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두 사람의 황제
물론 이형이 사전에 이야기해뒀다고 하여 제위 계승이 예, 그렇습니까-로 끝날 리가 만무했다.
"아니 되옵니다, 폐하!"
"어찌 대한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뜻을 거두어 주소서!"
어찌 보면 일상화된, 아니 된 전통이나 다름없는 낯익은 풍경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일찍이 선조가 그러했듯이 정치적 난국에 부딪힌 왕이 일부러 양위를 들먹이며 신하들의 충성을 시험하거나 어쩔 수 없이 왕위를 계속 유지하며 왕권을 드높이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조금 달랐던 것은 이번에는 황제가 진심으로 태자에게 이만 제위를 물려줄 것을 바라고 있었으며, 신하들은 진심으로 이를 막으려 했다는 것이 조금 달랐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작금의 천하는 사실상 황제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일찍이 무수한 건국 시조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는 분명 장장 500여 년이라는 세월 간 한반도를 다스려온 전주 이씨 왕가의 왕이기도 했으나, 그가 오늘날 대한의 황제인 까닭은 더는 그가 전주 이씨 왕가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위업에서 권위를 창출했고, 무수한 전쟁에서 승전하여 자신의 권력을 완성했다.
지난 50여 년간 그는 한국인들에게 알기 쉬운 성공의 상징이었다. 그가 한 예측대로 언제나 들어맞는 건 아니었으나 그가 가리킨 방향은 언제나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어왔고, 그 끝에 오늘날의 대한제국이 태어났다. 그것을 모른다면 그는 결코 한국인이 아니었다.
황제 없이 이 제국이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을까? 혹은 황제 없이도 제국이 계속하여 번영할 수 있을까? 스스로 되물어 보면 볼수록 대답은 회의적이었고, 그럴 때마다 황제가 앞으로도 계속 이 대한을 이끌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를 앞으로도 계속하여 영광으로 인도하여주소서!"
"황상, 황상의 백성이 아직도 황상께서 이 나라를 이끌어주시기를 고대하고 있나이다!"
"이렇게 엎드려 비나이다. 이 나라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양위를 반대하는 관료 중에는 도가 지나쳐서 이형을 신적인 존재를 대하듯 대하거나 아니면 양위를 곧 대한 멸망으로 인식하고서 호들갑을 떠는 이들도 많았다. 이런 경우는 특히 하급 관료들이나 한국에 귀화한 제후국 출신 관료들에게 두드러졌다. 이형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며 그를 대단히 우수한 영웅 정도로 추앙하던 고관대작들과는 달리, 이들은 이형을 그가 이룬 업적들을 통해서만 접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거기에 이들 하급 관료 중에는 승급이 막혀 만년 중간관리직에 머무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 20~30대의 젊은이들이라는 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이형이 제국을 건국한 다음에 태어난 이들이었으며, 당연히 이들은 이형이 황제가 아닌 세상을 겪어본 적도 없었다. 그들에게 황제는 곧 이형이었고, 이형은 곧 황제였다. 그것이 뒤바뀐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황제가 아니게 되는 순간을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 황제의 양위결정은 너무나 갑작스러웠으며, 또한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충격적일 수밖에 없던 까닭이다.
제후국에서 한국에 귀화한 경우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이들은 물론 대한제국의 영화에 기대기 위하여 귀화한 때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황제에 매료되어 그를 섬기고자 한국에 귀화한 이들이었다. 조금이라도 황제의 도움이 되고자 귀화한 이들이 황제가 떠난 대한제국을 과연 이전처럼 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대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만, 다들 그쯤 해두시오. 내 결심은 이미 정해졌소. 이 이상 이 일로 왈가왈부한다면 내 가만두지 않으리다."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 이형의 결정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애당초 이형이 양위를 결정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처럼 자신의 존재감 때문에 대한제국이 망가져 가는 상황이었으니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그는 대한제국을 아무 생각 없이 신적인 지도자가 명령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신정국가로 만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모두가 초인적인 지도자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라면, 결국 초인적인 지도자가 죽는 순간 그 제국은 모래 위에 서운 누각처럼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형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그가 죽은 뒤에도 수백 년, 아니 더 나아가 수천 년간 변함없이 이어지기를 바랐지 그가 사라짐과 동시에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양위에 반대하는 자들이 회의에 부치는 최악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이형은 양위를 결정한 셈이었다. 결국, 이형은 자신의 발치에 엎드려 양위를 물려줄 것을 청하는 수백, 수천의 관료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대한을 버리려 하는 것이냐는 끔찍한 비명마저 무시하고서 말이다.
"어째서 어윤중 대감께서 정면에 나서지 않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구려! 황상께서 물러나신다면 그분도 성치는 않을 텐데 말이오!"
"가만. 그것참 이상하구려. 그분이 이제 와 눈이 흐려지셨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이제 와 순순히 물러나실 분도 아닌데···."
"그냥 노망이 나신 건 아니요? 우리 모두 대감이 얼마나 그 보고서 하나를 위해 열과 성을 쏟으셨는지는 알지 않소. 그만큼 정력을 쏟았으면 일찌감치 노망이 와도 어쩔 수 없지."
"아니, 내 생각은 조금 다르오. 내 생각에는 그보다는··· 허허, 이것 참. 더 늦었으면 이거 다들 큰일 날 뻔했구려."
"뭘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속 편히 웃고 있는 거요? 거 뭔가 알아냈거든 같이 좀 들읍시다!"
이형이 단호히 자기 뜻을 전한 뒤, 양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차차 사그라졌다. 황제의 엄포가 두려웠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눈치 빠른 이들이 보통 이런 상황에서 가장 목소리를 키울 전봉준, 김가진을 비롯한 이형의 최측근들이나 어전회의에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내각의 일원들이 조용하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건 이미 사전에 이에 관하여 무언가 비밀스러운 교시가 내려왔을 거라는 걸 암시했다. 다시 말해, 이미 양위는 기정사실이라는 이야기였다. 이 시점에서 눈치 빠르고 처신에 능한 관료들은 반대대열에서 빠져나왔다. 그 뒤 본격적으로 각 당의 당수들이나 나이도 경력도 지긋한 원로들이 수습에 나서면서 다시 대다수 관료가 빠져나왔다.
그 뒤에도 남아있는 관료들에게는 황제가 예고했다시피 엄중한 벌이 내려질 것이라 여겨졌으나- 예고와는 다르게 엄중한 벌은 없었다. 다만, 헌병들이 나서 집회를 강제해산 시켰을 뿐이었다. 이는 이형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에게 엄벌을 내리기 꺼려지기도 했지만, 괜히 양위를 커다란 소란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게 더욱 컸다.
황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엄벌을 내렸다는 선례가 남게 되면 후대에 두고두고 해악이 될 게 뻔하니, 그냥저냥 조용하게 만드는 선에서 타협하고 넘어간 것이다.
"상제께서는 새로운 황제를 보우하소서!"
"""황제 폐하 만세! 대한제국 만세!"""
그 뒤에도 「엄명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없었던 걸 보면 황상께서도 내심 미련이 남으신 게 틀림없다」라는 논리로 양위를 반대하는 관료들은 꾸준히 나타났지만, 그들은 모두 유의미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고서 하나둘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다. 무언가 반응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당사자인 황제가 그들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서 없는 사람 취급하는데 그야 싸울 맛이 날 리가 없었다.
손바닥도 맞부딪혀야 소리가 난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이 무관심이야말로 황제가 그들에게 내린 가장 지독하고 끔찍한 형벌이라 할 수 있었으리라.
그리하여 이형의 공식적인 퇴위와 황태자 이원철의 황제 즉위는 서력 1910년 8월 29일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이를 두고 길하지 않은 날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미신일 뿐이라는 일축에 결국 황제의 뜻대로 진행된 것이다.
"변하는 것은 없으니 모두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주기를 바라오. 과인은, 아니 짐은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 앞으로도 많은 것을 태상황께 배워나갈 것이니, 크게 심려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려."
태자인 이원철이 새로이 황제가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국민을 위무하는 일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형 시절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끝까지 양위에 반대하던 양위반대파들에게 큰 위안거리가 되었다. 비록 제위에서는 물러났다고 하나 이형이 태상황으로서 앞으로도 계속하여 현 황제를 보좌할 것이라는 증명이었으니 말이다.
이미 태종과 세종이라는 선례도 있지 않던가? 그들 중 이원철이 세종에 버금가는 대제가 될 거라 기대하는 이들은 드물었으나, 전 황제가 계속 곁에서 보좌해 준다면 적어도 명군 흉내는 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호의적인 기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반대파들마저 일단 변화를 수긍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면서, 이형의 돌발적인 양위선언으로부터 이어진 짧은 혼란은 끝이 났다.
태상황과 황제.
두 사람의 황제가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 * *
한성, 종묘.
"이걸로 만족한다면 좋겠구려."
누군가의 신주 앞에서, 이형은 이죽거리며 웃었다. 이미 머리도 수염도 새하얗게 센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노익장이었다. 그에게서 더는 젊은 시절과 같은 활달함이나 정력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런데도 온 세상이 제 단전에 담긴 듯 의젓한 걸음걸이는 좌중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 이형은 드물게도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종묘를 거닐고 있었다. 누군가의 제사를 위해서였다. 더욱 정확하게는, 간만에 회포라도 나누려고 찾아온 것이었지만 말이다.
신주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곧, 본래 그의 몸뚱어리가 가져야 했을 시호였다.
"그래, 죽어서라도 황제 소리 들으니 기분이 어떻소?"
이형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당연하게도 그가 죽어서 받아야 할 시호를 생전에 미리 받은 건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은 간단했다. 추숭이었다. 왕으로서 죽은 이하응을 끝내는 황제로 만들어 종묘에 옮겨준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묘호 또한 고종이라고 하였다.
하필이면 이하응에게 고종이라는 묘호와 본래 그가 받아야 했을 시호를 넘긴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형이 죽은 다음 위의 시호와 고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아예 고조나 대한 태조라면 모를까 고종은 그의 치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시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고종이라는 묘호와 그 시호를 아예 없었던 거로 하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웠다. 그를 대신해서 본래 조선의 왕이 되어야 했을 이 개똥이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 같아서 께름칙했다. 그래서, 이형은 신료들의 의아한 시선을 무시한 채로 이하응을 추궁하며 그에게 본래 이 개똥이가 지녀야 했을 묘호와 시호를 떠넘겼다.
어차피 이하응이라면 황제 추숭에 의의를 두지 그 묘호나 시호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거 답답하구려. 시원하게 욕이라도 한 사발 들어야 하는데 이 사람이 혼구멍이 막혔는지 말 한마디 없으니 원."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이형은 신주 앞에 주저앉았다. 그곳에 이하응의 혼백이 서렸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의 경험에 빗대어 보아도 영혼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지금쯤이면 이하응의 혼백 또한 윤회 전생했으면 모를까 일부러 그를 보려고 여기 오지는 않았을 테니 더더욱 그러했다.
결국, 이건 그의 혼잣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형은 그걸 알면서도 이하응의 혼백이 담겨있다는 신주 앞에 주저앉아 그 차분한 시선으로 존재하지도 않을 이하응을 찾았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듣고 싶은 말이 있었던 까닭이다.
"욕하려거든 욕해도 좋소. 보나 마나 뭘 또 이해 못 할 짓을 벌이는 거냐고 투덜거리고 있을 테지. 그렇지만 어쩌겠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최선인데."
휘이잉.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낙엽들도 그에 흔들려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평범하고 우연한 자연현상이었다. 이형은 상관하지 않고서 말을 이어갔다.
"그렇소. 이제는 댁도 알다시피 내 미래 지식 때문이요. 이게 없었다면 아마 나도 이런 짓은 안 했을 텐데, 어쩌겠소. 이놈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을. 난 죽는 날까지 이놈만 믿고서 살 거요. 댁의 혼백이 윤회해서 미래로 갔을지 나처럼 과거로 갔을지는 모르겠지만, 미래로 갔다면 지금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이해할 거라 믿으리다."
계속하여 바람이 불었다. 잔잔한 바람이었다. 이형은 잠시간 말을 멈추고서, 가만히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신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더구려. 내가 댁을 이긴 건 순전히 이 지식 덕택이지, 나 자신은 그저 공략집에 적힌 대로 움직인 사기꾼이라고 말이오."
우뚝.
그제야 가을바람이 멈췄다. 그제야 이형은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연한 자연현상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물론 헛된 시도였다. 얼마 안 가 바람은 다시 불기 시작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볼을 스치고, 낙엽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형은 주변 환경을 향한 관심을 끊었다. 이형은 잠시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부릅뜨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금도 그 공략집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지. 끝도 없이 사기만 치는 간사한 놈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정해진 길에서 벗어날 생각도 못 하는 겁쟁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멍청한 소리라는 건 알고 있소. 그래,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이용해야지. 그렇지만 한 번쯤 말해보고 싶었소. 어차피 들을 사람도 없을 텐데 뭐가 문제겠-."
철썩.
가을바람에 흩날린 낙엽이 날아와 이형의 볼을 시원하게 후려쳤다. 아마도, 그건 우연한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형은 희미하게 웃었다. 어딘가 개운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 우연한 자연현상에 제멋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이형은 볼에 철썩 달라붙은 낙엽을 치우고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이죽거리는 이형은 꼭 이제 막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디디고 선 개구쟁이 소년처럼 보였다.
저 멀리에서 모기가 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흘끗 고개를 돌아보니, 조그마한 점처럼 보이는 복엽기 편대가 저 멀리 구름 너머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또한 이형이 펼친 무수한 사기 중 하나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형이 이 시대에 남긴 무수한 발자취 중 하나였다.
"보아하니 꽤 심심하신 모양인데. 가시기 전에 내 이야기라도 더 들어보시겠소?"
이형은 아예 자세를 편히 하고서 눕듯이 앉았다.
달그락.
또다시 가을바람이 불었다. 음복하려 가져온 술잔이 바람에 흔들려 소리를 냈다.
이형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는 듯이 제 이마를 탁, 하고 후려쳤다.
"그래, 이런 자리에 이게 빠지면 쓰나."
낄낄거리며 웃는 이형에게는 근래 찾아보기 힘들었던 활기가 엿보였다. 곧장 음복주를 개봉하여 신주 앞에 한 잔, 그리고 제 앞에 한 잔 따른 이형은 그대로 두잔 모두 제가 들이키고서는, 입을 열었다.
"크으, 좋다! 그래, 그래서 내 아들, 그러니까 댁 손자 놈이 이번에 글쎄 맏딸을 시집을 보냈는데-."
이형은 웃었다. 종묘라는 엄숙한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웃음소리가 끝도 없이 울려 퍼졌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세찬 바람 소리가 끝도 없이 울려 퍼졌다.
바람 소리가 유난스러운 어느 가을날의 일이었다.
完
후기
이걸로 이형의 이야기가 막을 내렸습니다.
물론 앞으로 부정기로 후일담이 몇편 정도 더 이어질 예정이지만,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본편은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이제 이형의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형이 죽는 것까지 써야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죽으면서 끝나는 이야기보다는 주인공이 즐거운 일을 하면서 끝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처음에는 이 글을 정식 연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개략적인 줄거리라던가 주인공의 케릭터성이라던가 하는 뼈대가 전혀 없이 노트북 앞에 앉아서 손 가는 대로 쓰기 시작한 글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유료연재가 결정되고서 이것저것 수정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하루만 1만 5천자 가까이를 몰아서 썼으니까요. 그런데도 가닥이 안 잡혀서 결국 완결 직전까지 한편 한편 그저 생각나는 대로 이어 붙인 위태로운 글이 잘도 500편까지 왔다 싶습니다.
모두 여러분들의 성원 덕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어주지 않으셨다면 이 글이 정식연재 될 일도, 제가 정식 웹작가가 될 일도, 이 글이 500편 넘게까지 이어질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네요. 기쁘기도 하지만, 이걸 제 실력이라 착각해서 나중에 상처 받는 일 없도록 마음의 준비도 어느 정도 해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전투신이 미흡했던 점이나 천명전쟁 이후로 글의 성격이 너무 달라진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조금 더 주인공에게 포커스를 맞췄으면 좋았을 것을, 계속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욱여 넣으면서 주절거리다가 당초에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른 엉뚱한 글이 되어버린 것 같네요.
그래도 마지막까지 즐겁게 봐주신 듯하여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식습관에 주의하세요. 저처럼 몸 상하시지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