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대혼란
더불어 이는 태생적으로 발생하기도 쉬웠지만, 이어지기도 쉬웠던 운동이기도 했다.
"우리가 도대체 저 코쟁이들에게 뭘 했다고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거야! 아닌 말로, 욕을 해도 우리가 하지, 왜 저놈들이 하고 있는 거야!"
"옳소, 옳소! 남의 집을 멋대로 들쑤시고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피해자 행세야? 저것들은 도대체 양심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거냐!"
"염치도 없는 코쟁이 놈들. 도대체 저것들은 왜 우리를 못살게 굴지 못해서 안달이야? 우리가 도대체 뭐가 그리도 잘못했길래 이러는 거냐고!"
우선 이 점이 첫 번째였다. 이는 크건 작건 대다수 아시아인이 품고 있던 울분이기도 했다. 이형이 일찌감치 개항을 결단하여 내줄 건 내주되 지킬 건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간 조선과는 달리,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은 전부 다 최소 1번 이상은 유럽 나라들에 침략을 당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국도 사실 러시아와의 일전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다툼들이 끊이질 않았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이러한 침략경험은 유럽 국가들을 선망하는 이들조차도 선뜻 무시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드문 아시아 국가들 모두의 역린이었다. 그나마 일본이나 중국 등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소중한 것을 헌납해야 했다는 치욕으로 끝났지만, 새롭게 범 아주 조약기구에 가맹한 월남이나 그 외에 동남아시아의 신규 독립국들은 아예 국권을 빼앗기기도 했다.
유럽인들이야 이러한 처사를 일컬어 야만스러운 아시아에 문명을 전해준 것이라 선전했지만, 당사자들에게야 그게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았을 리가 만무하다. 이러한 울분은 고스란히 불매운동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더욱이 이 무렵에 와서는 구태여 유럽산 물건을 사용할 필요가 적었던 것도 있었다.
그야 당연히 품질을 따진다면 유럽에서 생산한 제품들이 아시아에서 생산한 제품들보다 우수한 게 당연했지만, 그렇다고 아시아에서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들을 반드시 유럽에서 수입해야 할 필요는 없던 것이다.
"우리 같은 아주인들이 아주에서 만들어낸 물건을 소비해주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소비하겠습니까? 모두 아주산을 애용합시다!"
"그래! 아주산을 사용하자! 비록 질은 코쟁이 놈들의 것에 미치지 못하지만, 아무튼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일부러 수입할 필요도 없다!"
"상품이라는 것도 원래 많이 팔리면 팔릴수록 그 질도 더 나아지는 법 아닙니까? 지금은 다소 부족해도, 모두 조금씩만 불편을 감수합시다!"
"헤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원래 다 그런 거지요 뭘! 그래도 국산이잖아요. 그냥 좀 눈감아주면 어때요?"
이 점은 불매운동에서 적잖은 강점이었다. 만일 핵심부품들을 모두 유럽에 의존하고 있기에 유럽으로부터 당장 수입이 끊어지면 공장이 멈춘다든가 하는 상황이었다면 이러한 불매운동은 시작도 할 수 없었거나, 시작하더라도 그 효력이 금세 사그라지게 뻔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유럽산 공산품들은 아시아산 공산품들에 의해 충분히 대체될 수 있었다. 물론, 다소(?)의 품질 격차는 애국심으로 눈감아준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에서 이러한 불매운동을 눈감아주거나, 은근히 조장한 이유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옷이나 종이 같은 거야 다른 나라들도 생산할 수 있었으나 본격적인 기계부품이나 기관차 같은 기술집약적 공업품의 경우에는 아시아에서 한국을 대신할 나라가 그리 많지 않았다. 쉽게 말해,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산을 배격할수록 한국산이 그 자리를 메울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거기에 이러한 불매운동을 이용해, 방향성을 잃고서 폭주할 기미를 보여주던 학생운동이라는 이름의 폭주 기관차에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내버려 두면 점점 한국의 통제에서 벗어날 게 뻔했던 격정적인 학생운동이 서구에서 시작된 황화론과 그 때문인 불매운동의 확산을 계기로 다시금 한국의 통제 아래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도대체 한국 정부에서는 무엇을 하는 겁니까? 이번 불매운동은 우리 프랑스 제국을 향한 도발 행위입니다! 양국의 우애를 위해서라도, 한국 정부에서 이에 엄중히 대처하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글쎄요,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본국의 소관이 아닌 것 같군요. 그리고 우리 범 아주 조약기구에 속한 모든 가맹국은 국민의 참정권과 집회의 자유를 엄격히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행동이 옳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들은 아시아에서 사업하고 있는 우리 프랑스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건 문제로군요. 그렇다면 외국인 조계지에서 혹시나 발생할지 모르는 폭력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충분한 경비병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각국에 요청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귀국에서 요청한다면, 조계지에서 귀국의 시민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본국 함대를 증원할 의향 또한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저는 이런 말장난이나 하려고 온 게···! ···끄으응!"
그리고 두 번째로, 이전과는 다르게 유럽 열강들에 아시아의 불매운동을 찍어누를 힘이 없다는 점도 있었다. 그전까지야 식민지인들이 뭐라고 투덜대건 상관없이 그들의 요구를 강행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열강들에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더는 유럽 열강들의 힘은 인도양과 시베리아라는 거대한 자연적 경계선을 넘어오지 못했다. 여전히 지중해와 아프리카에서는 그들의 패권이 공고할지 몰라도, 아시아에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한국 정부를 설득할 만한 교섭 소재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이들이 진지하게 한국을 설득하고자 했다면 애당초 이러한 인종주의가 확산하는 꼴을 가만 보고 있지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아시아의 성장을 경계하면서도 은근히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자신들이 상전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한국 정부가 아시아 패권을 넘어선 세계패권을 노리고 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유럽 대륙에서 한국에 호의적인 우호국을 만들고자 공을 들여야 했겠지만, 아직 한국에서 노리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아시아 패권이었고 따라서 한국이 고려해야 할 건 아시아인들의 민심이었지 유럽 국가들의 의향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서, 이기적으로 굴어도 아무런 문제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모두 오세요, 오세요! 방금 막 태평양을 건너온 따끈따끈한 샌프란시스코산 신상품들입니다! 모두 구경이나 한 번씩 해보고 가세요!"
"···잠깐, 샌프란시스코? 그거 코쟁이들 도시 아닌가? 이 시국에 우리보고 코쟁이들 제품을 사라고?"
"아하하! 이거 왜 이러십니까? 보세요. 제가 어딜 봐서 코쟁이입니까?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다들 저처럼 아시아 사람밖에는 없다고요. 바다만 넘어왔다뿐이지, 이것들 다 100%! 아주산이나 다름없다, 이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미국의 개입도 한몫했다. 아시아에 백인종에 대한 혐오가 들끓게 되는 와중에도 미국은 아시아 시장에 아무런 제약도 없이 그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접근할 수 있었다. 애당초, 태평양 무역에 종사하는 이들은 대개 검계로 대표되는 아시아계였던 까닭이다. 이들은 불매운동에 시달릴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아무튼, 같은 황인종이 아니던가? 오히려 득을 봤으면 봤지, 손해를 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 점은 크나큰 득이 되었다. 한국 또한 모든 기술집약적 공산품들을 생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가격을 제하고서 품질을 논한다면 그래도 여전히 한국산보다는 미국산이 더 우월했던 까닭이다. 이렇다 보니 미국산은 너무나도 쉽게 본래 유럽산 공산품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던 입지를 대신하고야 말았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아시아의 불매운동을 방해하려고 들 리가 만무했다. 당장에 돈이 되고 있을뿐더러, 장기적으로는 아시아 시장에서 유럽이라는 경쟁자를 코 한 번 풀지 않고서 치워버릴 수 있을 텐데, 뭣 하러 그들이 여기에 개입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일부러 아시아의 손을 들어줘서 유럽과 척질 필요도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아시아의 불매운동에 대한 미국 연방 정부의 공식적인 반응은 그냥 방조였다. 민간차원에서야 이에 대하여 유럽이 맞다 아시아가 맞다 격론이 오갔으나 워싱턴 정가는 막상 이러한 민간여론에 대하여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괜히 우리 사업에 끼어들 생각하지 말라는 트러스트 세력의 엄중한 경고가 있던 까닭이다. 침묵은 금이라는 오랜 격언이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정부는 무엇을 하는 거냐! 하여간 이 자식들은 세금 받아갈 때나 일한다니까!"
"내 돈을 물어내! 이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 줄 수 없거든 하다못해 내 돈이라도 물어내라, 이 자식들아!"
"옛날처럼 싸움배들이나 잔뜩 보내서 대포 꽝꽝 쏴주고 총 탕탕 쏴주면 되잖아!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냐!"
그리 머지않아 유럽의 상인들은 아시아 시장에서 눈물을 머금고 철수해야만 했다. 그나마 프랑스 정도는 사정이 나았으나, 사실 별 차이는 없었다. 프랑스에 호의를 지닌 한국 정도는 또 모르겠지만, 나머지 국가들에게는 프랑스나 다른 유럽 나라들이나 그게 그거였던 까닭이다. 아예 월남처럼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신음한 나라는 따로 말할 것도 없었다.
당연히 유럽 각지에서는 이러한 불매운동에 타격을 입은 유럽 무역상들에 의하여 불매운동을 어떻게든 해결해달라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졸지에 뜻하지도 않은 국민감정 추돌에 세계 최대의 시장에서 내쫓기게 생겼으니 이들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선조 대다수가 과거 아편 밀수와 인신매매에 협력했거나 그에 연관된 과거를 지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유럽 정치인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종주의를 가라앉히고자 노력과 성의를 다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든 책임을 불매운동을 방조하고, 은근히 조장하고 있기까지 한 한국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었다. 전자는 자신의 체면과 정치인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고, 후자는 미래의 국익과 경제성장을 희생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취할 선택은 뻔한 것이었다.
"우리 정부는 이번 불매운동을 해결하기 위하여 성의와 노력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우리 외교관들의 필사적인 설득에도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되려, 우리의 충성스러운 협력자들은 한국에서 이러한 불매운동을 뒤에서 조장하고 있음을 암시하였다. 그렇다. 애당초 한국과 타협을 꾀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
이 모든 일은 전부 한국이 아시아를 독점하기 위하여 꾸며낸 일이었던 것이다! 우린 아시아를 홀라당 삼키려는 한국의 계략에 처음부터 끝까지 놀아난 것이다!"
그야말로 몇몇, 일부 애국심에 투철한 의원들을 제외한 절대다수는 후자를 택했다.
인도양과 시베리아라는 장대한 자연경계를 두고서 두 대륙이 경제적으로 분리되는 순간이었다.
* * *
그리고 이러한 불매운동에는 전혀 의외의 피해국이 또 한 곳 있었다.
"아시아인들이 난장판을 만들고 있다고? 이런 맙소사. 이제 우리는 어쩌지?"
호주, 아니 엄밀하게는 호주 대륙의 뉴사우스웨일스, 빅토리아, 퀸즐랜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6개 식민지 연합은 이 무렵 크나큰 곤란을 겪고 있었다. 본국인 대영제국은 두 조각이 나면서 이들 6개 식민지 연합 내에서도 인도의 여제에게 충성을 다할 것인지 아니면 독립할 것인지를 두고서 격론이 오가는 마당에, 그나마 숨통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로의 수출길이 인종주의에 따라 촉발된 불매운동으로 막힌 것이다.
이는 당장 대영제국이 몰락하면서 수출길이 제한되어 버린 식민지 연합에는 적잖은 타격이었다. 대영제국이 무사할 때야 세계 최대, 최강의 영국 해군이 지켜주는 바닷길과 로이드로 대표되는 런던 해운에 의존하면 그만이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당장 왕실도 인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궁리에 바쁜 판국에 자치령은커녕 일개 식민지를 돌봐줄 여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수출 없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가 생각하면 그조차 아니었다. 그 넓은 대륙에 인구는 고작해야 400만 남짓, 골드러쉬로 본격적인 개척이 시작된 지 이제 고작 반백 년이 된 호주 대륙의 주요 산업은 축산업과 어업, 거의 바닥을 드러낸 금광과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되고 있던 탄광, 철광 등이었다. 좋게 말해도 나쁘게 말해도 깡촌이었고 자급자족은커녕 아직은 본국과의 무역과 본국으로부터의 지원에 크게 의존해야 하는 개척 초기 식민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본국으로부터의 지원은 없었다. 그동안이야 본국에서 싼값에 보급해주던 각종 필요 자재도 이제는 제값을 주고서 국외에서 구매해와야만 했다. 당연히 이제 막 개척이 한창이던 호주에 이러한 무역정책 변동이 긍정적으로 다가왔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제는 그나마 수출, 수입도 끊어질 거라 한다.
"우린 이제 끝이야! 빌어먹을, 그 빌어먹을 금에 홀려서 이 망할 놈의 섬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모두 진정하시오! 이럴 때일수록 하나로 단결해야 하지 않겠소? 황인종들과의 숙명적인 성전이 임박하였소! 모두 무기를 들고 황인종들의 침략에 맞서 싸웁시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이런 농부들이나 한가득 모여봐야 저 아시아인들의 전함에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소? 그런 소리 할 시간에 하루빨리 도망칠 궁리나 하는 게 더 생산적일 거요!"
"누구 아시아인 중에 아는 사람 없나? 그 왜, 우리 땅에 사는 물리들 있지 않나? 그자들을 어떻게든 이용해보는 방법은 없을까?"
"하! 그자들이 우리가 이제 와서 고개를 숙인다고 순순히 우리에게 협력해줄 것 같소? 보나 마나 협력하는 체하면서 한국의 손을 빌려 우리를 내쫓으려 들 게 뻔하오!"
"제기랄, 차라리 쫓아내 주면 낫지. 우리는 모조리 죽은 목숨이야. 여자들은 범해질 거고 남자들은 죽거나 노예로 끌려갈 거라고!"
아시아 대륙의 불매운동이 유럽 국가들에게야 불황 정도로 끝났지만, 호주의 식민지 연합에는 당장 존망의 문제로 떠오른 까닭이었다. 당장 필요한 생활필수품들을 구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식량이나 옷 같은 것들이야 어떻게든 자급자족할 수 있겠지만,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의 이기들은 어쩐다는 말인가.
한순간에 문명이 중세시대까지 퇴보할 위험에 처한 이들 식민지 연합의 반응은 그야말로 묵시록을 방불케 했다. 인종주의 대결론에 기반을 두어 아시아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공포까지 확산하기 시작하자 이러한 국가적 혼란상은 일개 식민지 정부들이 대응할 수 없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독립인가 충성인가로 식민지마다 의견이 달랐던 점도 문제였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이들 식민지 대표들은 멜버른에서 만났다. 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독립인가, 충성인가? 어떻게 하면 아시아의 침략을 피하고, 이번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보름간의 맬버른 회담 끝에, 이들 헨리 파크스로 대표되는 식민지 대표들이 내놓은 결론은 간단했다.
"아시아에 맞서는 건 위험하다. 이제 본국으로부터의 지원을 기대하기는 어려울뿐더러, 설령 미국의 지지를 얻어낸다고 해도 미국은 아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없을 것이다. 독립은 이미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본국은 더는 우리를 책임져줄 수 없으며, 우리는 이제 우리만의 살길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은 반드시 아시아의 지지, 혹은 아시아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지 않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좋건 싫건 아시아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언제나 그래 왔듯이 주먹은 가깝고, 국제법은 먼 까닭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시아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또한 간단했다.
이들 식민지 연합은, 가장 먼저 한국에 러브콜을 보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