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후일담】한러 밀월관계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조금 전 대목에 의아함을 느낄 이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왜 러시아가 사회주의 국가라는 거지?"하고 말이다. 공산 국가들과의 냉전을 기억하고 있는 세대일수록 이러한 의문은 더욱 강할 것이다. 20세기 내내 러시아는 공산주의에 맞선 자유세계의 최전선이자 한국의 둘도 없는 우방으로 활약해왔으니 그러한 의문은 실로 당연하다.
거기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간단하다. 러시아는 건국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단 한 차례도 사회주의를 포기한 바가 없다. 러시아 민주공화국은 오늘날까지도 헌법 1조 1항에 「러시아 민주 공화국은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이다」라고 명시해두고 있다. 따라서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사회주의 국가이자 세계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였으며 당연히 러시아의 팽창은 곧 사회주의의 팽창으로 해석되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독자들의 합리적인 의심은 "그럼 왜 우리는 러시아를 자유 진영이라 생각한 거지?"일 것이다. 혹은, "그럼 왜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우리 쪽에 붙은 거지?"일지도 모르겠다. 우선 짧게 줄여서 설명하자면, 러시아는 비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국가였으며 냉전기의 공산 진영은 정신적으로건 직접적이건 마크르스의 후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보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러시아 혁명 직후 러시아의 두마에는 크게 두 가지의 정치세력이 존재했다. 하나는 흔히 인민주의자라고 불리는 노조주의자들이었고, 하나는 뚜렷한 지도층이 부재해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혁명 이후 러시아에 사회주의 체제를 이식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크게 공감하고 있었으나, 그 방향성에서는 크게 엇갈렸다.
노조주의자들은 지방 노조와의 협력을 통한 자발적인 이식을 주장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중앙정부의 독재권력을 통한 강압적인 이식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 중 혁명 초기 러시아 정계를 주도했던 건 노조주의자들이었다. 한국의 개입이 있었다고 하지만, 직접 모스크바를 함락시킨 건 노조주의자들의 사병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가 러시아에 다소 뒤늦게 소개되었던 것도 문제였다. 브나로드 운동을 비롯해 러시아 국내에서 꾸준하고 왕성한 활동을 보여온 노조주의자들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실상 러시아 혁명기에 처음으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중유럽에서 이미 마르크스가 스스로 순교를 택한 성자로 추앙받던 것과는 달리,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세력이 약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따라서 노조주의자들의 집권 그 자체는 한국 정부에서 노조주의자들을 후원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노조주의자들이 너무나 성급하게 권력을 스스로 손에서 놓아버렸던 점이었다. 이는 지방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대하였기 때문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러시아 지역사회가 사회주의는 이름뿐 혁명 이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거나 지역사회마다 저마다의 사회주의 체제를 가지게 하였다.
오죽하면 이 시기 러시아를 가르키는 말로 "하나의 당, 100가지 이념, 1,000가지 정부"라는 비아냥이 만들어졌을 지경이었다.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서 멋대로 화폐를 제조하는 등 월권행위를 일삼았고, 러시아에는 너무나도 낯설기만 했던 협동조합 경제는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의 범죄조직들을 대거 양산하며 러시아에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구현했다.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힘을 얻은 건 거의 전적으로 이 혁명 초기의 혼란상 탓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원세개 원수의 후원과 레닌이라는 혜성 같은 신성의 등장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지만 말이다. 이 때문에 혁명 초기 노조주의자들에게 크게 기울어 있었던 힘의 균형은 어느새인가 동수,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기울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공개된 당대의 한국 외교가의 비밀문건들을 확인하면, 이 시기 한국 외교가에서는 머지않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손에 노조주의자들이 실각하게 될 것이라 단정 짓고 있었던 듯 보인다. 한국 정부에서도 노조주의자들의 실각 이후 러시아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만 의논할 뿐이었다.
오히려, 갈수록 악화하는 치안상태와 나약하기만 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고려했을 때 러시아가 신뢰할 수 있는 방파제가 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집권하는 것이 더욱 한국에 이상적이라는 보고서들이 대거 올라가기도 했다. 상황이 바뀌게 된 건, 원세개 원수가 대륙횡단철도 공사지휘를 위해 본국으로 송환되고 홍종우 대사가 대러 정책을 전담하게 되면서였다.
원세개 원수와 홍종우 대사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뚜렷한 정치적 신념 없이 그저 사익이 이끄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준 원세개 원수와 달리, 홍종우 대사는 선말한초에도 보기 드문 골수 왕당파였다는 점이다. 홍종우 대사는 공공연히 "입헌군주정은 대한의 실정과 맞지 않다"며 절대 황권을 주장하는 등 고조가 보여준 철인 군주정에 매료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외교부로 옮겨오기 이전 국가헌병대 특수감찰부 과장, 국정원 예카테린부르크 지부 연락부장 등 보답 받기 어렵고 미움받기 쉬운 직위들만 골라서 거쳐온 것부터가 이러한 그의 성향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설령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음지에서 절대권력을 지탱하겠다는 사명의식에 불타는 수구적 인물상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원세개 원수와 홍종우 대사의 지향점은 시작부터가 달랐다. 원세개 원수의 이상향은 장차 이 세상 어딘가에 세워질 그의 왕국이었으나, 홍종우 대사의 이상향은 곧 대한제국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홍종우 대사가 러시아를 한국화하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다음은 홍종우 대사가 러시아 대사로 부임하기 이전 고조에게 바쳤다는 상소를 일부 발췌한 글이다.
「오늘날 몇몇 미련한 자들이 러시아의 무지몽매한 인민주의자들이 하루빨리 실각해야지만 비로소 북방이 안정될 것이라고 말하며 조정의 신료들을 선동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의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북방은 이미 안정된 지 오래이거늘, 그것이 북방을 망치는 길이지 어찌 북방을 안정시키는 길이라는 말입니까?
감히 말하건대, 만일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이 진정으로 현실감각이 부재한 무지몽매한 자들이라면 장차 대한은 인민주의자들이 영구히 러시아를 통치할 수 있도록 후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러시아가 감히 우리 대한에 맞서고자 하지 않을 것이고, 그때에 비로소 북방은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당시 외교가에서는 보기 드문 날카로운 식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외교가에서는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가 우리 대한에 재조지은의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러시아에 어떤 정치세력이 집권하건 감히 우리 대한에 맞서려 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으나, 홍종우 대사는 그와 정반대로 "러시아가 강성해지면 언제건 우리 대한에 다시 도전할 테니 러시아가 강성해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위험성을 알고서도 한국이 러시아에 은혜를 베풀었으니 설령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집권하더라도 한러 간의 동맹관계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 낙관하던 당대 한국 외교가의 이단아라고 할 수 있는 위 상소는 당연하게도 "어림짐작으로 한러 우호 관계를 망칠 셈이냐"라며 거센 반발에 직면했으나, 홍종우 대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홍종우 대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공산 비적"이라는 명칭을 공식석상에서 최초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골수 왕당파였고, 당연히 반공주의자였으며, 러시아가 국내를 추스르고 나면 곧장 한국에 사회주의를 수출하려 나설 것이라고 믿었던 인물이었다. 권력과 보신을 위해 혁명과 타협한 원세개 원수와는 정반대로,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 러시아 혁명을 깨부수거나 약화 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고조가 위의 상소를 개인적으로 어찌 평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알 수 없으나, 고조는 이 상소를 계기로 이 상소의 주인공이었던 홍종우 대사를 차기 주러 전권대사로 몸소 지명했다. 홍종우 대사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당시 김옥균 장관이 이 인사이동에 관하여 홍종우 대사의 지나친 반러적 성향을 문제 삼았음에도 불구라고 말이다. 어지간하면 측근들의 의견을 따르던 말기의 고조를 생각했을 때 참으로 이례적인 행보였다.
고조의 신임 속에 주러 전권대사로 부임한 홍종우 대사가 부임 이후 가장 먼저 한 시작한 정책은, 당연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노조주의자들을 후원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홍종우 대사는 국정원 시절의 근무경험과 인맥에 의지했고, 이를 기점으로 대러 정책은 군부의 손에서 벗어나 외교부와 국정원의 손으로 넘어갔다.
다만 특유의 반공 성향과는 별개로, 홍종우 대사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노조주의자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등 혁명 초기 러시아에 대하여 상당히 잘 이해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홍종우 대사는 당시 러시아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민심"이라 지목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장 절실한 건 "농촌 근대화"라고 설명했으며, 이를 위한 방법으로 "한국형 농업 협동조합의 전면도입"을 제안했다.
물론 홍종우 대사가 이러한 방법을 제시한 건 러시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러시아 농촌 근대화를 강조한 건 노조주의자들이 민심을 얻지 못하면 한국 정부에서 그들을 후원해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걸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러시아를 농업국가로 만들어 러시아의 산업화를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정책은 원세개 원수의 후원에 힘입어 나날이 세력을 팽창하던 레닌과 갈등을 빚었다. 철저한 중앙집권과 이를 통한 정부 주도의 산업화를 주장한 레닌과 러시아 국민의 민생 개선을 핑계로 러시아의 산업화를 방해하려고 한 홍종우 대사는 정면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레닌은 원세개가 그러했듯이 홍종우 대사와 완만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거라 낙관하고 있었기에 당내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세개의 인사이동을 막아야 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뜻하지 않은 일격으로 지도력에 타격을 입은 레닌은 당연히 홍종우 대사를 원수처럼 취급했다.
레닌은 공공연히 홍종우 대사를 일컬어 "러시아를 식민통치하려 한국에서 찾아온 식민총독"이라고 비아냥거렸고, 홍종우 대사는 홍종우 대사대로 레닌을 일컬어 "인간도살자", "러시아의 으뜸 망나니" 등으로 힐난했다. 레닌은 러시아 극우 민족주의자들과 손잡고서 대사관을 포위하며 반한시위를 선동하거나 친한파 인물들에게 주먹을 휘둘렀고, 홍종우 대사는 기록에 남지 않은 위법적인 수단들을 동원하여 레닌의 협력자들을 암살하거나 전향시켜갔다.
노조주의자들 또한 홍종우 대사를 미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공공연히 공산 비적을 운운하는 골수 왕당파가 사회주의자들의 마음에 들 리가 만무했다. 다만 홍종우 대사를 향한 혐오와는 별개로, 홍종우 대사가 한국의 국익을 위해 노조주의자들을 이용하려고 들었듯이 노조주의자들 또한 홍종우 대사를 이용했다. 홍종우 대사와 노조주의자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극과 극이었지만 좌우지간 당장 러시아에게 절실한 건 농업 근대화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대한제국 농업협동조합, 줄여서 한국 농협은 그 이전부터 노조주의자들 사이에서 후한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노조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농업 노동자 자주 경영」이 실현된 몇 안 되는 성공사례로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부에서 아직 파악하지도 못한 농업 협동조합이 수천 수만 개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보다는 적어도 정부의 공인을 얻은 농협 하나만 존재하는 편이 통제하기에 더욱 편리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존재했다. 러시아 전역에 도대체 몇만 개의 협동조합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그들이 도대체 무슨 수로 러시아 농협을 통합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혁명 이후 종교 탄압에 신음하던 러시아 정교회에서 협력을 대가로 국교 공인을 요구한 것이다.
한자리 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러시아의 문해율에 힘입어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러시아 농촌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정교회가 러시아 농협을 후원한다면 러시아 농민들이 앞다투어 러시아 농협에 가입하려 할 것이라는 건 누가 봐도 자명했다.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교회와의 타협은 곧 혁명을 배신한다는 것과 동의어였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노조주의자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홍종우 대사의 설득도 설득이었지만, 당장 실각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던 그들에게 정교회와의 타협을 통한 지지율 회복은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던 것이다. 물론, 옛 영국이 그러했듯이 정교회를 국교로 선포하되 국민이 정교회를 믿어야 할 의무는 없음을 재차 강조하며 선을 그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정교회는 다시 러시아의 국교로 복귀하였고, 러시아 정부에서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수천 수만 가지의 농업협동조합은 오로지 하나뿐인 「러시아 농업협동조합」으로 단일화되었다. 또 교회와의 타협에 반발한 레닌을 위시한 강경 사회주의자들이 탈당을 선언함으로써 노조주의자들의 사회혁명당은 대거 우경화되어 사민주의, 혹은 진보적 자유주의 성향을 띈 정당으로 변모했으나, 이 때문에 사회혁명당은 당시 러시아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레닌은 그를 따라온 강경 사회주의자들과 러시아 공산당을 창당하여 교회와 타협한 사회혁명당이 이끄는 두마를 부정했고, 사회혁명당 또한 러시아 공산당을 불법정당으로 선언하며 완전한 결별을 이루었다. 러시아 공산당의 빈자리는 러시아 기독교 민주당 등의 우파 정당들이 채웠고, 새롭게 발족한 두마는 개인 사유의 기업활동을 허가하는 등 시장경제에 유화적인 행보를 보이며 다분히 우경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언제 정권이 무너지는가만이 화두였던 1900년대와는 달리, 1910년대에 이르러서 러시아는 유럽 공동체의 위협에 맞서 한국으로부터 전차를 도입하거나 중앙정부에 비협조적인 협동조합들을 반국가단체로 선포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는 등 그럭저럭 국가로서 통일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럽인들에게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사회주의 국가이자 세계혁명을 꿈꾸는 호전광 집단이었으나, 사실 러시아를 향한 유럽인들의 공포야 이제 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러시아는 유럽인들의 공포를 살 예정이었고, 단지 이번에는 그 명분이 사회주의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러시아는 홍종우 대사의 맹활약(?)으로 다소 냉각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한국의 우방세력이었고 한국이 유럽에 영향력을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라도 러시아를 견제할 필요가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러시아에는 억울할지 몰라도, 유럽인들에게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유럽에게 러시아를 적대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듯이, 유럽의 봉쇄에 맞서 러시아가 한국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한 것 또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때마침 대륙횡단철도가 단선구간으로나마 개통되면서 양국 간의 민간교류는 나날이 활성화되었고, 이를 통해 얻은 이익 대부분은 유럽 동맹군의 침공에 대비한 국방비 증강에 투자되었다.
이러한 투자는 분명 시장경제 완화에 힘입어 러시아 군수산업을 크게 부흥시켰지만, 한편으로는 농산물과 원자재를 수출하여 번 돈으로 다시 군수산업에 투자하는 러시아 제국 시절의 기형적인 경제구조를 재현했다. 물론 양적으로건 질적으로건 제정 시절과 비교할 바는 되지 못했으나, 단지 체구가 부풀고 근육이 붙었을 뿐 원판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에도 변명의 여지는 있던 것이, 애당초 유럽 동맹군이 결성된 시점에서 러시아로서는 균형적인 성장을 추구할 수가 없었다. 일단 유럽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군사력부터 확보하지 못하면 당장 가까운 미래에 나라가 망하거나 정권이 무너지거나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게 일어날 판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20세기 내내 이러한 러시아의 국가적 딜레마는 형태만 조금씩 바뀌어 쭉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러시아가 어째서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자유진영에 서 있었는가에 대한 대답은 한 줄로 짧게 줄이자면 다음과 같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자유 진영을 떠난다는 선택지를 허락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