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후일담】대한제국 전차개발사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교과서에서 가르치기를 우리 대한제국은 조선과 청 두 나라의 국민이 스스로 하나가 되기를 선택하여 성립된 연합군주국이라고 가르쳤지만, 지난 세기말의 탈권위주의 운동-흔히 86혁명, 혹은 을축민란이라고 부르는- 이후 새로 쓰인 현행 교과서에서는 우리 대한제국은 대한 고조가 건국한 조선의 후계국이라 가르친다.
이러한 교육방침의 변화가 만주 민족사 말살 시도인가, 그렇지 않으면 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인정인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끊이지를 않고 있지만, 오늘날 주류 학계에서 결국 대한제국은 조선의 후계국임을 부정하는 이들은 드물다. 왕조가 계승되었고, 국가중심지 또한 계승되었으며, 무엇보다 오늘날 대한제국의 주류 문화는 엄연히 조선말, 조선 문자로 대표되는 조선 문화이다.
행정구역상의 만주는 물론 조선 반도를 크게 웃도는 인구와 면적을 자랑하고 있지만, 민족으로서의 만주는 오늘날 소멸 수순에 접어든 지 오래인 까닭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봉천 등지의 지역사회가 만주 문화 알리기 운동에 나서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오늘 다루고자 하는 건 위기에 처한 만주 민족이 아니므로 이 이야기는 이쯤 해두자.
필자가 말하고 싶은 건, 대한제국이 조선의 후계국인 이상 행정면에서든 군사면에서든 경제면에서든 조선을 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직간접적으로 그 흔적들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대한제국 육군도 마찬가지다. 특히, 군은 구성원과 전통까지 거의 고스란히 조선의 것을 계승했으니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조선군의 대표적인 군사전통은 무엇일까? 영화라는 문명의 이기가 처음 세간에 선보여진 이래로 끝도 없이 조명을 받아온 덕에 오늘날 대중들 사이에서 조선군의 군사전통은 막연하게 원거리 무장을 향한 집착과 기병을 향한 집착 정도로 알려졌다. 그리고 대체로 실제로도 그렇다. 물론 우위를 따진다면 말할 것도 없이 기병이겠지만 말이다.
선말한초, 군은 충격적인 승전을 경험했다. 바로 청과 싸워 이긴 것이다. 물론 우군은 이후로도 무수히 많은 영웅적인 승전을 경험해왔지만, 이 청과의 승전이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무렵 우군은 사실상 한 번 완전히 해체되었다가 다시 처음부터 재건되는 순서를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군에게 있어서 이 승전은 재건군과 동시에 경험한 값진 승리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청과의 전훈에서 우군이 얻게 된 전훈은 무엇이었을까? 우군은 고조가 이끌었던 기병에 주목했다. 전선에 나선 모든 우군이 나사 빠진 행보를 보여주는 동안 고조가 이끈-엄밀하게는 함께 탄-기병만큼은 제 밥값을 해냈기에 우군이 승전할 수 있었다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고조가 이끈 기병들이 전투마다 밥값을 충실히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전훈은 나날이 강화되었다.
그 결과가 제국 선포 이래로 단 한 차례도 사라진 적 없는 기병을 향한 선망과 동경이다. 참호전으로 대표되는 세계대전의 전훈이 아주까지 전해진 뒤에도 다소의 변화는 있었을지언정 기병을 좋아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우군이 처한 환경을 고려했을 때 우군이 참호전에 고전할 가능성이 극히 작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현실적으로 만일 한국이 침공을 받는다면 그 위협은 대륙으로부터 만주를 향한 침략일 것이며, 만주의 기나긴 국경선과 막대한 영토를 고려했을 때 설령 일부 전선에서 참호전이 벌어지더라도 충분히 기병의 기동력을 살려 전선을 우회해 적의 후방을 치거나 반대로 일부러 공간을 내주어 적이 참호를 비우도록 유도한 뒤 급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 당시 아군의 작전계획이었다.
바다로부터의 침략은 해군의 문제이고, 반대로 한국이 침공하는 상황에서 참호전이 벌어지면 우군은 후방교란과 일점돌파에 집중하면서 동맹군이 전선을 사수하도록 지원하면 그만이라는 보충 설명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현실은 위의 작계대로 되지 않아, 결국 우군도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왔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군의 이러한 기병 선호는 건군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쭉 이어져 왔다. 기병 전력이 모두 기계화된 오늘날에도 흉갑기병사단, 기계화기병사단, 항공기병사단 등의 호칭을 고집하는 모습에서 이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타국은 자전거 사단이라 따로 구분하는 자전거부대조차 초기에는 기계화기병사단이라 지칭했을 지경이었다. 물론, 오늘날 기계화기병사단은 장갑차 부대의 사단 편제이니 혼동 없기를 바란다.
건군 초기부터 우군은 경마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질 좋은 군마를 얻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고, 군마의 번식력이 우군의 기병 전력 확충을 따라가지 못하자 자전거들을 양산하면서까지 어떻게든 빈자리를 메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바로 이 부분인데, 바로 우군의 기병을 향한 집착이 말이라는 동물을 향한 것이 아니라, 말의 기동성을 향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단서이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여 말보다 빠르거나, 아니면 말보다 쓰기 좋으면서 기동력도 말에 못지않은 장비가 등장한다면 언제건 말 또한 대체될 수 있음을 뜻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말이 전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하자 우군은 거리낌 없이 말을 전장에서 내쫓았다. 그 시발점은 고조의 지시로 개발된 19세기 말의 4륜 기관총 자전거-통칭 해태 화차였다.
인력 장갑차라고 불러도 좋을 이 해태 화차는 결국 인간의 다릿심으로는 충분한 장갑판을 지탱할 수 없었고, 무게중심이 기관총이 장착된 전면에 쏠려 쉽게 전복된다는 단점에 부딪혀 전면도입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우군의 장갑차 개발사에 뼈대를 제공해주었다. 전면에 장갑판을 장착해 유탄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고, 보병보다 빠른 기동성을 확보하고 기관총을 앞세워 적을 공격한다는 기초 설계가 제시된 것이다.
막상 개발을 지시한 고조는 해태 화차의 전면도입이 끝내 좌초되었다는 소식에도 "그런가." 하는 짧은 반응만 보였고, 실제로 한성근 원수가 이끄는 원수부 또한 큰 실망감을 보이며, 말이 이끄는 기관총 마차-천리마 화차에 관심을 돌렸지만, 이후로도 물밑에서는 해태 화차의 가능성에 관한 꾸준한 연구가 이어졌다.
특히 이 해태 화차는 군부보다도 군에 신병기들을 납품하던 군수 산업체들의 관심이 더욱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 당시 아주의 말 공급이 한계점에 달해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말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니 말이 이끄는 천리마 화차는 발주 수량이 넉넉지 않았으나, 만일 이 해태 화차를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을 만큼 개량하는 데 성공한다면 얼마든지 양산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이 개량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이 민영익 총수의 대한상행이다. 해태 화차가 장갑차 개발사의 뼈대를 제공했다면, 이 무렵 대한상행의 시행착오는 초기 전차 개발사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대한상행이 전차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적어도 10년은 늦어졌을 것이고, 한국은 최초의 전차 개발국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해태가 제시한 길을 따라 질주하기 시작한 대한상행에서 가장 먼저 지적한 부분은 바로 동력의 빈약함이었다. 유의미한 수준의 장갑판을 확보하려면 자연히 전면하중이 늘어나 무게중심이 앞으로 기울여 결국 전복되고, 그렇다고 무게중심을 맞추기 위해 무게추를 달자니 지나치게 무거워져서 속력이 줄고 사용자의 피로감도 그만큼 늘어났다.
거기에 차체도 문제였다. 사용자가 무사해도 자전거 차체가 총탄이나 유탄 등에 의해 손상된다면 결국 해태는 쉽사리 무력화되었다. 그렇다면 차체도 어느 정도는 적의 총탄이나 유탄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그럼 더더욱 중량이 불어나 이제는 기병은커녕 보병보다 빠른 기동력조차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갑판을 떼자니 해태 화차는 너무 비대했다.
쉽게 말해, 유탄에 휩쓸리거나 적이 조준해서 맞추기 쉽다는 이야기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피하고자 엄폐물 뒤에 숨으면 일부러 자전거의 전면부에 기관총을 얹을 필요 없이 기관총에 외발 바퀴를 달고 자전거가 기관총을 앞에서 끌고 다니게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전거 수송부대는 이미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해태 화차가 이러한 자전거 수송부대들과 차별화되려면 일부러 기관총을 전면에 얹어 놓은 이유를 보여주어야 했다. 따라서 장갑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기관총과 장갑판, 자전거 차체와 탑승자의 무게를 모두 견뎌낼 강력한 동력기관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탑승자를 늘려서 두 사람이 발판을 돌리도록 하는 방안이 연구되었다. 사람이 2배로 늘면 동력도 2배로 늘 테니 더욱 많은 장갑판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얼마 가지 않아 좌초되었다. 이유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탑승자가 2배로 늘면 차체도 그에 걸맞게 늘어나야 했던 것이다. 거기에 안 그래도 비대했던 차체가 더욱 비대해져서 아예 표적판이 되어버린 건 덤이었다.
총수 민영익과 이사진은 그들이 부딪힌 난관의 원흉으로 또 한 번 동력원을 지목했고, 결국 대한상행은 인력이라는 전제조건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인력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말이나 소 같은 가축을 동원한다면 결국 돌고 돌아 원점이 되어버리니, 내연기관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어마어마한 개발단가 상승을 의미했고, 동시에 내연기관 기술을 가지지 못한 대한상행 단독으로는 더는 사업을 진행할 수 없음을 뜻했다.
그리고 여기서 대한상행은 또 한차례 난관에 부딪혔다. 내연기관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모든 민간사업체가 대한상행과의 협업을 거부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 시기 민영익의 본가였던 여흥 민씨 일가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던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민영익이 운영하던 대한상행은 여흥 민씨 일가로부터 적잖은 자금을 지원받아 시작된 여흥 민씨의 계열사 중 하나였고, 당연히 대한상행과의 협업은 여흥 민씨와의 협력을 뜻했다.
이 시대에 당장 고조의 미움을 사 여흥 민씨 가문이 고초를 겪고 있던 판국에 민영익과 선뜻 협업하겠다고 나설 인물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시기 내연기관을 자체생산할 수 있는 민간산업체는 공기업이거나 정부가 경영에 관여하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 성사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겠지만, 여흥 민씨 본가의 파란이 여기에 치명타를 먹인 것이다.
결국, 대한상행이 끝내 개발실패를 인정하고 본업이었던 군납용 자전거 사업에 집중하게 되면서, 전차 개발사에서 잠시 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는데, 그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비행기 발명과 비행기 공장 건설이었다.
더욱 정확히는, 한국에서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가 처음 시연을 보이던 1904년 10월 21일 불현듯 고조가 내린 개발 지시였다.
"이건 내 사견이네만. 불현듯 떠오른 것인데, 저 엔진? 기관? 하여간에. 기계의 힘으로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면 기계의 힘으로 배가 육지에 오를 수 있지도 않겠나?"
"배가 육지를 항행하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바로 그 걸세. 아니 뭐, 거창하게 전함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것들을 항행하게 하는 건 그렇다 쳐도 그놈이 지나가면서 모든 걸 망가트려 놓을 텐데, 적보다 아군에게 더 큰 피해를 주는 놈을 개발하는 건 미친 짓이지. 안 그런가?"
"과연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황상. 그럼, 얼마나 작은 함선들을 원하십니까? 구축함정도면 될까요?"
"아니, 그보다 작게 만들게. 그래, 포함보다도 조금 더 작은 정도가 좋겠어. 생각해보니 배를 작게 만든다기보다는 우군이 운용하는 흉갑기병대를 지금보다 키운다는 게 더 이해하기 좋을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그렇게 만들게. 그놈이 철마인지 육상포함인지는 뭐, 알아서 생각하고."
잠시 당신이 이 지시를 전해 들은 육군 조병창의 기술자들이라고 생각해보자.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아마도 "그래서 도대체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뭔데?" 일 것이다. 이때 실록에 기록된 고조의 언행을 살피면 아마도 고조 자신은 전차 개발에 대한 나름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문제는 언제나 그래 왔듯이 설명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고조의 성정이었다.
자연히 육군 조병창은 대혼란에 빠졌다. 일단 고조로부터의 지시이니 어떻게든 성과를 지어내서라도 바쳐야 하긴 할 텐데, 문제는 고조가 뜬구름을 잡았다는 것이다. 결국, 고조가 내린 지시 중 확실한 부분은 포함보다 작고 기병보다 커야 한다고 제시된 크기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이 범위도 너무 넓었다. 말과 사람, 장비를 모두 합해봐야 1톤 남짓한 흉갑기병과 아무리 작아도 십수 톤을 넘어가는 포함은 적절한 비유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기나긴 혼란은 결국 원수부에서 "내연기관으로 작동하는 중기병대"라는 대강의 개발 지침을 내린 뒤에야 우선 진정 되었다. 고조의 발상이 육지를 항행하는 군함에서 시작되었으나 원수부에서 이를 중기병이라고 규정한 건 물론 우군의 기병 선호사상 탓임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군함 운용법에 문외한인 육군에게는 육상포함보다는 중기병이 더 운용하기 편리했었던 점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제 개발 방침은 정해졌으니, 문제는 결과물이었다. 가장 먼저 육군 조병창에서는 자동차에 철갑을 두른 초기 장갑차 모델을 제시했으나, 이는 원수부의 기대와는 달리 고조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건 그냥 철갑 두른 자동차 아닌가. 흠, 내가 아무래도 설명을 너무 대충 한 모양인데···. 이보다 더 크게 만들어볼 수 없겠나? 적어도 4, 5명은 탈 수 있으면 좋겠군. 그리고 하는 김에 장갑판도 더 두껍게 만들어보게. 기관총까지는 몰라도 소총탄 정도는 무리 없이 막을 수 있도록 말이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원수부의 방침과는 달리, 고조는 진짜로 육상을 항행하는 육상포함을 원하고 있던 것이다. 결국, 육군 조병창은 애당초 개발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육군 조병창은 전차 개발사업에 민간사업체들을 끌어들였다. 이미 한차례 실패를 맛보기도 했겠다, 아예 동시에 복수의 사업을 진행하여 최종적으로 고조가 그중 하나를 고를 수 있도록 하기로 방침을 전환한 것이다. 여기에는 민영익이 이끄는 대한상행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전차 개발사에서 이룩한 업적 중 하나는 바로 주포를 오직 한문만 장비하도록 한 것인데, 이는 대한상행이 전차개발사업을 화차 사업의 연장 선상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동력이 부족하여 오직 한문의 주포만 장착할 수 있던 화차에 내연기관을 추가하며 대형화되자 자연히 주포 또한 그에 걸맞게 대형화되었고, 이는 한눈에 고조의 총애를 얻었다.
"그래, 그나마 저놈들이 만들어 온 게 내가 말한 것과 가장 비슷하구먼. 여기에 무한궤도만 추가하면 딱 내가 생각한 그대로겠어. 이 사업은 요 녀석들이 진행하게 하고, 완성되거든 이 병기는 앞으로 '전차'라고 부르게."
누구의 말인데 함부로 토를 달까. 결국, 모든 건 고조의 뜻대로였다.
고조의 제위 막바지에 시작된 전차 개발사업은 고조가 제위에서 물러난 이후인 1913년에야 간신히 결실을 보았다. 곧 세계 최초의 전차인 권율 전차의 탄생이었다.
전차 사업은 대한상행의 사운을 뿌리부터 바꿔놓았다. 이 일로 전차 납품을 전담하게 된 대한상행은 동아중공업을 합병하고 미주철강과 기술협력 관계를 구축해 급속히 성장하여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국 재계의 다섯 기둥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되었으며, 오늘날 그들은 문방구나 자전거가 아닌 자동차와 건설장비, 조선업 등 한국의 중공업을 대표하는 다국적기업으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전차의 발명은,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던 파란만장한 20세기의 서막을 알리는 예고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