이형은 그들을 저버린 것이다. 애당초 만주족이기를 포기하고서 귀족으로 남을 것인가 그 반대를 택할 것인가를 택하라 종용했었을 뿐 귀족으로 남기를 택한 뒤에도 계속 귀족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켜주겠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니 거짓말은 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엄밀하게는, 거짓말만 하지 않은 격이었다.

뒤늦게 북경 귀족들은 배신감에 몸을 떨면서 어떻게든 다른 길을 찾아 헤맸으나, 쉽지 않았다. 군권은 섭정인 이형이 지니고 있었고, 민심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시위대와 협상하려고 해도 시위대는 황제가 자신들의 손을 들어줬다면서 기세등등했고, 이는 북경 귀족들이 일방적으로 시위대에 양보하고서 굴복하는 그림이 아니라면 시위대와 협상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제야 뒤늦게 다른 나라로 피신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다른 나라들 또한 학생혁명으로 소란스럽기는 매한가지였던 까닭이다. 그나마 이러한 혁명의 여파에서 빗겨나 있던 대한제국으로 피신하는 선택지는 대한제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귀족이기를 포기하고서 만주족으로 남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으니 응당한 결과였다.

이제 와서 서역에 몸을 피하기에는 그럴듯한 인맥도 시간도 없었다. 결국, 이들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시위대에게 고개를 조아리거나, 끝까지 시위대에 맞서 자존심을 세우다가 험한 꼴을 당하거나. 물론, 어느 쪽도 이들 북경 귀족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선택지였음은 말할 것도 없음이라.

"내가 어리석었다! 저 조선 놈을 믿는 게 아니었거늘!"

그들 중에는 둘 다 선택하지 않고서 자결을 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차마 시위대에 고개를 숙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위대의 손에 험한 꼴을 당하기도 싫으니 차라리 깔끔하게 제 손으로 이승을 하직하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는 다소 극단적이고, 또한 성급한 결단이었다.

이형이 이들 귀족을 내쳤다고 하지만, 시위대가 귀족들을 죽이거나 흠씬 두들겨 패지는 못하도록 군경을 동원하여 철저히 지켜냈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그림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시위로 귀족들이 시위대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제 손으로(?) 특권을 반납하고서 일개 국민으로 전락하는 평화로운 혁명이었지, 피가 줄줄 흐르는 유혈혁명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결국, 그들은 저들 멋대로 이제 다 틀렸다며 자포자기하고서 구태여 버리지 않아도 되었을 목숨을 제 손으로 버린 격이었다. 이들의 이름은 자금성 담벼락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대외적인 설치 명분은 비극적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섣부른 판단으로 헛되이 목숨을 던진 그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것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만세! 우리가 이겼다!"

"황제 폐하 만세! 대한제국 만세!"

그리고 그걸로 청에서의 학생혁명도 마무리되었다. 그보다 이르게 일본에서의 학생혁명도 마무리되어, 아주 대륙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학생혁명의 기세가 일단 진정 되었다. 그러나 그건 모든 소란의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에 가까웠다. 소란이 일단 진정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어떻게 이 소란을 수습해야 할지를 논해야 했던 까닭이다.

물론 따로 말할 것도 없이, 첫 번째 문제는 과연 청의 왕위를 누가 이어받아야 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본래라면 이형이 되어야 했으나, 이형은 그리 내켜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섭정으로서 국민의회에 권했다.

"따로 지시하지도 개입하지도 않을 테니 어디 좋을 대로 정해 보아라. 설령 너희가 이대로 공화국을 수립하겠다 선택해도 용인하겠다."

이는 이형이 처음에 범 아주 조약기구를 만들 적에 각국의 국왕들이 모여서 천하의 중대사를 논하는 고대 춘추시대 회맹의 연장선이자 국제기구로서 기획했음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양보였다. 다시 말해서, 회맹에 참여할 자격을 그 나라의 왕족으로 정의하는 대신에 그 나라의 국가지도자이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또한 공화파들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겠다는 선언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컸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이제 와서 공화파의 준동 정도로 체제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단이었다. 설령 대한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왕정을 폐지하고서 공화정을 채택하더라도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회맹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 마당에 회맹을 탈퇴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던 셈이다. 무엇보다, 일본에서의 선례로 한국은 이미 회맹을 탈퇴하려 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천하에 보여주기도 했다.

더불어서, 한족 민족주의가 한풀 꺾이고 손문도 제거되었다는 점도 이러한 결정에 한몫했다. 그 말인즉 이제 와서 중화 통일을 외치는 범 중국적 혁명이 발발할 위험성은 적다는 뜻이었다. 이미 학생혁명이 성공을 거둔 이상, 이제부터는 이들 혁명세력이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 구태여 대한제국에서 개입하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이러한 움직임을 결사적으로 저지하려고 들게 분명했던 것이다.

'어차피 이제 와서 모든 걸 내 뜻대로 끌어갈 수는 없을 테니, 양보할 수 있을 건 양보해두는 수밖에.'

거기에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어도, 이형이 전주 이씨 종친에 그렇게까지 큰 애착을 지니고 있던 것도 아니라는 점도 한몫했다. 쉽게 말해서, 이형의 직계 자손들이라면 모를까 이형이 번왕으로 세웠던 이들이 훗날에라도 왕위를 잃고서 내쫓긴다고 해도 회맹을 탈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에야 크게 안타까워하거나 분노할 이유는 없었다는 뜻이었다.

이형이 정해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선은 그의 직계 자손들이 제위를 잃고서 몰락하거나 대한제국이 패권을 잃어버리거나 하는 쪽이었지, 종친들의 번왕 지위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형의 속내를 알아채지 못한 국민의회로서는 적잖게 당혹할 수밖에는 없었다.

"당연히 황상께서 이 나라를 이끌어 주시는 게 아니었다는 말인가?"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이들은 당연하게 시위가 끝나고 나면 이형이 청을 이끌어 줄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로 왕위를 이어받을 애신각라 왕족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이강이나 이휴처럼 제위를 이어받을 이형의 직계 자손들도 있었지만, 그들로서는 썩 내키지 않았다. 이 무렵 국론을 주도하고 있던 것이 회맹세대였던 까닭이다.

이들은 중장기적으로 아주 대륙이 하나가 되기를 바랐다. 그 하나 된 아주가 중앙집권적 전제제국인지, 지방분권적 연방국가인지, 아니면 그보다 느슨하고 각국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국가연합 체제인지, 아니면 지금과 같은 국가연맹 체제를 계속하여 유지하는 것인지는 제각각 달라도 아주의 통합을 역사적 필연이라고 믿고 있었던 점은 회맹세대의 공통점이었다.

그리고 한국과 멀리 떨어진 초가 작금의 국가연맹 체제를 선호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과 이웃한 청의 경우에는 연방 체제를 보다 선호했다. 정치적 개혁만 완수하고 나면 자급자족은 물론 지역 패권을 주장하는 것도 가능한 초와는 달리, 청의 경우에는 구태여 자립을 고집해야 할 만큼 대단하게 국토가 넓은 것도, 대만처럼 황제의 친형이라는 거창한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던 까닭이다.

여기에 전통적인 중화적 가치관도 있었다. 조선이 천명을 가져갔다면, 당연히 원 이후로 전통적으로 황제가 거하던 도읍이었던 북경과 그 근방 하북 일대는 황제의 품에 안겨야 맞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국민의회는 일단 이형이 명령한 바도 있다 보니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황제 폐하 만세! 대한제국 만세!"""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민투표 결과, 청의 국민이 선택한 황제는 또다시 이형이었다.

끝내 내켜 하지 않던 이형도, 여기에는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면서 다만 조건을 한 가지 달았다.

"그럼 청은 조선이나 만주가 아니라 몽골과 같이 처우하리다. 대한-대청-몽골. 왕위를 제하고서 제위만 3개짜리 삼중제국이라니. 거참 쓸데없이 거창해졌군."

역사상 최초의 삼중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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