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515화 (515/530)

515화 【후일담】범대륙적 단일 시장

물론 이를 두고서 전차의 발명이 20세기를 전란의 시대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기실 권율 전차 자체는 당시 차례차례 선보여지고 있던 무수한 신무기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권율 전차 또한 전차 간의 전투를 회의에 부치지 않은 보병지원용 전투차량이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거포 대신 기관포를 장비하고 있는 등 그 한계가 명확했다.

그런데도 20세기를 이야기하면서 전차의 발명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전차의 발명으로 인해 이 당시의 아주 대륙이 본격적인 현대적 총력전을 치를 기초적인 공업역량을 갖추었음을 증명하는 중대한 지표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아주의 성장이 더 이상 양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부분 면에서도 유럽에 버금가거나 부분적으로 능가하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1870년대까지만 해도 수탈이나 다름없는 무역흑자를 즐기던 유럽의 대 아시아 무역은 1900년대의 불매운동에 힘입어 1910년대에는 주요 수출국 명부에서 아주 국가들이 사라지다시피 한다. 그렇다고 유럽과 아주 두 대륙 간의 교역량이 줄어든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양 대륙 간의 교역은 1900년대의 정체를 제외하고는 꾸준한 상승세를 기록했으나, 이보다도 아주 대륙 각국 간의 무역 규모가 불어나는 속도가 더욱 빨랐던 것이다. 1910년대에 접어든 아주 대륙은 더 이상 서역의 호주머니도, 미국의 경제영토도 아니었다. 각국은 여전히 수줄 중심의 수출경제였더라도, 대륙 차원에서는 완전한 자급자족이 이루어지고 있던 것이다.

범 아주 조약기구의 블록경제는 이 무렵 반석에 오른 지 오래였다. 이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광활한 만주벌판의 개척이었다. 화학비료와 농약, 경비행기와 경운기로 대표되는 만주의 농업혁명은 한국을 농산물 수입국에서 아주 대륙 최대의 농산물 수출국으로 뒤바꿔놓았다. 극히 짧은 만주 농업의 역사와 만주의 토질은 정확히 반비례했고, 한국은 뜻하지 않게 밭에서 노다지를 캐낸 꼴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이 더 이상 농산물을 가맹국들에서 수입해올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곧 유사시에 가맹국들이 한국에 꺼내 들 패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뜻했다. 블록경제 이탈이라는 국가적 자폭 정도가 아니면 이제 정말로 한국에 유의미한 위협을 가할 방법이 없어진 것이다. 이는 설령 군사적, 외교적으로 가맹국 간의 관계가 대등해 보이더라도 경제적으로는 한국이 절대적 우위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또 하나 만들어주었다.

다소 과격했던 산업화도 한몫했다. 19세기 말, 광활하기 그지없는 중화 대륙의 산업화는 당시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철강과 석회의 60% 이상을 매년 하마처럼 빨아들여 댔고, 그 철강과 석회는 한국에서 생산되었거나, 개성 금융계의 공동투자로 세워진 공장에서 생산되었거나, 한국인 선주가 소유한 동명 국적의 배를 통해 아주 바깥에서부터 수입되었다.

당연히 이 모든 사업은 공짜가 아니었다. 산업화 대금은 고스란히 각국의 끔찍한 재정부채로 이어졌으나, 그렇다고 이들은 산업화를 멈출 수는 없었다. 아주 대륙의 공동번영을 위한 단계적인 근대화와 산업화야말로 범 아주 조약기구의 지향점이었으며 만인의 이상향이었으니 말이다. 이미 한차례의 민중혁명을 경험한 그들이 이를 정면에서 거스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채지 못했을까?

산업화를 포기하고 싶다면 한국이 매년 지출하고 있는 지원금을 정중히 사양해야 했는데, 그럼 당장 돈이 없어 파산을 신청해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지원금을 받아가며 산업화를 계속해 언젠가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조금씩이라도 갚아나갈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었다. 당장 자결할 것인가, 훗날을 기약할 것인가. 당연히 대답은 후자일 수밖에 없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여기에서 멈추면 결국 이미 공업화를 선점한 한국을 위한 경제 식민지 신세를 자청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에는 공장이 있고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았던 당대의 가맹국들은 그 꼴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산업화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이 이런 상황에 부닥친 줄 알았기에 한국에서도 이들에게 계속 돈을 빌려주던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가 손해를 본다고 해도 덕택에 한국 사업가들이 이익을 보게 되니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이익이고, 회원국들도 당장 수입으로 직결되는 성과가 없다뿐이지 산업화 자체는 조약기구-보다 정확히는 한국에서 지시한 산업화 지침대로 착실하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으니 가까운 미래에 안정적인 투자배당금으로 돌아오게 될 터였다.

그때에는 이미 아주 대륙 전역이 한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된 이후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늘날을 돌이켜 보면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20세기의 크고 작은 전란들 탓에 완전히 계획대로 되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대체적인 틀은 오늘날까지도 성공적으로 이어져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00년대에 이르러서, 그들의 노력은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두었다. 공장이 세워지고, 도시마다 철도가 놓이고,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기대한 것만큼 순이익이 크게 불어나지 않았던 점이었다. 물론 세수 자체는 불어났으나, 지출도 그만큼 크게 불어나 버린 것이다. 물론 그 지출 중에는 개성에 진 빚과 그 이자도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음이라.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무렵 끝도 없이 불어나고 있던 중화 대륙-특히 초의 인구 증가였다. 충분한 공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초기 산업화가 일단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공장들이 늘어나 충분한 도시 일자리가 제공되자, 자연히 도시가 부양할 수 있는 도시 인구의 숫자도 많이 늘어나면서 농촌에서 무턱대고 상경한 이들이 몰려들자 슬럼가가 크게 불어났다.

화학비료의 보급은 농촌이 지탱할 수 있는 인구의 숫자를 크게 늘렸고, 기초적인 수준의 의료 보급은 영아 사망률을 크게 낮췄다. 인구폭발은 필연적이었고, 초는 이러한 인구폭발에 제때 대처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고의로 이를 방조한 지도 모르겠다. 인구가 늘면 늘수록 세수를 거둘 시민도 늘어나니 자연히 재정부채 문제도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면 말이다.

물론 현실은 달랐다. 대륙이 제아무리 거대해 봐야 양질의 일자리는 언제나 국한되어 있는 법이었고, 결국 20세기 초에 태어난 세대의 태반이 그대로 빈민층으로 전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빈민층의 확대는 자연히 치안악화로 이어졌으며, 공교육의 질 또한 형편없이 낮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많은 예산을 공교육과 공공질서 유지에 투자해야 했고, 불어난 세수가 경제성장이 아니라 현상 유지에 사용되는 결말로 이어졌다.

시대를 앞서간 중진국 함정이었다. 중남미의 바나나 공화국들과 더불어 20세기 이들의 사례가 오늘날에도 두고두고 회자하는 까닭이다.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은 미국과 달리 가맹국들에 시도 때도 없이 군사 정변을 꼬드기거나 하지는 않았음에도 그런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일단 국민이 빈곤하게나마 당장 입에 풀칠 정도는 할 수 있게 되면 자연히 국력 신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가 최악의 결말로 돌아온 셈이다. 하지만 중남미의 바나나 공화국들과는 달리, 초를 비롯해 이 무렵 중진국 함정에 직면한 중화 대륙의 가맹국들에는 이 지긋지긋한 처지에서 빠져나올 길이 딱 하나 있었다.

이들 국가가 당대의 빈곤한 재정상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선택한 해결책은 실로 간단했다. 바로 한국에서 배운 그대로 월남으로 대표되는 신규 가맹국들에 산업화를 베푼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그들에게 베푼 것보다는 다소 가혹한 방식이었지만 말이다. 그들에게는 영향력 확보보다는 당장 해갈이 더 급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히, 이들이 남아시아의 신규 가입국들에 보여준 작태는 제국주의적 수탈에 가까웠다. 철도를 놓고, 전기를 들이고, 공장을 세우긴 했으나 그 혜택은 신규 가맹국들이 아닌 초기 가맹국들에 돌아갔다. 이 경제 수탈에서 벗어났던 건 한 발짝 물러나 있던 한국 정도였다. 물론, 한국이 한발 물러나 있던 건 이미 초기 가맹국들에서 달곰한 투자배당금을 챙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발짝 물러나 있던 한국의 외교적 위치가 당장 초기 가맹국들에 뜻하지 않은 배신을 당했던 월남, 시안 등의 국가들에게는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월남의 거듭된 탄원은 끝내 한국의 개입을 끌어내는 데에 성공했고, 범 아주 조약기구에 속한 경제기구들을 통하지 않은 각국의 타 가맹국을 향한 개별적인 산업화 지원은 금지되었다. 결국, 한국의 허락이 없으면 이제 산업화 지원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이러한 결정은 각국의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다. 특히 일본의 경우, 당시 회맹에서 공개적으로 "실망스럽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할 만큼 격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경제성장을 통해 국내의 불만을 가라앉혀야 했던 건 일본 또한 절실하기는 매한가지이기도 했지만, 이 기회에 아주 대륙 서열 제2위의 자리를 확실하게 굳혀두려던 계획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강하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국은 단 한 차례도 내부적인 공문서를 대중에 공개한 적이 없으니 어디까지나 의혹에 그치고 있지만 말이다. 결국, 이 문제는 흔히 대타협이라고 불리는 1928년 청도조약에서 맹주와 일반 가맹국의 의무와 권리를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겨우 수습된다.

그 결과물이 지난 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한국의 기술과 자본, 초창기 가맹국들의 노동력, 후기 가맹국들의 원자재, 그리고 인류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막대한 인구에 기반을 둔 소비자층으로 굴러가는 범 아주 조약기구의 블록경제다. 혹자가 말했듯이, 지구촌 축소판이라 불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인류 최대의 블록경제권이다.

조약기구에는 천연고무가 있었고, 상아가 있었으며, 열대과일이 있었고, 석유도 있었고, 그 모든 자원을 개발할 기술도 있었다. 물론 수억을 넘나드는 아주인 모두가 마음껏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들이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럭저럭 아끼면서 쓰려고 하면 못 쓸 것도 없는 양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바로 이 점이 전체적인 교역량을 늘어났음에도 유럽의 대 아시아 수출 비중이 줄어든 주요한 원인이었다. 글자 그대로, 그보다 더 큰 시장이 바로 이웃한 곳에 있었으니 말이다. 가맹국에서 생산된 공산품들은 어지간하면선 전부 가맹국들 사이에서 소비되고 말았으니, 구태여 예전처럼 다른 대륙과의 교역에 목을 맬 이유가 없어진 것도 당연했다.

다소 이 시대의 유럽인들에게 유감스러운 사실은, 아주를 기준으로 하자면 유럽과의 교역비중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으나 반대로 유럽을 기준으로 아주와의 교역 비중은 나날이 불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아주 대륙은 소비재를 있는 대로 먹어치우는 고래나 다름없었다. 개개인의 소비력으로는 미국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런데도 전체적인 규모 면에서는 아주 대륙에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이미 아주 대륙의 소비재 수요는 아주 대륙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19세기 말에는 철강과 석회가 그러했듯이 20세기 초에는 이제 온 세상의 소비재가 아주로 빨려 들어갔다. 특히 한국의 경우, 아주 대륙을 통틀어서 소비되는 소비재 중 과반수 가까이 한국 홀로 소비하는 지경이었다. 그만큼 한국의 성장세는 무시무시했다.

자연히 아주에 유럽 시장은 갈수록 관심에서 벗어났지만, 유럽에 아주 시장은 갈수록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시장이 되어갔다. 나날이 팽창하고 있던 아주와 현상 유지에 급급하던 유럽의 상황을 이보다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자료도 없을 것이다. 물론 당대에는 이 모든 자료에 접근할 방법도 없었지만, 직감적으로건 부분적으로 보이는 모습을 통해서 유추하건 당대에도 이러한 정황을 눈치채고 있었던 건 확실해 보인다.

그럼 잠시, 당신이 이 시대의 유럽인이라면 어땠을 것 같은가? 자존심이 상한다? 물론 그럴 것이다. 성장세가 두렵다? 물론 그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무언가 더 늦기 전에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멀리 달아나기 전에 말이다.

바로 그러한 절박함이 직접 나타난 것이 1913년의 독불동맹이다. 대외적으로는 나날이 그 세를 더해가는 극우-파시즘-, 극좌-사회주의-에 대항한 자유 동맹이었으나, 막상 이렇게 손을 잡게 된 두 나라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이탈리아나 러시아에 맞선 대책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가 계속 이사국으로 남아 있는 채로 기존의 유럽경제공동체를 더욱 확대한 유럽 공동체를 창설한 것이었으니 설득력은 그다지 없다.

다만 그들이 말한 것 중 딱 한 가지만은 공약대로였다. 바로 러시아에 맞선 군사동맹이었다는 점 말이다. 물론 러시아와 한국의 밀월 관계를 고려하면 다분히 의도적인 일이었으리라. 본에 본부를 둔 유럽 공동체가 아주 합종군을 다분히 의식한 유럽 동맹군을 만든 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폴란드를 유럽 공동체에 가입시키고자 시도한 것이었다.

폴란드와 러시아의 역사적 앙숙 관계를 고려하면, 이는 러시아에 대한 무력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러시아는 유럽 경제공동체에서 참관국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유럽 공동체에서는 어떠한 지위도 지니지 못했다. 한마디로, 내쫓긴 것이다. 다만 제국 해체 이후 공개된 당시의 문서를 확인해보면, 프랑스도 독일도 당장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려는 의도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이 원한 건 아주라는 너무나 멀고 알기 어려운 적 대신 제멋대로 날뛰는 유럽 소국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고 러시아라는 알기 쉬운 적을 만들어 일종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룩하는 것에 더욱 가까웠다. 당대의 독불 외교 실무진은 그래야지만 유럽이 하나로 뭉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지만 유럽이 패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그들의 생각은 절반 정도 맞았다. 실제로, 러시아와 정면 대립하게 된 이후 유럽은 겨우 하나로 뭉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사실 그보다는 예측은 했으나 과소평가했던 것은-바로 그들이 하나로 뭉쳤듯이 러시아 또한 하나로 뭉쳤다는 사실이다. 혁명 이후 끝없는 내부 정쟁으로 국력 투사조차 뜻대로 되지 않던 러시아가 두마의 이름 아래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막아선 유럽 공동체와의 전쟁 위기에 맞서, 러시아 정부가 가장 먼저 펼친 정책은 바로 대륙횡단철도의 복선화 사업과 권율 전차의 시험적 도입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초원에서 첫 주행 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러시아군은 100대의 권율 전차를 주문했고, 한국 정부는 우수고객을 위한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며 이에 화답했다.

동 대 서의 역사적인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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