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대리청정
그리고 작금의 정세에서 이들 식민지 연합이 제시할 수 있는 러브콜이라 해봐야, 뻔한 것이었다.
"여왕이라···."
대한제국, 한성 경복궁.
이원철은 조금 전 있었던 여섯 식민지 연합의 대표들과 나누었던 대담을 회고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심 어딘가 어색했던 까닭이다. 젊어서 서역을 쏘다니면서 제법 서역에 가까운 사고관을 지니게 되었다고 자부했으나, 그런데도 여전히 여왕이라고 하면 어딘가 낯설었다. 왕이라면 으레 남성이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물론 진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어색한 감각에 불과했다. 당장에 영국 국왕도 얼마 전까지 여왕이지 않았던가. 인도로 파천하게 된 다음에는 실의에 빠진 끝에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그 장남이 보위를 이어받게 되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들 여섯 식민지 또한 때마침 국왕이 바뀌게 되어 그 틈을 타 자신들만의 국왕을 내세운다는 계획을 짜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저들 여섯 식민지 연합, 아니 장차 그들이 자칭하게 될 것이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왕국 국왕이 여성인가 남성인가도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 새로운 오스트레일리아 왕국 국왕이 전주 이씨 가문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이제는 상왕으로 물러난 빅토리아 여왕의 자손이 전주 이씨에게 시집을 온 빅토리아 말레타 한 사람뿐인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러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대답은 뻔했다. 전주 이씨 왕실과 혼인한 공주를 일부러 여왕으로 세우면서 한국을 뒷배로 얻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백인들이라고 모두가 우리 대한을 꺼리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오."
이원철은 애써 밝은 웃음을 지으며 껄껄 웃었다. 물론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건 이원철도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이라고 어디 한국이 마음에 들어서 그랬을까? 그저 당장 수출길이 끊어지면 살아날 길이 없었을뿐더러, 여차하면 한국에 정벌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까닭이다. 힘 있는 나라가 힘없는 나라를 병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그간은 으레 백인들이 백인이 아닌 이들을 정복하는 명분으로 사용되었던 제국주의를 이제는 반대로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절로 저렸으리라. 그런데도 이원철은 일부러 이런 말을 꺼냈다. 어느 정도 여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자신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아버지가 유럽과 거리를 두려고 해도 멸망을 각오한 전면전을 바라지는 않는다는 걸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서 보기에 작금의 여론확산은 이원철이 보기에 다소 위험했다. 일단 큰 갈래는 불매운동이지만, 외국인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항구지대는 여론이 적잖게 악화하였다고 하였다. 당장 폭동이 일어나고 하는 건 아니었지만, 가게들이 백인들을 내쫓고 건달패들이 은근히 백인들만 골라서 괴롭히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히 들어오고 있던 것이다. 이는 그리 좋지 않은 소식들이었다.
이런 사소한 사건들이 쌓이고 쌓이면 본격적인 외교 문제로 악화할 공산이 컸던 까닭이다. 이원철은 될 수 있는 대로 이번 불매운동은 불매운동으로 끝났으면 했지, 구태여 폭력사태로 화하여 유럽에 명분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어찌 천하에 우리 대한을 꺼리는 색목인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색목인을 꺼리는 대한인도 있으며, 색목인과 우애를 다지고자 하는 대한인이 있듯이, 색목인들 또한 그와 같을 것입니다."
"과인의 생각 또한 경과 같소."
어윤중 또한 이러한 심경에서는 이원철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순순히 이원철의 의견에 따라주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의 모습은 그가 이번 불매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시장 자유주의자인 그에게 이번 사태는 정치적 문제가 경제적 문제로 확산하는 듯하여 썩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원철도 어윤중이 순순히 제 말에 동의해주니 기분이 풀어져서는 은근한 미소를 띠며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윤중은 그의 아버지가 총애하는 신하 중에서 그와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원철부터가 군사적 패권보다는 외교적 영향력이나 경제를 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어윤중은 한국을 아주 제일의 경제 대국이자 그 경제력을 기반으로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키우는 경제패권을 주장하는 인물이었고, 이는 민생을 중요시하는 이원철의 생각과도 꼭 맞았다. 그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면서 가장 총애하는 인물이 있다면 단연 어윤중일 수밖에 없던 까닭이다.
"저들이 먼저 우리 대한을 따르고자 한 것은 분명 대한의 큰 복이오나 저들이 마음속 깊이 대한을 따르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당장 화를 피하고자 따르는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음에 걸립니다. 이번 기회에 두 번 다시 저들이 우리 대한을 감히 얕보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김옥균은 그보다는 강경한 모습이었다. 그는 시장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온건한 패권주의자에 가까웠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미국에서 오랜 세월 공사 생활을 지내면서 미국에서 외교를 배운 김옥균에게 있어서 외교란 곧 미국식 외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의 외교란 기본적으로 중남미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패권주의 외교와 그 밖의 세계를 향한 장사치 외교 두 개로 나뉘었다.
김옥균은 그러한 원칙을 충실히 따랐다. 다만, 그가 생각하는 대한이 패권이 미치는 범위는 아시아 대륙만으로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이 이원철과 조금 달랐다. 그는 러시아가 한국이 집어삼키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나라라는 점에는 이원철과 뜻을 함께했으나 최소한 호주, 더 바란다면 인도까지도 한국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에 두고 싶어 했다.
"허어, 엄포를 놓는다니. 분명 심려하는 바는 알겠으나,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소? 저들도 우리 대한의 강성함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부드럽게 일러두어도 충분하지 않겠소?"
"전하, 이태리의 선비 마키아벨리가 이르기를 만인에게 사랑받을 수 없거든 만인이 두려워하는 자가 되라 하였습니다. 우리 대한이 과연 저들 백인들에게 진정으로 사랑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이미 우리 대한을 충분히 두려워하고 있소. 우리 대한을 두려워하니 이렇게 우리 대한에 스스로 복속하고자 찾아온 것이 아니겠소? 과인은 저들을 과하게 겁주어 저들이 되려 우리 대한을 꺼리게 되지는 않을까, 그것이 못내 두렵소."
그 때문에 이원철은 김옥균을 어윤중에게 그러했듯이 좋은 말로 달랬지만, 그런데도 내심 어윤중보다는 꺼렸다. 그의 야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이원철이 생각하기에 지금 한국은 폭발적 성장세를 안으로 돌려 내실을 굳힐 때였지 무리한 확장을 꾀할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이원철 자신이 그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은 다음에야 김옥균이 바라는 방대한 패권도를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이원철은 믿었다.
다만 이러한 이원철의 생각은 그가 대리청정을 이었으면서 마주하게 된 각료들의 생각과는 어긋난 모양이었다. 현 대한제국의 고관대작들은 그의 아버지가 소년왕 시절 다 망해가던 조선을 이끌어 이룬 성공신화를 지켜보면서 그의 아버지를 보위하던 이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이 이원철에게 향하는 기대도, 지금의 대한제국을 보는 시선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점차 태상황으로 물러나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제의 의향도 있으니 안으로 삭히고 있지만, 기회만 온다면 우리 대한은 대제께서 막 보위에 오르셨을 때 그러했듯이 여의주를 문 이무기가 승천하듯 날아올라 온 천하를 웅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는 듯 보였다.
'지금이야 아바마마께서 버티고 계시다지만, 과연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도 이들을 잘 달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이원철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원철에게 조금 답답했던 것은, 김옥균으로 대표되는 고관대작들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이러한 온건한 패권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는 세계패권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려 한다든가 한국을 주도로 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세우려고 한다기보다는 자신들의 팽창 욕구를 이형이 당초에 주창하였던 아주 패권의 연장선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호주 대륙이나 인도 아대륙도 큰 범주 안에서 보면 아주 일부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관념적으로야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문제는 한국이 공식적으로 그러한 패권을 주창하였을 경우의 뒷감당이었다. 그동안 한국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에 있던 하북성 하나 합병한 것 가지고서도 한국 위협론이 들끓는 마당에 호주와 인도까지 범 아주 조약기구에 가맹시킨다면 그 뒷감당은 절대 쉽지 않으리라.
그런 와중에 이원철이 가장 꺼리던 인물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않거든 꼭 저들은 우리 대한을 가벼이 여기게 되고 말 것입니다. 미리견을 보십시오. 저들이 우리 황인종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 어디 그들이 우리 대한을 그만큼 흠모하기 때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리견이 우리 대한과 황인종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않는 것은 우리 대한과의 거래로 큰 이익을 보고 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 땅에 흥선왕 전하께서 남기신 충용무쌍한 검계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분명 그 말대로이오만··· 크흠."
"전하, 소인이 감히 간언하건대 호주 또한 이와 같은 선례를 따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강 전하께서 병약하시어 비록 흥선왕 전하께서 하신 바와 같이는 이루어지지 않겠으나, 흥선왕 전하께서 남기신 검계들로 하여금 호주까지 세력을 뻗도록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이 기회에 검계들을 보내어 저 백인들이 두 번 다시는 우리 대한을 가벼이 여기지 않도록 만드소서!"
"글쎄, 경의 충심은 내 잘 알겠소만···."
김가진의 참견에 이원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아버지는 김가진을 젊었을 적부터 총애하면서 그가 저지른 무수한 실수와 월권행위들, 가령 지난번 암살미수 사건을 끝내 막지 못한 것조차 용서하여 다시금 내부 차관으로 복직시켜주었지만, 이원철은 그가 썩 내키지 않았다. 그 스스로야 조국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조국을 위하여 일하는 도중에 지켜야 할 절차들을 으레 아무렇지도 않게 집고 넘기는 경향이 있던 까닭이다.
김가진으로 대표되는 과격한 패권주의자들은 비록 소수였으나, 서구의 인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백인종과 황인종 간의 숙명적인 최종전쟁이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미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 자신은 부정할지 몰라도 되려 한국 각료 중 누구보다 서역의 사고방식에 가까운 자들이었던 셈이다. 이원철은 도통 이들이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이원철이 보기에 이들은 한국과 아주를 위험에 빠트릴 공산이 큰 아주의 암 덩어리들이었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이들을 필요악이라고 여기고서 꾸준히 가까이 두었던 점과 차별화되는 점이었다. 이는 이형과 이원철의 사고방식이 달랐던 것도 컸다. 이형은 예전보다는 많이 유해졌더라도 여전히 만일 전쟁을 일으키는 게 국익에 맞는다면 거리낌 없이 침략전쟁이라도 승인할 인물이었으나, 이원철은 전쟁을 민생을 파탄 내는 백해무익한 것으로 여기고 있던 까닭이다.
"비록 흥선왕 전하께서 이루셨다고 하나, 검계란 본디 협이오. 우리 같은 관의 통제를 받지 않고서 저들 멋대로 의를 행한다고 자부하는 건달패란 말이오. 그와 같은 자들이 미리견 땅에서 우리 대한을 대표하게 되었다는 것도 꺼림칙한데, 그들이 장차 저 광활한 태평양을 독점하도록 두는 건 너무 위험하오."
"하오면 전하, 꼭 그들과 같은 계보가 아니더라도 그들과 흡사한 조직을 침투시키는 건 어떻사옵니까?"
"아무래도 과인이 말을 잘못 골랐던 모양이오. 그러니까 내 말은 이 이상 우리 대한이 협이라고 자칭하는 건달패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인상을 세계인들에게 심어주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오.
과인은 우리 대한이 세계인들에게 군자의 나라로서 흠모받았으면 하오. 세계인의 모범이 되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이오. 비록 언제나 깨끗한 수는 없겠으나, 깨끗하게 남을 수 있는 일에서까지 손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소. 아시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제야 김가진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이원철은 한참을 그를 노려다 보다가, 남몰래 작게 혀를 찼다. 겉으로만 수긍했지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인 것이다.
어쩌면 이원철에게는 비밀로 하고서 뒤에서 은근히 호주에 검계를 심어두고자 획책할지도 몰랐다. 아니, 거의 확정적으로 그럴 것으로 생각해도 좋았다.
'쉽지 않구나.'
이원철은 한탄했다. 참으로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그만큼 거대했던 것도 있지만, 고관들이 그를 자꾸만 아버지와 견주며 시험하려고 하는 것도 끔찍했다.
거기에 여기까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누구 하나 그의 동생과 제수씨의 의향을 고려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도 괘씸했다. 그가 일부러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들의 의향은 상관없이 국익만 생각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말이다.
'만일 내가 아버지였다면···.'
이원철은 문득 고민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그의 아버지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일단 고관들이 이렇게 나서지도 않았을 테고, 국무회의에 앞서 이강과 빅토리아 멜레타의 의향을 분명히 확인해 두었을 것이다. 당장 이강이 대형사고를 치기 전까지는 정략결혼을 미루고 미루던 아버지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돌연 머릿속 한쪽에 제동이 걸렸다. 불현듯 저 자신이 그의 동생을 고작 교섭용 탄환 즈음으로 가벼이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가 이제 와 그들의 의향부터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이미 국무회의를 시작한 다음이었다.
이원철은 그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전적으로 그의 경험 부족이 원흉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대리청정을 맡게 된 지가 얼마 안 되어 당장 고관들을 어떻게 상대할지를 고심하느라 막상 가장 중요한 당사자의 의향을 묻는 걸 깜빡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고심하던 이원철은 그의 아버지에게 공을 넘기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번 사안은 과인이 결단하기에는 과분한 듯하구려. 내 이번 일은 아바마마께 일러 고견을 여쭙도록 하겠소."
그의 아버지가 이미 외교나 군사에 관한 문제는 자신과 상담하라고 했던 것도 있지만, 이렇게 공을 넘기는 것 외에는 결정을 미루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도 있었다. 고관대작들 또한 이런 문제에는 으레 이형이 결정을 내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던지라 순순히 이원철의 결론을 따랐다.
그제야 이원철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는 그제야 그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또 한 사람의 권신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바로 김홍집이었다.
'이 대한의 만백성이 선비가 되는 그날까지 배움의 고삐를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겠다.'
이원철은 불현듯 그의 아버지가 술에 얼큰히 취하여 늘어놓았던 우스갯소리를 떠올렸다. 그의 아버지는 김홍집의 포부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듯했고, 실제로도 친영파라는 꼬리표까지 따라붙다 보니 김홍집은 한때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음에도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고서 금세 다시 교육부 장관으로 주저앉아 이리저리 휘둘리고만 있었다.
하지만 이원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작금의 한국이 힘이 넘쳐 주체를 못 하는 야생마와 같다고 여겼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와 같았다. 고속성장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예정이었고, 한국의 입지는 나날이 확대되고 있었다. 고관대작들은 점차 오만해져 가고 있었고, 국민도 점차 높은 공기에 취해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이러한 야생마를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힘을 빼놔야 한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이 쪼이고, 끝없이 일을 맡겨서 제풀에 지쳐 얌전해질 때까지 기력을 빼놔야 했다. 그리고 이원철이 생각하기에, 그 힘을 빼놓는 데에는 김홍집의 포부만 한 것이 없었다.
'예로부터 배움에 소홀하여 흥했다는 나라는 내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꼭 저 학생들을 다시금 학교로 돌려보내어 교탁 앞에 앉혀 놓을 것이다.'
그는 불타오르는 시선으로 가만히 김홍집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천천히 멀어졌다.
비록 겉으로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으나, 이 순간 두 사람은 한배를 탄 공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