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너의 제국
그러나 그에 앞서, 이형이 미리 이야기 해줘야 할 인물이 있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장남 이원철이었다.
"이리 오너라."
"예, 아바마마."
정확히 같은 장소, 같은 날. 해가 저물고 쟁반처럼 둥근 보름달이 떠오른 심야.
이형은 달을 등지고 앉았다. 자연히, 이원철은 달을 마주앉게 되었다. 마침 이형의 앉은키가 작았던 것도 있어서, 달빛은 정확하게 이원철의 안면을 향해 쏟아부어 졌다. 눈이 부셔서 그 아버지의 얼굴이 잘 보이지를 않았다. 달을 등지고 앉은 이형은 꼭 당장에라도 우화등선해버릴 듯 신비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그의 착각일 터였다. 멀쩡한 사람이 우화등선할 리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원철은 이형이 입을 열기 전부터 확신했다.
지금 그의 아버지는 작별을 고할 준비를 하고자 그를 지금 이 자리에 부른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널 어째서 여기에 부른 줄 네가 알겠느냐."
"송구하오나,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내 너에게 제위를 물려줄까 하여 이리 너를 불렀다."
담담한 어투였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그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이렇게 일부러 말을 꺼낸 것이리라. 그러나 이원철에게는 달리 들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탓이었다. 꼭 그의 할아비, 이하응이 살아생전에 이따금 보여주던 검게 두목으로서의 면모를 엿보는 듯했다.
이원철은 무심코 침을 삼켰다. 기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건 꼭 거짓이리라. 내심 마침내, 혹은 더디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부정한다면 그것 또한 거짓이리라. 그러나 이원철은 그리 말할 수 없었다. 사람이 그래서는 아니 되었다.
그는 낮에 김가진과 전봉준 그 두 사람이 그러했듯이, 제자리에 엎드려 제 아비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소자는 아직 보위를 잇기에는 턱없이 배움이 부족합니다. 어찌 소자에게 이리도 무거운 짐을 내리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엎드려 청컨대, 뜻을 거두어주소서."
"내 당장에 물려준다고 하지 않았다. 경술년까지 기한을 주마. 네가 느끼기에 제왕이 되기에 배움이 부족하다고 여겨지거든, 그때까지 모조리 익혀두거라."
"하오나···."
"난 네 할아비에게 왕이 되는 데 필요한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고서 이 자리에 올랐다. 어느새 네 나이가 벌써 서른이요, 정 곤경에 처하거든 이 아비에게 배움을 청한다면 내 얼마든지 손이 닿는 대로 네 치세를 도울 생각이거늘. 무엇이 그리도 문제란 말이더냐."
팔뚝을 기둥에 기대어 턱을 괸 이형은 이원철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겸양이 퍽 우스웠는지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이제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서 이원철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낯이 뜨거웠다. 그 그윽한 눈빛이 꼭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하여 낯부끄럽기만 했다. 훌러덩 하고 벌거숭이가 된 것만 같았다.
시선은 계속하여 고개 숙인 이원철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이원철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이형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부드럽고-적막한 눈빛이었다.
침묵을 깬 것은 이형의 한마디였다.
"궁금하지 않더냐."
"···예?"
"내 어찌 네 할아비에게 무엇하나 배우지 않고서 제왕 노릇을 했는지 말이다. 궁금하지 않더냐?"
이원철은 얼떨떨하게 눈을 가만히 깜빡거렸다. 뜬금없다고밖에 할 수 없는 물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를 골려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거나, 언제나 그랬듯이 멋대로 주절거리고 싶어졌을 뿐일 것이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보위를 넘길 것이라고 이야기를 꺼내는 이 중요한 자리에서까지 이럴 줄은 미처 몰랐을 뿐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원철은 답했다.
"예, 궁금합니다."
"녀석, 거짓말할 거면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서 하지 그러느냐."
이형은 피식하고 웃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의 웃음일지 이원철은 알지 못했다. 다만, 이형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슬며시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그저 하염없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웃고 또 웃다가, 그는 대뜸 말했다.
"내가 미륵이니라."
"···예, 그렇습니까."
이원철은 순간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답했다. 감정의 기복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쉬운 어조였다. 누가 봐도 한눈에 마지못해 호응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 덤덤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이형은 제 머리를 탁치며 말했다.
"이거 말이 헛나왔구나. 그래, 내가 미래에서 온 놈이라서 그렇다."
"예. 타임머신 말씀이시지요. 저도 그 소설 좋아합니다."
이원철의 대답은 이번에도 즉각적이었다. 이형이 어떤 글에 영감을 얻었을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서책을 읽는 걸 즐기는 그에게 미래인 이야기는 이미 첫선을 보인 이래로 지난 15여 년 간 너무나 흔해져서 따로 뭔가 반응해주기에도 곤란한 낡아빠진 소재였다.
그것이 불만스러웠는지 이형은 단박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슬쩍 이원철을 돌아보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녀석이 아비가 진지하게 말하는데 진지하게 듣지를 않는구나."
"진지하게 들을 이야기여야 진지하게 듣지요. 미래에서 왔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아바마마께서는 익성군 저하의 보위를 가로챈 찬탈자라는 말씀이신지요?"
"흐음···. 찬탈자라. 글쎄.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아바마마, 부탁이니 그런 농담 말아주십시오. 제 간이 다 철렁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이원철은 골을 싸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대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특히나 이형이 찬탈자라는 말에 반응하여 사뭇 진지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을 때는 외마디 비명이라도 질러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은 제 허벅지를 어떻게든 꼬집고 비틀며 가까스로 동요를 가라앉힌 덕택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말의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으나, 그 의심도 이원철은 어떻게든 제 머릿속 한 쪽에 억지로 파묻어 버렸다. 일부러 의식해서 좋을 것 하나 없는 고백이었다. 그를 골려주려고 하는 농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잊는 편이 옳았다. 무덤까지 묻고 가는 것이 올바른 진실이리라.
그런 이원철을 이형은 어딘가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흘겨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면서 이형은 다시 밤하늘의 달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미안하구나. 괜한 이야기를 꺼냈던 모양이다."
"예, 이번에는 농이 지나치셨습니다."
이원철은 이형의 한마디를 농담이라고 규정지었다. 설령 농담이 아니더라도 농담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이제부터 제위를 물려받을 이원철이 무사히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황실의 정통성에 해가 될만한 정보는 사라지는 게 옳았다.
그러고나니 이형은 또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이형이 입을 열었다.
"하오나, 아바마마께서는 아직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어째 제게 이리 일찍 제위를 물려주시려 하시는지, 혹 이유를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이유라···."
그제야 이형은 흘끗하고 이원철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팔을 괴고 앉은 채로, 이형은 말없이 이원철을 눈으로 위로 아래로 훑어보았다. 훑어보고서, 그는 다시 밤하늘의 달을 돌아보며 말했다.
"글쎄, 이유라. 내 죽기 전에 못난 아들놈이 익선관을 쓰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렇다고 한다면 되겠느냐."
"아바마마, 어찌 소자를 속이려 하십니까."
"속이려 한 적 없다. 그래, 그럼 지금 네게 물려주는 편이 앞으로 이 나라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런다고 하면 어떻더냐. 이거라면 이유가 되겠느냐."
이원철은 입을 다물었다. 이형의 설명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형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설득력은 충분했다. 일신의 쾌락보다 나라의 영광을 생각해온 황제였기에 아주 만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만은 아닌 듯했다. 내심 설마 하면서도, 이원철은 되물었다.
"···그럼 아바마마께서 미래인이신 것과 연관된 문제입니까?"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해두마."
이형은 그제야 이원철을 다시 흘끗 돌아봤다. 이원철은 입을 다물었다. 차마 뭔가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런 이원철을 향해 이형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본디 살았던 나라를 대한민국이었다."
"제국, 이 아니로군요."
"그래, 아니지. 당연히 황제는커녕 양반네들도 없었다. 공화국이니 당연하지. 그러나 이제 그 나라는 없을 것이다. 내가 역사를 바꿔버렸으니 말이다. 아마 이대로 100년, 아니 1000년이 흘러 대한민국이 세워진다고 한들 그 나라는 내 조국이 아닐 것이다."
"···소자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음을 후대에 전해주셨으면 하십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원철은 물었다. 지금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걸 보면 분명 그런 의도가 아닐까, 하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 더는 미련은 없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매달려봐야 나만 괴로울 뿐이지. 거기에 이 대한제국은 내 손으로 세운 내 나라다. 내가 세운 내 나라를 내가 아끼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이 나라를 아껴준다는 말이더냐."
"허면, 소자가 무엇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원철은 답답했다. 평소와는 달리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주지 않고서 자꾸만 말을 뱅뱅 돌리니 가슴이라도 두들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이형은 사뭇 여유로웠다.
이형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가만히 턱수염을 쓰다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내가 세운 이 대한제국이 대한민국보다 위대해졌으면 한다."
"···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온 천하를 통일하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랬다면 네가 조금 더 고생을 해야 했겠구나. 하지만 그렇지 않다. 생각해보니 내가 표현을 잘못했구나. 물론 내가 세운 이 대한제국은 국제적 지위건, 국력이건 모든 면에서 내 옛 조국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민주, 민생, 민권은 아직 멀었다. 한참은 더 남았어. 내 남은 생애를 모두 바치더라도 이 셋 중 무엇하나도 그에 버금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서 이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을 향해 선 채, 이원철을 등지고 서서, 이형은 말을 이어갔다.
"물론 민생이야 시대가 한 세기는 차이가 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텔레비전조차 없는 시대가 아니더냐. 그러나 민권과 민주는 다르다. 달라야 하니라. 내가 기억하는 대한민국은 천박했으나 자유로웠고, 강자 독식의 정글이었으나 한 나라의 국가원수조차 국민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나라였다. 우리 대한제국은 어떠냐?"
"모르겠습니다."
"내가 여흥 민씨를 쳐내기 전까지는 내 눈치를 보느라 누구 하나 여흥 민씨를 감히 헐뜯으려 하지 못했다. 하물며, 내가 국민의 눈치를 보는 걸 본 적이 있더냐. 아마 전혀 없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내가 이 나라의 국민이 선출한 국민의 황제요, 민심을 대표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래서야 누가 내 말을 믿어주겠느냐. 지금 이 대한제국은 내 사유물이나 다를 바 없다.
위선에 지나지 않는 민주와 위에서 내려준 걸 그저 감사히 여길 줄만 아는 민권. 그것이 작금의 대한제국이라는 말이다."
이원철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입을 열어도 되는 순간이 아니었다. 아마 입을 연다고 한들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었다.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반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도대체 무슨 수로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한다는 말인가. 지금은 그저 경청해야 할 때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형은 말을 이어갔다.
"난 그러한 오늘날의 대한제국이 마음에 들지 않느니라. 다름 아닌 내가 세운 나라가 아니더냐. 참고할 반면교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정답지를 훔쳐왔다고 해도 좋았지. 그렇다면 당연히 그보다는 훌륭한 나라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아직 한참은 멀었다. 내가 황제로 남아있을수록, 내가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발버둥칠수록 이 나라는 형편없게 변할 것이다.
보다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기는커녕 또 누군가 위대한 자가 나타나 모든 걸 해결해주기만을 마냥 바라게 될 것이고, 시키면 따르고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노예들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내 어찌 낯부끄럽게 그런 형편없는 나라의 국부가 된다는 말이더냐. 그래서는 아니 된다. 내가 사서에 국부라 기록될 나라라면, 반드시 그보다는 위대한 나라가 되어야만 옳다."
그렇게 일장 연설을 쏟아내고 난 다음에야 이형은 이원철을 돌아보았다. 보름달을 등지고 선 이형은 눈이 부셨다. 꼭 달에서 내려온 신선 같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이형이 자신을 미륵이라 자칭했어도 이원철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빛을 등지고서, 싸늘한 밤바람을 등에 업은 채, 이형은 말했다.
"난 이 일의 적임자가 아니다. 적임자가 될 수 없다. 내가 무언가 이 나라에 더욱 베풀고자 하거든 이 나라의 국민은 나를 칭송하기에 바빠 스스로 국민이기를 포기하고 백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하여, 나는 이 일을 네게 물려주려 한다. 알겠느냐?"
"소자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저 밤하늘의 달을 본받거라. 마음 같아서는 저 밤하늘을 본받으라 하고 싶으나, 그건 네게 괜한 부담을 주는 것 같으니 달을 본받거라. 난 태양이 되고야 말았다. 너무도 찬란히 빛나 그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는 태양이 되고야 말았지. 넌 나와는 달라야 한다. 조금은 실수해도 좋다. 내가 네 실수를 보듬어 줄 테니까.
나는 나의 제국을 거대하고, 부강하게 만들었다.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너의 제국을 자유롭고, 지혜롭게 만드는 일이다."
이원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막무가내였다. 이원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의 구상은 어떤지 들어보기도 전에 자신의 구상은 이러이러하고 이런 구상을 생각해낸 이유는 또 이러이러하니 너는 앞으로 나의 구상을 현실화시키는데 평생을 바쳐야 한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쪽으로는 그것이 가장 이형다운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제야 이원철은 이형이 혹시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 제정신이었다. 제정신으로 미래가 어떠니 대한민국이 어떠니 지껄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졌지만-원래도 이해 못 할 언행을 일삼던 아버지가 아니던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지. 내가 이 세상 모든 이치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던가? 이건 내가 몰라도 되는 일이다.'
이원철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깊이 생각해봐야 머리만 아플 터였다. 이원철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자는 김홍집 장관을 제 곁에 두고자 합니다."
"흠, 홍집이 녀석을 말이더냐?"
"예. 아는 것이 곧 힘이라 하였습니다. 무지한 이는 더욱 많은 걸 아는 이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누군가에게 속아 이용당하고 있는 자를 일컬어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어찌 무지가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무고하게 고통을 받게 된 피해자들입니다.
소자는 배움으로써 이 나라를 자유롭게 만들겠습니다. 국민들에게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가르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속지 않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능히 불의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나라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그건 이원철의 포부였으며, 출사표였다. 그에게 제위를 넘기겠다는 그의 부친이 듣는 앞에서 그가 장래 어떤 나라를 어떻게 만들고자 하는지에 대하여 포부를 털어놓은 것이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가벼울 리가 없었다.
이형은 침묵했다. 그는 우둑하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하다가, 조금 불안해진 이원철이 무언가 한마디를 덧붙이려 하기 전에-이형은 이원철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그를 품 안에 안았다.
품에 안고서,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마땅히 너의 제국은 그리 되어야 할 것이다."
이형은 그제야 웃었다.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잔잔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