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511화 (511/530)

511화 【후일담】대한 고조를 추억하며(前)

대한 고조 이형이 치세 중 보여준 가장 도드라지는 점을 한 가지 꼽자면, 그 번뜩이는 총기-혹은 동물적인 직감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측근은 물론 어떠한 인물과도 어떠한 상의 없이 문제가 발생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직감적으로 떠오른 해결책을 제시하고 이를 주변 인물들이 따르도록 강제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의사소통에 능숙하지 못한- 혹은 의사소통 그 자체를 혐오하는 천재, 또는 괴짜라고 불리는 인물상이 보여주는 흔하디흔한 단점이기도 하지만, 고조 이형은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대부분 이러한 인물상은 잘못된 판단을 내린 끝에 모든 책임을 지고 제거되거나, 애초에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지 못하거나, 몇 차례 실패를 겪고서 스스로 문제를 고치려 노력하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대한 고조에게는 이들과 한 가지 차별화되는 점이 존재한다. 그는 잘못된 판단을 내린 적이 없기에 그 책임을 덮어쓰고 제거되지 않았으며, 그를 왕으로 만들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 그의 친부 이하응 덕에 쉬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지위를 손에 넣었고, 실패를 겪지 않았기에 당연히 그의 개인적인 결점은 그가 임종에 드는 그 순간까지도 고쳐지지 않았다.

대한 고조의 시작과 끝은 끝없는 영웅적 성공과 황제 혼자서 이루어낸 것이나 다름없는 유산으로 점철되어 있다. 당대의 실록이 일반 대중에 공개되기 이전에는 역적 안동 김씨의 야망이나 노망으로 인해 발발한 것이라 여겨졌던 보위 초기의 조청전쟁마저 작금에 와서는 단지 어디까지 의도한 것이냐가 논쟁의 대상일 뿐 전쟁 명분에서 개전, 종전에 이르기까지 고조의 주도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고조는 집권 초기의 조청전쟁을 말미암아 다이칭구룬과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를 청산하고 극동의 떠오르는 군사 강국으로서 반쯤 자발적인 국가소멸 단계를 걷고 있던 조선국을 19세기 중후반 제국주의 사회에 각인시켰으며, 더 나아가 아주 전역을 평정하고 대한제국을 수립하였으며 나날이 강성해지던 제국주의 열강 주도의 국제질서를 파괴하고 오늘날의 영향권 중심의 국제질서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고조는 이미 효용이 다하여 말뿐인 공허한 성리학 윤리와 허울뿐인 권위 의식으로 간신히 유지되던 조선국의 허상을 지적하고 그것을 대체할 철인 군주의 계몽 군주정을 제시했고, 말년에는 자신이 제시한 철인 군주정에도 싫증을 보이며 내각 중심의 입헌 군주정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고조가 어떠한 신료들과 논의한 흔적이나 그렇다고 당대의 학자들에게 자문한 기색도 없다. 그간은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하여 접했을 거라 추정되던 계몽주의 사상과 서구의 지식조차 대한 고종 이하응의 일기 등을 근거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실 고조가 이 모든 걸 접한 건 보위에 오르고 난 다음이 처음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마저 나오는 마당이다.

당대의 명재상으로서 고조와 그런대로 대등한 입장에서 논의를 주고받았다고 생각되는 박규수조차 이미 고조가 정해둔 틀 안에서 세세한 타협점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는 게 오늘날 학계의 주된 결론이다. 그 이외의 신료들은 고조의 뜻을 현실화하는 데 이용된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대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조의 손에서 만들어졌으며, 고조의 머릿속에서 설계되었고, 고조가 바란 대로 오늘날까지 세계 위에 군림하고 있다.

혹자는 고조를 일컬어 동방의 나폴레옹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오롯이 한 사람의 힘으로 하나의 시대를 만들어낸 초인을 향한 찬사라면, 필자는 그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나폴레옹을 서역의 고조라 부르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나폴레옹에게는 그를 도울 원수들이 있었고, 그의 제국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코뱅들에게서 빼앗은 것이었으며, 그의 제국은 그의 생전에 붕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필자는 고조를 그보다 후한의 세조 광무제와 비교하는 것이 더욱 올바르다 믿는다. 고조에게는 분명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한 시대를 풍미하고도 남았을 위대한 신료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위대함은 고조의 찬란함에 가려졌고, 고조가 이룩한 제국은 오늘날까지도 100년이 넘는 유구한 세월 동안 무수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해나가며 나날이 더욱 위대해져 가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고조가 그리고 또한 바라던 대로라는 점에서 그렇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다. 단순히 운이 좋았다, 그만큼 천재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다하는 그의 측근들이 결점을 메워주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등등 그간 제시되어온 주장은 끝도 없이 많으나 그 최종적인 귀결은 모두 19세기 초 나폴레옹에게서 이어져 온 어쩌면 지긋지긋한 영웅주의 사관으로 귀결되고 마니까.

선말한초라는 시대가 위대한 영웅을 위한 배경을 설계해주었는가, 아니면 위대한 영웅이 선말한초라는 시대를 설계했는가. 오늘날까지도 끝나지 않는 이 영양가 없는 논쟁에 대하여 감히 필자의 견해를 말하자면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마찬가지다. 망해가던 조선에는 고려가 그러했듯이 이를 대신할 보다 혁신적인 대안이 필요했고, 이 대안을 실현할 영웅 또한 필요했다.

그러나 이 혁신적인 대안을 실현할 영웅 또한 그가 활약하기 위한 반쯤 망해가는, 대안이 절실한 장소와 시기가 필요했다. 가장 필요한 인물이 가장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나타나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활약을 보여주고서 떠나갔다.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 가장 올바를 것이다.

필자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그보다는 더욱 근본적인 이야기다. 어떻게 고조에게 이 모든 과업이 가능했는가가 아니라, 대한 고조란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 모든 과업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는가 하는 의문의 해결이다. 그간 영웅시되고 성역시 되어 감히 논하는 것조차 꺼려졌던 대한 고조 이형이라는 개인을 위한 인간적인 고찰이다.

이는 고조를 깎아내리려는 시도도, 전주 이씨 황조를 향한 도전도 아니다. 이는 구국의 영웅, 황제라는 이름의 신이라 칭송받기 바빴던 고조를 더욱 자세히 탐구하여, 그가 살아간 시대를 잊어가는 오늘날의 세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올 수 있게 하기 위함임을 사전에 밝히는 바이다.

이 글을 당대를 살아간 모든 이들과 당대를 만들어낸 고조에 바친다.

【고조의 유년기】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은, 대한 고종 이하응은 그리 모범적인 아버지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조의 친부이자 미주 대륙의 성자라는 허울 좋은 위명에 가려져 그간 외면 되고 있었으나, 오늘날 학계의 더욱 면밀하고 객관적인 연구에 기초하여 그의 인간성을 평가하자면 그는 한 줄로 줄여서 평생을 그를 필요로 하는 백성을 찾아 방랑한 선말한초의 야심가다.

헌종을 시해하고 철종을 꼭두각시로 만들며 제 가문의 힘을 키워 끝내는 역성혁명을 꿈꿨다고 의심받던 것에서 단지 체제에 기생하던 기생충이었으나 고조의 책략으로 궁지에 몰려 끝내는 역성혁명을 꿈꾸는 역적이 되고 말았다고 재평가를 받게 된 김좌근과 달리 대한 고종 이하응이 궁극적으로 고조를 몰아내고서 제위를 취할 꿍꿍이가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 자는 오늘날에는 없다.

그에게는 보위를 노릴 정당한 명분이 있었고, 망해가는 조선을 다시 일으킬 실력도 있었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단지 상대가 고조였으며 그가 설령 보위에 오른들 이미 허울뿐인 조선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뿐이었다. 그가 꿈꾼 최선의 결말은 말할 것도 없이 고조를 몰아내고서 스스로 보위에 오르는 것이었고, 차선은 고조를 꼭두각시 삼아 섭정을 핑계로 자기 뜻대로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이는 왕의 친부가 살아있는 채로 상왕조차 아닌 대원군이라는 지위로 어린 왕이 보위에 오른 조선사를 통틀어도 초유의 사태 탓에 발생한 정치적 촌극이었고, 끝내 고조에 밀려난 고종이 미주에 정착하며 얼핏 훈훈한 미담처럼 마무리되었으나 이러한 정황을 고조 개인의 시선으로 다시 생각해보자. 보위에 올랐을 당시, 고조는 고작해야 13살 소년이었음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이 시기 고조가 낙심하는 기색도 그렇다고 위축되는 기색도 없이 시원스럽게 김좌근에 이어 이하응마저 수월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서 착각하기 쉽지만, 이 당시 고조는 오늘날 한국이었다면 한창 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미성년자였다. 그런 그에게 누구보다 의지하고 또한 기대야 했을 아버지가 자신의 가장 큰 정적이 된 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마 썩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더하여, 우리가 의심해야 할 점은 기록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과연 고조가 어렸을 적 이런 아버지 밑에서 받았을 가정교육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것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하응의 최종적인 목표는 보위 찬탈 내지는 고조를 꼭두각시로 만든 다음 섭정 노릇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고조는 어린 시절 이하응에게서 정석적인 제왕학 교육을 받지 못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하응이 고조의 교육에 소홀했을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고조가 개인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까지 방해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방임했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유년기 시절 고조의 학습은 야심만만한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철저히 비밀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이며, 따라서 그가 습득한 지식은 다분히 이단적이고 파편화되어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고조가 어째서 우리가 그간 일반적으로 접해온 조선 국왕들과 차별화되는 행보를 보여주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고조는 성리학 윤리가 뿌리내려있던 선말한초의 여타 위정자들과는 차별화된, 조선사에서는 옛 삼한 시대에나 볼 수 있었던 정복 군주이자 절대 군주로서의 면모를 그의 치세 기간 내내 보여준다.

이를 비추어 볼 때, 그가 어린 시절 접한 지식은 대부분 어린 소년의 시선에서 가장 흥미진진했을 전쟁사와 옛 영웅들의 이야기에 다분히 편향되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후일 고조가 시황제가 꿈에서 나왔다며 시황릉을 수색하도록 명하거나, 시황제를 숭상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 또한 유년기 시절의 기억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그가 보위에 오른 이후 가장 먼저 획책하였던 것이 망조가 든 청나라와의 전쟁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더욱 확실해진다.

【보위에 오르고서】

당신이 고작 13살에 3대에 걸쳐 체제에 기생한 희대의 간신과 아직 어리고 무지한 소년왕을 꼭두각시 삼아 섭정이 되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치고자 하는 야심가 아버지, 정치에 무관심한 친모와 의심의 눈길로 당신을 노려보는 의모로 둘러싸인 궁정에 처음 입궐하였다고 가정해보자.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지 않는가?

그러나 무시무시한 사실은, 고조는 이러한 현실에 주눅이 들기는커녕 희대의 간신 김좌근을 농락하여 청과의 일전을 각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계하고서 몸소 전장에 나가 전쟁을 승전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고서 과연 천재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해보자.

만일 고조가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당시 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청이 조선에 그리 무리한 요구를 강요하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조선은 최후의 탈출기회마저 빼앗기고서 패전 후 이미 멸망해가는 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언제건 기회만 노리고 있던 제국주의 열강들에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이는 단지 최악의 가정이 아닌, 당대에는 유럽을 제외한 어느 나라 어느 대륙에서나 흔히 일어나고 있던 일들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고조가 조청전쟁을 결단한 것은 결과적으로 생각하면 최선이었더라도 너무나 무책임한 선택이었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다못해 보위에 오른 뒤 최소한의 내정-가령 최소한의 군사개혁 내지는 세제개혁이라던가-을 완수한 다음 청에 도전했다면 최적의 순간, 최적의 조건으로 최후의 도박에 성공했노라 칭송했겠지만, 고조는 사실상 집권과 동시에 반쯤 망한 조선을 이끌고서 전쟁을 획책했다.

하지만 필자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고조를 힐난한 생각이라고는 없다. 애당초, 청과의 전쟁을 획책했을 당시 고조는 고작해야 13살이다. 책임을 묻는다면 한창 모험심과 반골의식이 넘칠 소년왕을 통제하지 못한 당대의 각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논하고 싶은 것은, 이런 책임론이 아니라 어째서 고조는 이처럼 무책임하게 전쟁을 결정했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의 대답은 이렇다. 고조는 그가 처한 상황을 역사적 영웅들이 극복해나간 영웅적 난관들에 비추어 보았을 것이다. 흔히 알려졌다시피, 고조는 천성적으로 겁이 부족하고 다소 무모하기까지 한 도박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그런 고조에게 누가 봐도 몰락해가는 다이칭구룬은 그가 당장에라도 쳐부숴야 할 알기 쉬운 당면한 적이었을 것이고, 망해가는 조선은 그의 성공을 더욱 빛나게 할 무대적 장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조가 생전 처음 접했을 낯선 외세에 호의를 보인 것 또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서 영웅담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이해하기 편하다. 이러한 영웅담에서는 항상 영웅에게 전설의 무기와 적을 쓰러트릴 결정적인 암시를 제공하는 조력자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영웅담에 푹 빠진 어린 고조에게 때마침 접근해오는 프랑스로 대표되는 외세는 마치 그간 부족했던 이야기적 무대장치가 하나하나 갖추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러시아와의 일전은 이러한 추측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준다. 오늘날 공개된 당시 고조와 북경 주재 러시아 공사의 대담은 흡사 고전적인 기사도 모험담마저 연상케 한다. 당대의 사료를 살피면 사춘기 시절 고조는 현실과 고전 영웅담을 혼동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듯 고조는 고전 영웅담에 근거하여 무책임하면서도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기에 역설적으로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고조가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외세의 제도들을 수용하여 낡은 조선을 혁파하고 새로운 한국을 만들고자 시도한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하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부정된 바와 같이, 고조가 유년기 시절 프랑스 선교사로부터 서역의 정보를 접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고조는 아무리 빨라도 보위에 오른 다음에서야 처음 서역의 자세한 정보를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고조는 어떠한 두려움 없이 그들의 제도를 받아들였으며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서역의 옷을 입으면서 이러한 자신의 각오를 분명하게 알렸다. 오늘날에야 그것이 정답이었다고 알지만, 당대에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확실할 어떠한 근거도 없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고조는 그렇게 했다. 이는 고조의 행동이 이때까지만 해도 어떤 합리적인 근거나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그 특유의 반골의식과 모험정신에 기초한 행동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조가 이 무렵 조선국과 성리학에 증오 내지는 의문을 품고 있음은 확실하다. 고조는 보위 초기 경연을 폐하고 경전을 멀리하는 등 전통적인 조선 사회에서 축출을 각오해야 했을 행동마저 거리낌 없이 저질렀고, 그와는 반대로 생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낯설고 이질적인 외세의 문물을 이렇다 할 고민 없이 조선 사회에 강요하는 만행마저 저질렀다.

추측건대, 고조는 기존 조선의 낡은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송두리째 바꿀 야심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다만, 고조의 초기 통치가 그간 이야기되었던 것처럼 체계적인 계획과 합리적인 미래구상 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당시 고조의 구상은 그보다는 더욱 장밋빛투성이의 허술하고 구멍투성이의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러한 그의 통치가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보다 합리적이고, 계단을 오르는 듯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건 그가 청과 러시아, 중화제국마저 꺾고서 명실상부한 아주의 패자가 되고 난 다음이다. 이미 고조에게는 조신한 아내와 걸음마를 뗀 장남이 있었고, 오로지 황제만을 바라보는 제국의 신민들이 있었다.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해도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필자는 이 무렵의 고조를 고전적인 영웅담에 푹 빠진 모험정신과 반골 정신으로 가득 찬 천재 소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고조가 장성하여 보여준 냉철하고 합리적인 행보는 이러한 젊은 날의 막무가내 영웅담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 탓일 것이다.

고전적 영웅담 속에서 살아가던 소년왕은 그가 책임져야 할 가정과 장차 제국을 물려줄 장남, 백성의 기대를 짊어지게 되며 성숙해져 한 사람의 어엿한 군왕이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회고하는 정복 군주 대한 고조의 실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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