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화 【후일담】대한 고조를 추억하며(後)
【제국의 설계자, 혹은 세기의 청개구리】
흔히 오해하는 것이지만, 고조는 세간의 인식처럼 모든 면에서 실리만을 추구한 철혈 정치인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 외교관으로서의 고조는 얼핏 손해로 보이는 일들조차 궁극적으로는 실리로 이어지는 철두철미한 실리주의 외교를 보여준 철혈 외교관이지만, 정치가로서의 고조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치가로서의 고조는 일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실리를 추구했다기보다는 시종일관 제멋대로인 모습을 보여준다. 무조건적인 반골 정신을 보여주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탄탄한 정치적 신념에 근간한 이상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걸 이해하려면 우선 고조란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 이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또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당대 세계 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반골 정신이다. 고조는 치세 내내 혹시 고의로 그런 이념들과 체제들만 찾아다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당대 기준으로 소수파에 속하는 이념과 정치적 체제를 선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령 연성자치론이 그러하다. 고조가 처음으로 중원을 분열시키고자 나섰을 때, 연성자치론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당대의 주류 여론도 고조가 중원을 나누고자 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한이 중원을 통합하기 이전 과도기적인 단계로 여겼지 정말로 영구적인 분단을 꾀한 것이라 여기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조는 그렇게 했고, 오늘날에도 나누어져 있다.
어째서 그렇게 했을까? 고조는 스스로 시황제가 꿈에서 나왔다고 설명하지만, 고조의 설명에는 빈틈이 너무 많다. 우선 시황제 운운이 중원을 나누고서 십수 년이 흐른 뒤에야 처음 언급되었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간 일언반구도 없다가 마치 돌연 생각났다는 듯이 시황제를 운운한 점에서 고조의 시황제 운운은 단순한 핑계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는 고조의 반골 정신에 주목한다. 고조는 후세가 그를 늘 있었던 평범한 성군이자 중흥 군주로 기억되기를 꺼렸으며, 전통적인 조선의 성리학 윤리에 강한 반항심을 품고 있었다는 정황을 여러 차례 보여준 바 있다. 가령 이홍장과의 문답이 그러하다. 이홍장과의 문답에서 고조는 스스로 천자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은 초원의 칸임을 자칭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조가 초원인으로서의 소속의식을 갖추고 있었던 건 아니다. 가령 고조가 몽골인처럼 옷을 갖춰 입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거나 만주인처럼 옷을 갖춰 입고 그들처럼 행동하거나 했다는 기록은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행동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즉, 고조가 스스로 칸임을 자칭한 건 반항의식의 발로이자 이홍장을 향한 도발이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연성자치론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간 중화를 통일하고 스스로 천자가 되어 중앙집권을 꾀한 왕조는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많다.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중화분열 이후의 정형이자 전통으로 자리매김한 까닭이다. 필자에게는 그것이 고조에게는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고 추측한다.
그래서 고조는 정반대로 발상했다. 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칸을 자칭하고, 중화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을 꾀하는 대신 중화를 분열시키고 지방자치를 권장한 것이다. 실제로도 이는 매우 효과적인 발상이었다. 이후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으나, 중화 대륙은 너무나 거대했다. 하나의 정부가 모든 지방을 책임지기에는 지방의 특색도, 상황도 모두 제각각이며 천차만별이었다.
중앙의 통제 시도는 지방의 발전을 저해시켰고, 이는 궁극적으로 중화 대륙 전체의 발전을 늦췄으며 중화 대륙에서 끝내는 춘추전국시대 때와 같은 역동적인 발전상이 자취를 감추게 되게 하였다. 이것이 후일 끝없는 경쟁 속에 발전해온 서역과의 첫 조우를 참혹한 실패의 역사로 시작하게 된 원흉이 되었음은 굳이 말할 것도 없음이라.
혹자는 고조가 옛 주나라적 봉건질서에 심취한 유가적 몽상가였노라 추측하지만, 필자는 그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부정하는 바이다. 만일 고조의 목적이 주나라적 봉건질서를 재건하는 데 있었다면, 가장 먼저 청나라라는 이질적인 존재를 제거하려 했을 것이며 끝내 청나라를 병합하여 봉건질서를 스스로 위협하는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조는 과거의 실패에 비추어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그 근간에는 당대 제일의 반골 정신이 있었으나, 중화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날카롭게 꿰뚫은 냉철한 식견도 있었다. 고조는 중화 대륙 전역을 발아래에 둔 방대한 통일 제국을 건설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서 아주 대륙의 공통된 발전을 위하여 그간 아주 대륙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질서를 제시했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위대한 반골 정신에서 태어났으니, 어찌 놀랍지 않을 수 있을까. 고조는 특유의 반골 정신과 스스로 천재적인 두뇌가 도출해낸 나름의 실리적인 판단에 근간하여 중원을 나누고자 하였고, 이러한 고조의 혁명적인 발상을 세간에서는 연성자치론이라는 형태로 순화시켜 수용한 것뿐이다. 그만큼 고조는 평범함을 증오했으며, 자신이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는 변혁가로서 추앙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고조가 단지 본인의 허영을 채우기 위해 이러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분명 고조 개인이 반골 정신으로 가득했으며, 전에 없던 개혁가로서 추앙받고자 하는 허영심에 심취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행보들도 무수히 많다. 가령, 한국 정치사에서 고조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헌법 1조 1항의 국민주권 명시가 그러하다.
이 당시 이 국민주권 명시 탓에 이하응과 격론을 넘어선 정치적 결별이 이루어졌음은 이미 실록이 공개된 이후 수차례 재확인된 점이며, 당대에도 국민주권을 주장하는 이는 없었음을 고려했을 때 이 국민주권은 고조가 오롯이 홀로 주장하여 관철한 것이나 다름없다. 달리 말하여, 고조에게는 이미 이 시절부터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정치적 신념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정치가로서 고조를 이해하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은, 분명 당대 제일이라 할 수 있는 반골 정신과 후대에 추앙받고자 하는 허영심도 있었으나 오로지 스스로 힘으로 생각해낸 자신만의 정치적 신념 또한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고조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연구적 난점이다. 어디까지가 반골 정신의 발로이고, 어디까지가 신념의 발로인지 헷갈리고 마는 것이다.
우선 현 학계의 주된 정설은 이하응과 정치적 결별의 원흉이 된 국민주권 명시만큼은 고조의 정치적 신념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단지 단발적인 반골 정신으로 해석하자면 고조는 이후로 경연을 재건할 당시 주민등록번호 발언을 비롯하여 꾸준히 자신 또한 한국 국민 중 한 사람일 뿐이며, 주권은 오롯이 국민에게 있음을 강조하였던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수십 년의 세월이 있음을 떠올리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고조가 처음부터 이러한 정치적 신념을 지니고 있었든, 아니면 이때를 기점으로 국민주권이 고조의 정치적 신념이 되었든 고조가 국민주권론에 심취해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고조는 이러한 정치적 신념을 지니게 되었을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때 고조는 앞서 필자가 언급했듯이 낭만주의적 고전 영웅담에 취한 소년왕이었을 무렵이었다는 사실과 고조 특유의 반항 정신이다. 조선의 전통적인 성리학 윤리를 향한 반항의식을 지니고 있던 고조가 성리학적 왕권해석을 거부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경연의 철폐는 그러한 저항의식의 연장선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렇다면 고조가 현재 진행형으로 마구 휘두르고 있던 왕권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두고 있느냐는 점이다. 명분 없는 권력은 폭정일 뿐이고, 폭정은 반발을 사기 마련이며 반발은 축출의 계기가 된다. 전통적인 왕권해석을 거부한 고조에게 있어서 권력의 전통성 문제는 집권 초기 매우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때도 고조는 그의 영웅담을 빛내줄 후원자들- 곧 프랑스로 대표되는 외세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고조에게 당대의 왕권신수설로 대표되는 서구의 전통적인 왕권해석은 성리학적 왕권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고조는 그 대안으로서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여 절대적인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계몽 군주, 곧 프랑스식 혁명군주정을 선택했다.
다만, 이러한 선택은 필자가 추측하는 것처럼 편의주의에 따른 취사 선택이나 반골 정신에 기반을 둔 선택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고조가 헌법에 국민주권을 명시하도록 명한 시점은 고조 본인부터가 아직 미성년자였을 뿐 아니라 아직 서역과 본격적인 교류가 발생하기 이전이며, 당연히 서역에 대한 정보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어쩌면, 고조는 단지 그 시대에는 흔하디흔한 애국청년이었을지도 모른다. 민족 두 글자에 가슴 떨려 하고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호기롭게 외치는 애국청년 말이다. 이 경우 고조가 당대의 흔하디흔한 애국청년들과 달랐던 점은 그에게는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신념을 헌법에 반영할 수 있는 권력과 황제라는 지위가 있다는 점뿐이리라.
그것이 어느 쪽이건 고조는 구름 위에 신선과도 같던 조선왕을 스스로 포기하고 민중과 함께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국민의 황제로서 살아갔으며, 그의 후손들 또한 그와 같기를 마음속 깊이 바랐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한의 태상황】
현대 학계의 주류적인 해석은 고조가 생전에 제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태상황을 자칭한 것은 안정적인 제위 세습을 위해서이다. 고조가 곧 대한이오, 대한이 곧 고조나 다르지 않았던 당대의 세태를 우려해 세대교체의 충격을 최소화하고자 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우선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점은, 고조 생전의 정치 구도와 생전에 고조가 보여준 노력이다. 이 무렵 고조는 스스로 국민의 황제를 자칭하였고, 이를 위하여 국민의 투표 참여를 장려하고 이름뿐인 의회임에도 총선만큼은 꼬박꼬박 제때 치르도록 배려하며 대한에 의회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했는데, 그 한계란 다름 아닌 당대의 한국 그 자체였다. 고조는 스스로 국민의 황제를 자부하였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하고자 노력하기는 했으나 그가 황제로서 보여준 행보는 철인 계몽 군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다 보니 당대의 대한에서는 고조의 뜻이 곧 국민의 뜻이었으나, 반대로 국민의 뜻이 곧 고조의 뜻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는 근본적으로 당대의 한국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던 점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국민은 고조의 설명에 그들에게 주권이 있음을 머리로는 알게 되었지만, 몸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위에서 시키면 그저 충성스럽게 따르는 것에 익숙한 신민들이었으며, 당연히 정치는 높으신 양반들이 알아서 해야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대의 한국인들은 여전히 신민으로 남아 있었던 걸까? 그 근본적인 원인을 캐보면 대답은 고조가 나왔다. 간단하게 줄여서,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두기에 고조의 통치는 너무나 완벽했다. 설령 정치참여 의식을 가졌더라도 혹시나 괜히 나섰다가 이 완벽한 통치가 깨지고 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누구 하나 선뜻 나설 수 없던 것이다.
만일 고조의 목적이 독재였다면 그는 이러한 현실에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고조는 권력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군상이 아니었다. 그에게 권력은 단지 수단이었을 뿐이며, 그는 철이 든 이후로 한결같이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국가를 현실에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해온 이상가이다.
그리고 고조가 그리던 이상적인 국가의 조건에는 의회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정착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이것이 실리의 문제였는지 개인적인 정치적 신념의 문제였는지는 필자 또한 확인할 방도가 없다. 고조 본인이 의회가 목소리를 내도록 배려하고 총선을 긍정하면서도 막상 스스로는 의회를 무시하고서 절대권력을 휘두른 모순된 사례가 실록에 빼곡히 기록되어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는 바로 이 의회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정착이야말로 고조가 생전에 태상황으로 물러나고자 한 원인이었다고 지목한다. 만일 안정적인 제위 세습이 목표였다면 태상황으로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오히려 내각에서 한목소리로 태상황의 개입을 요청하는 와중에도 그 정도는 알아서 하라는 식의 신경질적인 반응마저 기록되어있다. 물론 태상황이 존재감을 과시할수록 황제의 존재감이 초라해지니 그걸 우려한 반응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고조의 태상황 시절 직접 권한이 늘어난 것도 아닌 의회가 조금씩 국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 점을 지목하고 싶다.
이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의회가 태상황이 뒤에 버티고 있는 황제를 힘에서 밀어냈던가, 아니면 태상황이나 황제가 의회의 성장을 암암리에 두둔해주었거나. 물론 전자가 불가능하다는 건 이 글을 읽는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상황과 황제 중 누가 의회의 성장을 두둔해주었는가인데, 필자의 주장은 둘 다라는 것이다.
지금도 절대 가볍지 않지만, 당대 한국에서 황권의 비중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그런 황권의 압박을 이겨내고 의회가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하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직 고조 시절 조건 없는 충성을 다하던 거수기 의원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의회권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면,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두 황제의 개입이 있었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마치며】
대한 고조 이형은 수수께끼로 가득 찬 인물이다. 가령 보위 이후에나 처음으로 서역의 정보를 접했을 그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서역의 정보에 대하여 해박했는가, 어떻게 미래를 미리 보고 온 것처럼 매번 그토록 날카로운 식견을 발휘할 수 있었는가 등등이 그러하다.
이 글 또한 수수께끼로 가득 찬 고조를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하여 필자가 제멋대로 늘어놓았을 뿐인 무수한 가설집중 하나에 불과하다. 더욱 결정적인 사료가 발굴되어 그간의 학설들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거나, 아니면 고조가 몸소 부활하여 이 모든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는 이상에야 앞으로 천년이 더 지나도 이러한 수수께끼들은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만큼은 모두가 동감하고 있다. 고조가 사실상 혼자 힘만으로 제국을 건국한 국부이자, 민족의 성웅이라는 사실 말이다. 지난 세기말의 탈권위적 풍조에 힘입어 그간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려웠던 고조의 존함을 그들 부모에게서 받은 아이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 방증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러한 영웅숭배가 지나쳐 고조 또한 한 사람의 인간임을 잊고 마는 세태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세태가 신세대들에게 영문모를 권위 의식과 조건 없는 영웅숭배를 강요하고, 자라나는 청년들에게 역사교육을 향한 반발심은 물론 구시대와의 단절감마저 느끼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공경과 숭배는 분명히 다르다. 오늘날 우리는 조건 없는 숭배에 급급해 고조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고자 하려고도 하지 않는 끔찍한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곁으로 다가와야 할 역사가 막연한 권위로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부디 이 글이 조금이라도 고조가 우리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서력 2020년 1월 20일 성균관 대학 국사학부 수석조교 이형 맺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