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507화 (507/530)

507화 황제대담

나폴레옹 4세와 이형의 회담은 사뭇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이형이 나폴레옹 4세가 무엇을 원해서 찾아왔을지를 쉬이 짐작했듯이, 나폴레옹 4세 또한 이형이 무엇을 원하고 있을지를 미리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거북이처럼 안전지대에 틀어박혀서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겠지.'

당연하게도 여기에서 말하는 안전지대란 대한제국의 영향권을 뜻했다. 아직 초대형 개도국 연합체에 지나지 않는 범 아주 조약기구를 조금씩 성장시켜 장차 먼 훗날 세계패권을 노려볼 수 있는 초대형 선진열강 연합체로 우뚝 서게 한다. 이것이 현 범 아주 조약기구와 이를 이끄는 한국 정부의 속셈일 거라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조차 되지 못했다.

현 세계를 주름잡는 3대 세계열강들을 이야기할 때, 누가 봐도 프랑스에 필요한 건 본인이 주도할 국제기구였으며, 한국에 필요한 건 시간이었고, 미국에 필요한 것 또한 시간이었다. 다만 한 가지, 한국에 필요한 시간이 과실이 무르익을 때까지의 시간을 뜻했다면 반대로 미국에 필요한 시간은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야 함을 뜻한다는 것만이 달랐다.

그리고 지금 프랑스와 한국은 서로에게 필요한 걸 제공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한국은 유럽국가 중 오로지 프랑스에만 아시아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 그 과실을 탐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할 수 있었고, 반대로 프랑스는 미국에 맞서면서 한국에 가장 절실한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었다.

"허허, 이거 이렇게 환대받을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한국에 찾아올 걸 그랬소."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시오. 이거 본래라면 요즈음 한가로이 있는 내가 귀국에 찾아가야 했을 텐데, 그 역이 되고야 말았으니 송구한 마음뿐이오."

"어허, 그런 말 말아주시겠소. 내 한국이 이 아시아에서 얼마나 칭송받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거늘. 괜히 귀국의 명예에 흠을 내어 아시아의 분노를 사지는 않을까 두렵소."

"하하하! 이것 참, 원래 이런 말을 주고받는 자리라는 걸 알아도 이렇게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쑥스럽구려. 그러나 내 알기로 귀국 프랑스 또한 유럽 만국의 칭송을 듣고 있노라 알고 있거늘 그렇다면 우리 한국이야말로 유럽 만국의 분노를 살 일을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소?

'제기랄. 아무리 필요한 일이었고 또 급했다지만 내가 이런 곳까지 직접 행차하게 될 줄이야. 오냐, 어디 두고 봐라. 이번 기회에 아예 유럽 전역을 내 발아래에 무릎 꿇리고, 언젠가는 저 시건방진 양키 놈들까지 무릎 꿇려 너희에게 항복을 종용할 날이 올 테니까!'

'이놈 눈이 웃고 있지를 않는구먼? 하여간 음흉해서는. 도대체 머릿속에 또 무슨 음흉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는 몰라도, 뭐. 마음대로 해봐라. 아무래도 자식 농사는 내가 이긴 것 같으니까. 지금 이대로 30년만 있어도 내 아들놈과 네 아들놈은 서 있는 눈높이부터가 달라질 것이다.'

경복궁에서 서로 처음으로 마주한 두 황제는 행사 내내 서로 살갑게 마주 보며 환히 미소 지었다. 물론, 겉으로만 살가웠을 뿐 속으로는 제각각 전혀 다른 속셈을 품고 있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애당초 이들 3대 열강이 3대 열강으로 손꼽히던 이유는 이들이 세계패권을 충분히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또 실제로도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와 세계패권을 상대에게 양보할 생각이 아니라면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라도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꾸준히 대중들에게 얼굴을 비치면서 이런 이미지 만들기에는 도가 터 있던 두 사람의 황제였다 보니 사진 너머로는 조금도 그런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지만 말이다.

"허허허!"

"하하하!"

'정말이지 난쟁이가 따로 없군. 정말 이 꼬마가 젊은 날에는 전장을 주름잡았던 아시아의 나폴레옹이라고? 흥, 하여간에 형편없이 생겨서는.'

'자식, 젊었을 적에는 제법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봐줄 만하더니, 결국 머리가 훌러덩 벗겨졌군. 모발 한 올 없이 견디기에는 서울 날씨가 상당히 춥지? 보채지 않아도 빨리 돌려보내 줄 테니 걱정 붙들어 매라, 이 대머리 놈아.'

수면 아래로는 은근하고도 치열한 기 싸움이 오갔다. 가령 악수하면서 서로의 손을 진액을 짜듯이 있는 힘껏 조인다던가, 아니면 나란히 걷다가 실수한 척 은근히 발을 밟는 식으로 말이다. 당연히 멀리 떨어져 있는 군중이나 신문 사진 너머의 독자들이라면 몰라도 현장에 있는 각료들이나 기자들에게는 이러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을 리도 없었을 테지만, 이들은 일제히 외면을 택했다.

침묵하는 편이 국익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뿐더러, 이 둘을 함부로 언론에서 다루었다가는 특종 이전에 분노한 폭도들의 손에 돌을 맞아 죽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 스페인과는 잘 이야기가 풀릴 수 있도록 꼭 좀 이야기해주시오. 우리 대한은 평화를 사랑하오. 피를 보지 않고서 끝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겠소?"

"부디 안심하시오. 우리 프랑스 또한 평화를 제일 사랑하기는 마찬가지라오. 그간 오래도록 우리의 오랜 친구와 우리 사이를 멀리하게 하였던 오해가 풀린 이 좋은 날, 어찌 친구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하겠소? 이 일은 내게 맡겨주시오."

그것과는 별개로 거래는 거래대로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우선 태자나 이강 보다는 못해도 이형 또한 어느 정도 불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뿐더러, 애당초 실질적인 교섭은 모두 이면에서 마무리된 상황에서 나폴레옹 4세의 방한은 마지막으로 서류에 도장만 찍으러 온 격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익히 예견되었다시피 한국은 호주를 비롯해 말레이 제도에 대한 범 아주 조약기구의 대대적인 팽창에 대하여 양해를 받았고, 프랑스는 황제가 몸소 한국을 찾으며 자존심을 구긴 대가로 아시아 시장에 다시금 접근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었다. 이는 불매운동이 시작된 이래로 처음으로 유럽국가가 아시아 시장에 다시금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된 사례였기에, 프랑스는 유럽국가 중 유일하게 아시아 시장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격이었다.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진행된 것은 필리핀에 관련된 부분으로, 어느 정도 대가를 요구받을 것이라 여긴 것과 달리 필리핀은 사실상 거스름돈으로 처리되었다. 이미 백인 십자군이니 뭐니 말만 시끄럽지 유럽국가 중 누구 하나 호주를 돕고자 나서지 않았던 판국에 필리핀이라고 다르겠냐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당장 저 양키들이 대서양을 통째로 삼키겠다고 나선 판국에 이 머나먼 태평양까지 와서 한국과도 맞서라니, 그거야말로 미친 짓이지. 지금은 어떻게든 동과 서에서 양키들을 포위해 견제하는 구도를 만들 생각을 할 때지, 괜한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야.'

나폴레옹 4세로서는 차라리 스페인에 압력을 넣어 한국에 빚을 하나 만들어두고 한국과 충돌할 여지를 줄여 당분간 프랑스의 직접적인 경쟁자를 미국과 독일을 비롯한 유럽국가들로 한정 짓는 편이 낫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는 없었다. 만일 프랑스 혼자서 미국을 꺾고 연이어 한국까지 격파할 수 있었다면 모를까, 현실은 그 반대였으니 말이다.

나폴레옹 4세는 장차 양강구도가 도래할 거라 믿었다. 프랑스와 한국으로 대표되는 기존 구대륙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신대륙의 도전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새로운 세계질서 말이다. 이는 그가 황백대전을 들먹이는 인종주의자들을 멀리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서로 힘을 합쳐 신대륙의 도전에 맞서야 할 구대륙을 인종 핑계로 쪼개놓으려는 미국의 수작이라고 나폴레옹 4세는 믿었던 것이다.

'적어도 아주 생각 없는 야심가나 바보는 아닌 것 같군. 하기야 그러니까 지금껏 황제 노릇을 하는 거겠지만.'

이는 이형이 그리는 앞으로의 세계질서와도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형이 그리는 건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가 제각각 맞붙는 다극 체제였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다극 체제에서, 아시아는 유럽과 아메리카 중 어느 쪽과도 대립할 필요 없이 적당한 우호 관계는 유지하면서 거리를 유지하면 그만이었다.

쉽게 말해 나폴레옹 4세가 노리는 것이 양강구도를 통한 우호국들과의 결속력 확대였다면 이형이 노리고 있는 건 중립특수였다. 이는 아직 선뜻 프랑스만의 것이라고 하기 힘든 유럽 경제 공동체를 거느리고 있는 프랑스와 한국의 확실한 통제 아래에 놓여있는 범 아주 조약기구를 거느린 한국의 차이이기도 했다. 프랑스는 양강체제가 아니라면 이웃 국가들을 자기 뜻대로 끌어가기 힘들었지만, 한국은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두 나라의 개략적인 지향점은 어느 정도 일치했기에, 행사는 이렇다 할 특이점도 충돌도 없이 무난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반응은 절대 무난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일전에는 미리견의 태상황이 우리 대한에 입조를 하고자 찾아오더니, 이번에는 프랑스의 황제가 입조하고자 찾아오다니! 정말이지 이제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황상께서는 또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구나!"

"마침내 온 천하가 우리 대한의 기치에 고개를 조아렸으니, 바야흐로 작금의 천하는 대한의 천하가 되었다! 이것 참 경사로세, 경사로세!"

"솔직히, 황상께서 무언가 수를 써주실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일이 순탄하게 풀릴 줄이야···. 정말로 우리 대한에게 천운이 따라주고 있구나!"

아시아, 특히 한국의 시민 여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유교적 교육을 받은 노년층이나, 여전히 유교적 세계관에 익숙한 중장년층은 특히 그랬다. 일전에 그랜트가 그러했듯이 이번 나폴레옹 4세의 방한 또한 프랑스가 대한에 입조한 것으로 해석했던 까닭이다. 이들이 보기에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미국에 이어 프랑스까지 제후국으로 삼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거의 모든 주류 언론들이 직접 이러한 방향으로 보도하든, 아니면 간접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든 한 입을 모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신문이나 소문 정도를 제외하면 정보습득 방법 자체가 제한되어있던 대중은 그저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대로 환호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온 아시아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고, 한 입을 모아 승리를 칭송했다.

이렇게 여론조성에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잔뜩 성이 난 학생 시위대를 승리에 도취시킨 다음 조금씩 해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라면 그럭저럭 한국과 범 아주 조약기구를 위해 도움이 되었으나 이제부터는 어디로 폭주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 폭주하기 전에 폭주할 명분부터 치운 다음 과격분자들만 남겨 정리하려 한 것이다.

"학우 동지 여러분, 우리는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저 악독한 제국주의자들, 인종주의자들에 맞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승리는 아직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저들이 뿌리뽑히는 그 날까지 투쟁을 이어나갈 것이며, 하나 된 학생동맹은 최종승리의 그 날까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더불어 전진, 또 전진해 나갈 것입니다!"

"""황제 폐하 만세! 승리 만세! 범 아주 학생동맹 만만세!"""

실제로, 그저 황제의 신묘한 지략을 칭송하던 중장년층과 노년층과는 다르게 흔히 회맹세대라 불리는 청년층 중에는 지금이야말로 더욱 가열하게 투쟁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았다. 특히 학생시위를 지도한 지도부들은 중 이런 이들이 많았다. 혹자는 정말로 순진하게 자신들의 불매운동으로 유럽을 쓰러트렸다고 믿었기에 그랬지만, 혹자는 열기가 가시고 다들 냉철해지기 시작하면 기껏 손에 넣은 추종자들을 잃게 될까 봐 그러했다.

이들은 이러한 학생시위가 단발적인 우발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활동하면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정치 운동으로 우뚝 서기를 바랐고, 그 꼭대기에 자신들이 군림하게 되기를 바랐다.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드디어 승리했으니 인제 그만 볼일 보러 가자」라고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제일가는 공포였던 것이다.

"왜 지난 정기총회에 참가하지 않았지? 분명히 1달 전부터 총원 참석하라고 언질을 줬을 텐데. 설마, 이제 와서 혼자 내뺄 생각이냐?"

"아니, 이겼으면 다 끝난 거지, 뭔 배신자 취급이야? 나도 이제 내 인생을 살아야지! 내 인생을 책임져줄 것도 아닌 주제에!"

그리고 실제로도 이는 빠르게 현실화하였다. 애당초 자신의 인생을 학생운동에 건 몇몇을 제외한 일반 참가자들은 요 몇 년간 학생혁명과 불매운동, 반서구 시위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에 피로감을 호소하던 차였다. 그런 와중에 프랑스 황제가 한국을 몸소 방한하면서 승리로 마무리되니, 이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창시절의 추억 삼아 하나둘 훌훌 털고 떨어져나오기 시작했다.

시위지도부는 이를 억지로 붙잡아두려 시도했으나, 이는 역효과를 일으켜 더욱 학생운동 내 파벌 분화와 일반 참가자 이탈을 가속했다. 여기에 이런 학생운동을 내심 탐탁지 않아 하던 윗세대들과 슬슬 학생운동을 축소하고자 하던 한국 정부의 이해가 합쳐지자 한때 아주를 떠들썩하게 하던 학생운동은 빠르게 쪼그라들어갔다.

그렇다고 학생동맹이 아예 소멸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때 현지 정권마저 가볍게 갈아엎을 수 있었던 전성기에 비하면 세계 평균에 비해 다소 왕성하게, 그리고 대규모로 이뤄지는 수준으로 축소된 것이다.

"나라를 생각하는 젊은 청년들의 마음은 물론 기특하지만, 그들이 나서야 할 만큼 천하가 혼란한 것도 아니지 않던가?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며, 과인은 오늘날 학생들이 학우들과 함께 나라를 심려하느라 그들의 인생에 소홀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우려스럽다. 나라를 심려하다 그들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 시기를 소홀히 한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감히 말하건대, 이만 학생들은 제각각 학당으로 돌아가 배움에 힘쓰도록 하라."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은 대리청정을 한창 수행하고 있던 태자 이원철의 권고였다. 한 줄로 줄여서, 「이제 충분하니까 이만 각자의 인생을 살아라」라는 내용의 직설적인 해산 권고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더욱 빠르게 힘을 잃게 되었다. 이들이 따르고 우상시하는 이형 본인이 직접 내린 명령은 아니었으나, 그 이형의 장남이 이만 해산하라고 권고한 것의 무게는 이들 회맹세대에게 절대 가볍지 않았다.

한때 아주 전역에서 1천만의 참여자를 자랑하던 학생동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전역을 통틀어 수십만 남짓으로 축소되었다. 이조차 적은 건 아니었으나, 전성기에 비하면 거의 10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이는 아시아의 학생운동이 본질적으로 관영 운동이었음을 증명했다. 한국 정부로부터의 지원이 끊어지고 되려 학생운동의 확산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힘없이 쪼그라들었으니 말이다.

용도폐기, 혹은 토사구팽이라고 불러야 할 결말이었다.

"마침내 천하가 진정으로 평안해졌도다. 이제야 비로소 내 뜻을 마저 펼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이는 또 다른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정력과 사건으로 넘치던 격동의 시대가 아닌, 평화와 고요 속에 번영의 시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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