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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504화 (504/530)

504화 주고받기

러시아에서 철병안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고, 또 내전 종식 이후로 부분적으로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가령, 러시아 내전 종전 직후에는 여전히 20만에 이르는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데에 반해 오늘날 러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아주 합종군은 고작해야 5만 명, 3개 사단 남짓으로 이미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기실 러시아 국내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만을 의의로 삼고 있던 셈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 첫째로 러시아 국민이 이들의 존재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둘째로 구태여 합종군이 상시 주둔하고 있어야 할 만큼 러시아가 미약한 나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정권이 안정되면서 신생 러시아 민주 공화국은 그들에게 쓰인 괴뢰정권이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들 아주 합종군만이라도 철군시키고자 백방으로 노력했고, 한국에서는 못 이기는 척 조금씩 주둔군을 줄여왔다.

어차피 러시아에서 저항하기 시작하면 오래 버틸 수도 없을 테니, 「우린 어디까지나 봉건 전제정치에 맞선 러시아 민중들의 자유 투쟁을 지원한 것뿐 러시아 민중을 수탈하거나 정치에 간섭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라는 선전을 내세우면서 단계적인 철군 순서를 밟으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 뒷면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주둔 기간을 길게 늘이면서 러시아에 영향력을 깊숙한 곳까지 심어두려고 한 계산이 숨어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계획이 갑자기 뒤바뀌게 된 것은 한성에 있던 이원철의 건의 때문이었다.

"『어차피 노서아 철군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으니 이제 와서 기한을 다소 앞당긴다고 한들 이에 관하여 왈가왈부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이 노서아 철군을 앞당긴다면 구주의 여러 나라에 우리 대한이 구주에 진출하고자 하는 야욕이 없음을 알릴 수 있을 테니, 이는 곧 구주를 손아귀에 넣고자 하고 있는 미리견과 우리 대한을 대비시켜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이는 여전히 우리 대한을 의혹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노서아 백성에게 우리 대한이 신의 있는 이웃이라는 걸 보여주어 경계심을 한껏 불식시켜줄 것이며, 구주의 백성이 뒤에 있는 우리 대한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보이는 노서아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하여 줄 것입니다. 우방과의 신의를 지키는 한편으로 우리 대한을 향하는 적의의 시선을 한풀 꺾을 수 있을 테니, 이것이 곧 묘안이 아닐까 합니다.』"

어째서 결단이 아니라 건의였는가 하면, 이는 군사부문이자 외교부문이었으니 엄밀하게는 아직 이원철이 결단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원철은 자기 뜻을 내각과 논의하여 묘안이라 확신을 얻은 다음 북경에 머물고 있던 이형에게 건의하였다.

"녀석, 생각보다는 제법인데."

이러한 이원철의 발상은 이형을 내심 감탄하게 했다. 얼핏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건수를 하나로 엮어 표면적으로 체면이 상하는 일을 피하면서 간접적으로 먼저 고개를 숙이자고 제안한 것이다. 물론 최선은 저쪽에서 먼저 숙이는 것일 테지만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어쩔 수 없이 이쪽에서 먼저 숙이되 될 수 있는 대로 체면이 상하는 일을 줄여보기 위해 나름 묘수를 낸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그간 대한에서 보여준 팽창적인 행보를 다소나마 무마시켜줄 터였다. 요컨대 러시아에서 한발 물러남으로써 남방에서 이 보 전진하는 대신 북방에서 일보 후퇴하여 여전히 전진한 건 그대로라도 종합적으로 보면 일보밖에 전진 안 했다고 변명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는 얼핏 사소해 보여도 여전히 한국이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는 걸 보여줄 수 있으니 중요한 부분이었다.

문제는 이형이라고 과연 이를 생각해본 적 없겠느냐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아직 경험이 부족해. 위에서 명령하면 으레 당연히 아래에서 고분고분 따를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먼, 그래."

이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건 원세개의 존재였다. 내전이 끝나고서 장장 10년간 러시아에 머물면서 자신의 동료와 수족들을 곳곳에 만들어 뒀을 원세개는 이미 러시아의 왕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권신이 된 지 오래였다. 이제 와서 위에서 철병하라고 한들 순순히 따를 위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원세개를 아예 배제하는 것도 곤란한 것이, 애당초 이형이 원세개를 그곳에 보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의 정치군인적 면모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그가 단지 내전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것만을 기대했다면 한성근을 보냈지 원세개를 보내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형은 원세개가 지나치게 설칠까 봐 경계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원세개가 정치군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뽐내기를 기대하기도 했던 것이다.

쉽게 말해, 원세개가 한국에 계속 충성하고 있는 한 원세개가 러시아 국내에 심어둔 그의 수족은 간접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러시아 국내에 심어둔 수족이기도 했다. 전봉준의 역할은 원세개가 한국을 배신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족쇄이자 감시자였지, 언젠가 원세개의 수족을 쳐내고 무력화시키기 위한 처형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원세개 본인의 정치적 감각을 고려하면 그 또한 자신에게 기대되고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원세개와는 어떠한 상의도 없이 대뜸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통보는 원세개에게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여질 공산이 컸다. 자신은 한국에 충성을 다했는데 한국이 먼저 자신을 배신했다면서 폭주할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건 이형이 바라지 않는 전개였다.

'이대로 계속 살려두기에는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죽이기에도 너무 위험해. 죽을 궁지에 몰린 생쥐는 고양이도 물어뜯는 법이라는데,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널 이제부터 잡아 죽일 거다- 보여주면 그놈은 당장에 제 한 몸 살려보겠다고 무슨 수라도 쓸 놈이란 말이야. 거기에, 이대로 저놈이 폭주하게 두면 그놈이 기껏 만들어 놓은 수족들도 어쩔 수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할 테고.'

이형이 판단하기에, 원세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사마의 같은 부류의 인간상이었다. 기회가 온다면 언제건 주인마저 잡아먹으려고 들 테지만, 반대로 그럴 기회만 오지 않는다면 죽는 날까지 충성을 다하는체할 간사한 인간상 말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모험하지 않아서 자신이 죽거나 패가망신을 당할 상황만 아니라면 구태여 모험을 하려고 할 인간군상이 아니라는 뜻도 되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간사한 인간상은 어떻게 다루면 될까? 해답은 간단했다. 빼앗아 가는 한편으로 다른 무언가를 내주면 된다. 그래야지만 상대가 만족하고, 또한 경계를 놓게 될 테니 말이다.

문제는 원세개에게 군권을 앗아가는 대신에 무엇을 내줄 것이냐는 것이고, 이걸 고민하는 것이 이형의 일이었다.

"우라질 놈. 네가 결국 이 아비가 해야 할 일감을 하나 더 늘려주는구나."

이형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서 투덜거렸다. 좀 편해 보려고 했더니 결국 일감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형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왼손 검지로 탁자를 두드리며 가볍게 펜을 돌렸다.

* * *

러시아, 모스크바.

"이런 빌어먹을."

원세개는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조기 철병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마침내 그의 귓가에도 전해진 것이다. 물론, 시기상 전봉준과 이휴에게 전보가 도착하기에 반나절 앞서 말이다. 이미 대한제국의 원수이기 이전에 러시아 제국(?)의 섭정이 되어버린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한 나라의 실권자가 일개 장군보다 정보가 늦어서야 되겠는가.

애당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긴 했다. 이미 그동안 러시아 국내의 반발로 꾸준히 원정군의 규모는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고, 늦어도 10년 안에는 완전 철병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 본국에서 들려온 철병을 앞당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은 원세개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데에 충분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이미 예상되었다시피 말이다. 당연하게도, 원세개로서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줄 생각은 없었다.

"소신이 얼마나 군말 하나 없이 열과 성을 다해서 황상을 섬겼는데. 황상,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는 겁니다, 황상!"

빠득.

원세개는 이를 갈았다. 다분히 자기중심적이었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단지 열과 성을 다해서 섬긴 이유가 쏙 빠졌을 뿐이었다. 그가 군말이 없었던 건 괜히 미움을 사 파직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열과 성을 다해 충성한 건 황제가 뇌물이나 아첨 같은 것보다 실적을 더 선호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의 권세가 황제라는 뒷배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윤중이 떠나간 다음에도 전봉준이라는 알기 쉬운 감시자를 내세운 탓에 함부로 배신이나 역모를 꾀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것도 있었으나- 애당초 원세개 본인에게 역모를 꾀한다는 발상 자체가 없기도 했다. 그는 노릴 수 있는 것만 확실하게 노리는 이리였지, 감히 넘보지도 못할 과실을 탐하다 목숨을 잃고 마는 머저리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실제로도 이 무렵 원세개는 제 권세와 부귀영화를 한껏 챙기면서도 이형이 그에게 맡긴 소임에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또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본국에까지 그 악명이 전해지지 않을 만큼은 절도를 지켰다. 이유야 말할 것도 없지만, 괜히 파직당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간사한 인간이었고, 또 야심만만한 인물이었으나 그만큼 영악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라고 큰소리쳐보기는 했지만. 제기랄, 이거 만만치 않은데."

원세개는 있는 힘껏 유리잔을 꽉 하고 움켜쥐었다가, 이내 손에서 힘을 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잠시간에 유리잔에는 금이 쩍쩍 가 있었다. 그 당장에라도 깨져버릴 것만 같은 유리잔이 꼭 당장에라도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그의 권세를 보여주는 것 같아 원세개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무렵 원세개가 러시아에서 큰소리를 떵떵 칠 수 있었던 기반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러시아 인민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레닌의 볼셰비키였고, 또 하나는 러시아 민주 공화국의 군사고문이자 대한제국의 원수로서 그가 행사할 수 있는 군사력이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러시아에 진출한 아시아인 무역상들이었다.

이외에도 여야 대표의원들이라던가 행정부 내 각계각층의 관료들이라던가 러시아 철도 협동조합, 농업 협동조합 대표 이사진이라던가 각계각층에 넓게 포진되어 있었으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곁가지였다. 애당초, 이들은 원세개가 섭정이나 다를 바 없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기에 원세개에게 몰려든 것이지 원세개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곤란했다.

문제는, 원세개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핵심 인맥들도 썩 믿음직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레닌. 그놈은 확실하게 유능한 놈이지만 이럴 때 쓸 수 있는 놈은 아니야. 그놈은 차라리 이 틈에 내가 그간 만들어 놓은 기반을 홀라당 삼키려고 들 이리 같은 놈이다. 먹물 놈들도 마찬가지야. 요것들은 제 세력만 안 건들면 윗대가리를 아무리 갈아 끼워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녀석들이지. 그럼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건 군인들이랑 상놈들 정도인데···.

아들딸 장가들이고 시집 보내고 하면서 어르고 달랜 군바리 놈들이야 그나마 사정이 나아도 상놈들은 애당초 끄나풀이고 진짜배기들은 개성에 뿌리내리고 있으니 개성에서 지령이라도 하나 떨어지거든 곧장 내게서 돌아설 거란 말이지. ···쓰으읍.'

그에게 가장 뼈아팠던 건 독자적인 자금줄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의 권세에 기대어 사업하고 있는 이들은 많았으나, 진정으로 그와 그의 가문을 위해 사업을 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렇다고 대대로 가문의 기반이 될 대농장도 없었다. 러시아에서 농토를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농민이어야 했을뿐더러, 그 절차나 소유권 문제도 복잡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러시아 민주 공화국 고유의 경제제도 때문이었다. 원세개로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인가 뭔가 하는 이 동토의 기이한 제도는 벌써 10년째 동토에 머물고 있어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가 않았다. 사실, 원세개로서는 과연 이곳 러시아의 경제관료들이 자신들이 뭘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을지나 궁금했다. 물론 아무래도 좋은 의문이었다.

중요한 건 결국, 한성에서 한 번 고삐를 잡으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는 없을 거라는 서글픈 현실이었으니까.

"차라리 확 전쟁이라도 일으켜봐?"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었다. 누구와 전쟁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꼭 전쟁을 일으킬 필요도 없이, 전쟁 위기라도 좋았다. 아무튼, 전쟁이 일어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원정군 철군은 한참 뒤로 미뤄지리라. 그러나 이내 원세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거야말로 미친 짓이지. 아직 거기까지 할 필요는 없어."

일으키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뒷감당이다. 그야 물론 전쟁을 일으키면 그의 권세는 조금이나마 더 오래가겠지만, 이는 지금쯤 유럽과 적정선에서 화평하기를 바라고 있는 황제의 기대와 어긋나는 행동이다. 그럼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황제의 손에 잡혀 죽을 수밖에는 없다. 살아남으면 언젠가 기회가 다시 올 수도 있을 테지만,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가 지금 생각해야 하는 건 어떻게든 러시아에 남는 방법이었다. 설령 원정군이 모두 철군하게 되더라도 그가 지난 10년간 쌓아온 인맥과 기반만 남아있다면 어떻게든 재기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쫓겨나면 그걸로 끝이다. 원세개는 원정군 모두가 철수하더라도 자신만큼은 러시아에 계속 남을 수 있는 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나보고 대륙 횡단철도 공사의 총책임을 맡으라고···?"

"그렇습니다. 참으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버님께서 그간 대한을 위해 충성을 다하셨거늘 고작 이런 처우라니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경우가 아니잖습니까!"

그의 장남, 원극문은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듯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에게는 이러한 조치가 유배나 다름없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일찌감치 러시아의 제후를 꿈꾸던 원세개와 달리 원극문은 언젠가 러시아에서 쌓아 올린 재화와 인맥을 기반으로 화려하게 한성에 입성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원세개와 그 가족들만 계속 러시아에 남으라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원세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대륙 횡단철도 공사가 처음 시작된 게 10년도 더 전이었고, 그때 주요 구간들만 어떻게든 이어보자면서 한 번에 동원되었던 인부만 100만 명을 훌쩍 넘겼다. 그리고 그 100만 명을 동원했는데도 여전히 주요 구간만 연결된 것이 고작이지. 철도 협동조합 녀석들이 허풍을 친 게 아니라면 복선에 철교, 터널 공사까지 모두 끝나려면 앞으로 모든 게 순탄대로처럼 풀려도 20년은 더 필요할 거라 했다.'

그렇다. 짧아도 20년이다. 그가 지금 쉰이 조금 되지 않았으니, 앞으로 20년이면 일흔이 조금 안될 터. 그쯤 되면 평생이나 다름없다. 황제는 그에게 앞으로 20년은 더 러시아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가를 내준 것이다. 과연 이것이 유배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 황제가 원세개가 지금 가장 좋아할 일이 무엇이고 가장 싫어할 일이 무엇일지 헷갈리는 기초적인 실수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원극문에게는 이것이 노골적인 추방령으로 들렸을지 몰라도, 원세개에게 이는 봉작이나 다름없었다. 군권을 앗아가는 대신, 공사에 필요한 징발권과 평생토록 러시아에 체류할 합법적인 명분을 제공해주었으니 이게 봉작이 아니면 무엇일까?

원세개는 남몰래 입꼬리를 뒤틀었다.

"과연 황상께서 아직 나를 버리지는 않으실 모양이로구나."

"···아버님?"

"아니, 넌 몰라도 되는 일이다. 어서 더 늦기 전에 채비나 해라."

그제야 원세개는 가벼운 마음으로 철군 명령을 기다렸다. 그가 예상했다시피, 그의 근무지가 크렘린궁에서 철도청으로 옮겨간 걸 제외하면 철군 명령이 떨어진 이후에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딱 하나.

대륙횡단철도 공사를 위하여 총책임자가 언제나 공사현장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이 걸주 같은 놈아!"

결국, 원세개는 악을 쓰며 대륙횡단철도의 정 반대편 종점, 한국 철도청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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