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부부싸움
"우리 이야기 좀 해요."
"큼, 큼."
팔짱을 끼고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빅토리아의 싸늘한 시선에, 이강은 무심코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해댔다. 이강의 영 좋지 않은 몸 상태 때문에 항상 겨울에도 따뜻하다 못해 조금 더울 정도로 난방을 유지하는 그의 처소가 오늘따라 살이 에이도록 춥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이는 꼭 착각이 아니리라.
평소에는 그렇게도 살갑게 안기던 토끼 같은 자식들도 그날 따라는 온데간데없었다. 처소의 시녀들이 부부싸움에 휘말리기 전에 피신시킨 것인지, 아니면 저들이 미리 알고서 슬쩍 자리를 피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런 소소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강에게 이제 진정으로 중요한 건 그런 시시콜콜한 점이 아니라, 그가 지금 이 카랑카랑한 암사자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으니까.
"제가 배에 올라타는 걸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시죠?"
"아무렴 모를 리가 없지."
"그걸 알면서도 제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빅토리아는 눈알을 부라렸다. 이강은 차마 감히 눈을 마주칠 생각도 못 하고서 고개를 틀었다. 빅토리아의 시선에는 강한 배신감과 부정이 담겨 있었다. 그야말로 「두 번째 항해는 절대로 싫어요!」라고 눈으로 말하는 듯했다. 그녀가 일생의 첫 항해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었는가를 생각하면 이는 응당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강에게도 변명의 말은 있었다.
"그, 그렇지만 당신도 내가 얼마나 배를 좋아하는지는 잘 알잖아. 봐, 여기 탁상의 모형 배들을 보라고! 이거 처음 당신이 사 왔을 때,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이걸 만들어 봤을 때는 당신도 좋아해 줬잖아?"
"그래요, 그랬었지요."
"그렇지? 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항해 이야기가 나오길래 한번 말을 꺼내 봤을 뿐-."
"그래서 하필이면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뭐지요?"
물론 변명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뒤이어진 추궁에 이강은 이번에도 차마 답하지 못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분명 슬그머니 제독 이야기를 꺼내서 은근히 빅토리아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던 까닭이다.
다만 그것이 왕위를 노리는 야욕이라던가 재물이나 권위를 탐하는 탐욕에 근거한 것인가-하면 조금 달랐다. 사실 그런 야욕이 있었거든 차라리 이형에게 청나라 제위를 자신에게 물려달라고 떼를 썼지, 저 시골 벽지 촌구석 식민지의 왕위를 탐낼 리가 없었다. 그의 욕구는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도 무언가 나라와 가문을 위해 공헌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였다.
그리고 이번 호주 왕국 논의는 그가 나라와 가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공헌이 될 터였다. 어쩌면 역사책에도 큼지막하게 기록되지 않을까 낙관적으로 기대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강의 패착은, 그의 암사자와 너무 오랫동안 함께한 나머지 그 무시무시한 본성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 씨. 어쩌지.'
이강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식은땀을 흘려댔다. 기세 좋게 이야기를 꺼낸 건 좋았지만, 막상 그에게는 자기 뜻을 밀어붙일 패기가 부족했다. 기본적으로 정신은 육체에 따라간다고 하는 만큼, 날 때부터 나약한 육신을 지니고서 태어난 그가 강인한 정신을 지니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매일 같이 누워서 골골대면서 무엇이든 쉽게 포기해야만 하는 습관이 일찌감치 들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도 그가 선뜻 물러날 수 없었던 건 가족들의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신 차리자. 여기서 밀리면 안 돼. 대리청정 중인 우라질 형님이야 따로 말할 것도 없고, 누이동생들은 최씨댁과 혼사가 잡히지를 않나, 미리견으로 유학을 가지 않나 하면서 어마마마 속 썩이는 일 한 번 없이 잘 자라줬고, 하다못해 이휴 그놈도 이번에 소위로 임관해서는 노서아로 파병을 가는데 나만 아무것도 못 하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그래, 부부싸움이 뭐 별거야?
책에서도 싸움은 첫 기 싸움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라고 그랬어. 일단 눈부터 마주치고 허리도 쫙 펴고···!'
이강은 슬쩍 뒤돌아서서 제 볼을 때리며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았다. 형이야 원래 장남이고 본래 제 것이었던 걸 취한 것뿐이니 이제 와 질투하거나 패배감에 사로잡히기에도 뭣했고, 누이동생들이야 아버지가 좋을 대로 살라고 풀어줘서 저마다 삶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니 부럽기는 해도 그것뿐이었지만, 동생 이휴가 육군 소위로 임관한 건 그에게 심적 타격이 컸다.
그렇게 군문에 들어서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본래 꿈꿔왔던 바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휴는 보병 장교가 되었고, 이강이 그리던 것은 전함의 함장 내지는 함대의 제독이었으니 아주 같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괜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까닭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뇌어도 별로 변하는 건 없었다. 두 번 다시 그 지옥 같은 항해를 되풀이하기 싫다는 흉흉한 빅토리아 멜레타의 서슬 퍼런 눈빛이 그의 각오를 번번이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 까닭이다.
다만, 이 점은 빅토리아 멜레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 진짜. 좀. 제대로 좀 해봐요, 당신. 이러면 꼭 나만 나쁜 년 된 것 같잖아.'
빅토리아는 마음속으로 저 자신에게 투정을 부렸다. 마음속 투지가 그대로 지각을 뚫고서 맨틀까지 내려가는 듯했다. 고개를 숙이고서 빅토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흠칫흠칫하는 남편의 모습은 영락없이 귀가 접힌 채 꼬리를 내리고 끙끙대는 강아지 그 자체였다. 그 꼴이 못내 답답해 빅토리아는 이마를 짚고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울화보다도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가 그러고 있으니 퍽 우스워서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는 게 더 고역이었다. 꼭 혹시나 버려질까 봐 끙끙대는 강아지 같아서 차마 더는 강하게 쏘아붙일 수 없게 된 까닭이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만 같았던 울화도 어느 틈엔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분명 시작할 때는 뭔가 더 쏘아붙일 말들이 잔뜩 있었는데, 막상 본무대에 들어서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고 말았다.
그렇게 침묵이 찾아왔다. 빅토리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울화에 당혹해지고 있었고, 이강은 그런 빅토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이 지루한 침묵을 깬 것은 빅토리아였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안 돼요. 당신, 여름철에 1시간 산책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무슨 1달간 항해를 하겠다는 거예요?"
"그건 또 언제 이야기를! 그것도 신혼 초 때나 그랬지, 요즘에는 등산도 거뜬하다고!"
"예, 그랬죠. 그래서 그날 이후로 나흘간을 끙끙 앓았고 말이에요."
"어, 사흘 아니었나? 첫날에는 기억이 없고, 둘째 날에는 침대 위에서 앓았고, 셋째 날에 침 맞아서 넷째 날 아침에 일찍 퇴원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래요, 사흘. 하루 줄어서 참 좋겠네요. 그래서 배에서도 그렇게 생활하실 작정이에요? 그러다가 배 위에서 쓰러지면 궁에서처럼 바로바로 요양도 못 해요, 진짜!"
"계속 선실에 가만히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퍽이나요."
"···씁."
이강은 차마 답하지 못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생각해도 그토록 그리던 배에 올라타면 온종일 선실 바깥에서 수평선을 구경하고, 파도를 구경하고, 바닷냄새를 맡고 할 것 같지 선실에 잠자코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속내를 그대로 지적당했으니 뭐라 답할 말이 있을 턱이 만무했다.
대신에 이강은 접근법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생각해봐요."
"갑자기 말씨가 사근사근해졌네요."
"흠흠. 아무튼, 이번에 받아들이면, 당신은 여왕이 되는 거라고. 그렇잖아. 그건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도시에서 공장 매연은커녕 소똥 냄새나 풀풀 풍기고 총독궁이라고 해봐야 웨스트민스터의 반의반도 안 될 촌구석 여왕으로 살 바에야 차라리 여기 한양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다가 죽고 싶네요."
"저 사람들도 찾아온 성의라는 게 있잖아. 거기다가 저 사람들은 당신을 여왕으로 섬기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라고. 그 성의는 봐줘야 하지 않을까?"
"절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그럴싸한 왕관 거치대를 찾아온 사람들인걸요, 뭘."
"그래도 거기 가면 이곳 사람들보다는 같은 영국인끼리 서로 잘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게 지금 영어 안 쓴지가 10년이 넘어가는 사람한테 할 소리예요?"
"···설마 까먹었어?"
"당신도 조선말 안 쓴 지 10년쯤 되면 일상회화도 어려워질걸요?"
"그, 그래도 원래 구주 쪽 상류층 용어는 불어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옥스브리지 영어도 똑바로 구사 못 할 식민지 촌놈들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거 아닐까요."
"씁···."
이번에도 이강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대로 빅토리아 멜레타가 입을 열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말이다.
"당신, 혹시 왕이 되어보고 싶어서 저한테 자꾸 이러는 거예요?"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갑자기 왜 이러는지 시원하게 말 좀 해봐요. 형님이 저 좀 설득해 달래요?"
"그 양반이 이런 일로 나한테 부탁할 사람처럼 보여?"
"그럼 도대체 왜 그러는데요?"
"···그냥 나도 좀 뭔가 일이란 걸 해보고 싶어서."
이번에는 빅토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게 어떤 심경에서 나온 말인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러했다. 그간 이강이 얼마나 스스로 짐 덩어리가 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통받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강도 더 말을 이어나가지는 못했다. 쑥스러웠던 까닭이다.
결국,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건 빅토리아였다.
"그 몸으로 왕가의 의무를 다한 것만으로는 만족 못 하겠다는 건가요?"
"크, 크흠! 그건 그러니까, 있잖아. 의무라고 하기에는 내 사심이 너무 많이 들어갔으니까, 크흠. ···그렇지?"
"아, 제발. 부탁이니까 자꾸 대뜸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 좀 하지 마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할 거면 이쪽 눈치 좀 살피지 말고 당당히 하던가! 한두 번도 아니고 진짜 사람 낯간지럽게!"
"미, 미안. 아니, 미안하오. ···크흠!"
이강은 사레라도 들린 듯 헛기침을 해댔다. 물론 이렇게 갑자기 사레가 들렸을 리가 없었다. 그냥 괜히 멋쩍어서 헛기침이라도 하면서 멋쩍음을 달래야 했을 뿐이다. 그런 이강을 빅토리아는 찌릿하고 쏘아보다가, 더는 못 참겠는지 뚜벅뚜벅 이강에게 다가가 그의 왼편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혹시나 부러질까 봐 있는 힘껏 걷어차지는 못하고, 그냥 툭 하고 말이다.
"아야!"
"엄살 좀 피우지 마요! 진짜 그냥 툭 하고 가져다 대기밖에 안 했는데! 그리고 아프다고 폴짝거릴 시간이면 자리에 앉기나 해요! 괜히 콩콩거리다가 접질리면 어쩌려고!"
"아, 알았어."
빅토리아의 호통에 기가 죽어 이강은 제자리에 앉았다. 병약한 그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반쯤 눕는 거나 다름없이 뒤로 확 젖혀진 소파였다. 빅토리아가 시집을 온 다음 처가에 부탁해서 공수해온 몇 안 되는 혼수품이기도 했다. 그렇게 앉은 걸 확인하고 난 다음에야 마음이 놓였는지 빅토리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서는 자리에 앉아 정강이를 쓸어내리고 있는 이강을 내려다보며 표독스럽게 한마디 톡 쏘아붙였다.
"이러면서 저랑 같이 호주에 다녀오겠다고요?"
"윽···."
"뱃멀미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나 해요? 겨우 뱃멀미에 익숙해질 때 즈음 되면 이제는 육지 멀미가 찾아오는데, 뱃멀미는 진짜 흔들리는 거기나 하지 육지 멀미는 나 혼자 미친 것 같다고요. 토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당신 그러다가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질 거라니까요? 안 그래도 키도 벌쭉하니 커서 균형 잡기도 어려울 텐데, 왜 자꾸 그래요?"
"그건···."
이강은 선뜻 답하지 못하고서 우물쭈물 걸렸다. 그것이 더 답할 말이 없다는 증거라 여긴 빅토리아는 쐐기를 넣고자 입을 열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에서 말을 쏟아내기도 전에, 우물쭈물하던 이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옆에서 잡아주면 괜찮지 않을까?"
그제야 빅토리아는 그게 받아칠 말이 없던 게 아니라 제가 생각해도 쑥스러워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제가 생각해도 쑥스러웠는지 이강은 그 뒤로 푹하고 고개를 떨궜다. 귀까지 새빨갛게 물든 게 평소에 그 혈색 없는 안색은 어디 간 것인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빅토리아는 그런 이강을 한참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부끄러워서라거나 감동적이어서라거나 같은 게 아니라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맥이 빠져 그랬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빅토리아는 앞머리를 쥐어뜯으며 투덜거렸다.
"아니, 그야 잡아주겠지요. 당연히 옆에서 붙들어줄 거긴 한데···."
"그럼 된 거 아냐? 이제 당신만 넘어지지 않으면 되겠네."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아니 진짜!"
"어, 어. 그렇게 흔들지 마! 어지럽잖아. 당신 옷에 토하면 어쩌려고!"
"시끄러워요!"
못내 답답했는지 빅토리아는 이강의 양어깨를 콱 움켜쥐고서 마구 앞뒤로 흔들어댔다. 이강이 뭐라 불평하건 이번에는 상관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가 여기까지 열이 오른 이유가 바로 이강이었으니 그 분풀이를 하는데 분이 쌓이게 한 당사자의 심경을 고려해줄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흔들어대다가, 빅토리아는 끝내 제 팔이 아파서 이강을 놓아주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이강이 빅토리아의 비단옷에 한바탕 토악질을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 어두운 주황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니 토악질을 했어도 별 티는 안 났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고 난 다음, 빅토리아는 숨을 씩씩 고르면서 글자 그대로 눈알이 핑핑 돌고 있던 이강에게 씩씩거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 몰라요! 마음대로 해요! 그 대신에, 괜히 다치거나 앓아눕거나 하면 죽을 줄 알아요. 난 경고했어요. 벌써 두 번 넘게 경고했지요? 이대로 못 알아들었으면 바보이거나 천치겠지요! 당신, 제 말에 동의하시겠지요?"
"음···."
이강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겨우 암사자의 입에서 항복선언이 나왔지만, 뭔가 개운치가 않았다.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거의 엎드려 빈 끝에 얻어낸 항복선언이라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내심 놀랄 만큼 기발한 화법으로 당황하게 하여주고 싶었는데, 막상 저 서슬 퍼런 눈빛에 기가 죽어 준비한 말 중 절반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서슬 퍼렇던 눈빛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에 자리하고 있는 건 어딘가 분통해 보이는 것 같기도, 씁쓸해하는 것 같기도, 안쓰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눈초리였다. 그리고 그게 어느 쪽이건 간에, 지금이라면 한 번 매우 놀라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당신이 손쓰기 전에 죽으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당신 지금 저 미치는 꼴 보고 싶어요!"
"아,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다시 그 오묘한 눈초리는 온데간데없이 서슬 퍼렇고 흉흉한 눈초리가 돌아오는 걸 바로 코앞에서 확인한 이강은 그제야 뒤늦게 고개를 있는 힘껏 숙였다. 뒷골이 꿰뚫릴 듯한 강렬한 눈빛을 받아낸 다음에야, 이강은 암사자에게 용서받을 수 있었다.
짝!
"악!"
정정.
손바닥으로 등도 세게 얻어맞은 다음에 말이다.
* * *
"좋아요. 갑시다. 그 대신에, 대관식만 끝나고 나면 곧장 돌아올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이튿날, 빅토리아는 다시 대표단을 만났다. 그리고 그 전날과 달리, 이번에 그녀가 전한 대답은 긍정이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무언가 엄청난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건 익히 짐작할 수 있었어도 정확히 그 전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빅토리아 멜레타가 이게 어쩐 일인지 설명하지 않았을뿐더러, 전날의 대담을 엿들은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여기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드물었다. 이들 대표단도 그랬지만, 한국의 고관들에게 중요한 건 그녀가 마음을 돌렸다는 사실이었지 그녀가 어째서 마음을 돌렸는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로서 중요한 건 그녀가 다시 마음을 돌리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짓는 것뿐이었다.
물론,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예도 있었다. 가령, 이원철이 그러했다.
"도대체 무슨 요술을 부렸길래 저 고집 센 제수씨가 마음을 돌린 거냐?"
"···몰라도 돼."
하지만 그 또한 호기심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어쩐 일인지 이강이 답을 피하던 까닭이다. 평소 아무리 작아도 자신의 공로가 있다면 확실하게 이를 과시하고는 했던 이강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는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원철은 이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거 참. 녀석, 몸도 약한 녀석이 뜨겁기도 하지···."
그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겠구나, 하고 지레짐작했을 뿐.
그리고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뜨거웠던 건 이강의 등뿐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