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517화 (517/530)

517화 【후일담】러시아-폴란드 전쟁

동과 서의 숙명적인 충돌에 관하여 다루기에 앞서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이 있다. 우선, 20세기 초 3차대전 등으로 대표되는 동과 서의 대결은 흔히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악랄한 가해자 서역의 침략과 선량한 피해자 동방의 자기방어가 아니다. 이걸 알지 못하고서 20세기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현실과 이상의 크나큰 괴리를 겪게 될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는 분명히 달랐다. 19세기의 동방은 서쪽으로부터 찾아온 낯선 이방인들을 맞이할 어떠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으나, 20세기의 동방은 준비되어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역으로 서쪽으로 찾아갈 준비에 열의를 올리고 있었다. 당연히 20세기 동과 서의 충돌은 일방적인 침략도, 자기방어도 아니다. 그건 힘과 힘의 충돌이었고, 이제는 낡기까지 한 패권대결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시작을 알린 건 한국이었다. 고조 대에도 썩 평화주의적 외교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던 한국이었지만, 고조가 2대 황제 선종에게 제위를 물려준 이후로 한국은 이전보다도 더욱 공격적인 행보를 보여준다. 유럽의 우려를 무시하고 러시아에 전차를 판매하거나 러시아-폴란드 전쟁 육군항공대를 파병하거나 인도 내전 당시 함대를 파병하여 무력시위에 나선 행보 등이 그렇다.

대중적인 인식과 달리, 20세기 초의 국제정세는 유럽을 밀어내고 구대륙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한국, 한국에 맞서는 유럽, 오대양을 주름잡는 대양해군을 건군하여 대영제국의 빈자리를 채운 미국으로 대표된다. 두 초대형 대륙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가운데 해양세력이 바다를 선점하여 이들 두 세력 중 어느 세력도 어느 한쪽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구도였던 것이다.

20세기 초 한국이 보여준 이러한 행보는 고조의 외교철학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행보였다. 고조는 생전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과 유럽이 충돌하는 틈에 한국은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실제로도 재위 말기에는 15년간 어떠한 전쟁도 일으키지 않고서 러시아에 주둔하고 있던 합종군을 철군시키고 호주 독립 당시에도 앞서 미국, 인도와 상의하는 등 신중한 행보를 보여줬다.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점은 역시 「그렇다면 어째서 한국이 이러한 행보를 보여줬는가?」일 것이다. 가장 간편한 대답은 「그 외교정책을 고안해낸 고조가 죽고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겠지만, 모두 알다시피 고조는 그의 생전에 제위를 물려줬을 뿐 엄연히 태상황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인가? 거기에 대답하려면 크게 두 가지를 말해야 한다.

하나는 당시 한국은 연이은 성공에 크게 도취한 상태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정치세력 중 팽창주의에 반대하거나 최소한 우려를 표하는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폭주는 고조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선종의 정치적 후원자로 물러난 순간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었다. 힘은 넘쳐나는데, 그 힘을 휘두를 곳은 온 사방에 널려있는 데다가 멋대로 힘을 휘두른 끝에 끔찍한 실패를 경험한 적도 없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연이은 성공에 도취해 있었다는 건 한국이 폭주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실질적인 이유는 후자-팽창주의에 반대하거나 우려를 표하는 정치세력이 극히 드물었다는 점이 될 것이다. 실제로도 이 시기, 개인으로서 한국의 폭주에 우려를 표하는 양심 있는 지식인은 흔하디흔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양심선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실제로도 이렇다 할 정치적 운동을 펼치지도 못했다.

물론 주요 정치세력들이 이들 개개인에게 침묵을 강요하기도 했으나,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한국 국민이야말로 이 시기 누구보다 팽창을 원하고 있던 정치세력이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 국민에게 고조가 이끄는 한국군은 무적이었고, 한국의 승리와 성공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며,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였다.

국론이 이러했으니, 국론을 반영하는 정당과 이념들도 호전적으로 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다만 방향성과 궁극적 목표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절대주의자들은 한국의 군홧발 아래 전 세계가 무릎 꿇기를 바랐고, 자유주의자들은 한국이 전 세계를 사들이기를 원했고, 보수주의자들은 온 천하가 한국의 천자를 공경하기를 바랐고, 연방주의자들은 아주의 민중이 자발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해체하고 하나 된 아주 연방을 건국하기를 바랐다.

20세기 초 한국의 정치를 주도하던 양대 정당, 국민당과 보수당은 각각 절대주의와 우파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정당들이었다. 보수주의는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고, 연방주의는 본격적인 정치 활동이 아닌 학생운동에 그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선종이 막 제위를 물려받았을 당시, 한국의 여당은 국민당이었고 제1야당은 보수당, 제2야당은 격몽(擊蒙)당-후일의 중앙당이었다.

자, 이 시점에서 다시 위 문단에서 국민당이 어떤 이념을 대표하고 있었고, 또 그 이념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었는지를 재독해주기를 바란다. 딱 견적이 나오지 않는가? 그렇다. 한국이 더욱 왕성한 군사 활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던 국민당이 정권을 잡았으니, 당연히 한국이 공세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을 알린 건 1915년에 막을 올린 러시아-폴란드 전쟁이었다.

러시아-폴란드 전쟁은 흔히 「예견된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그 이름 그대로, 이미 오래전부터 누구나 이들이 전쟁을 치르리라는 걸 예측하였다는 이야기다. 러시아와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오랜 앙숙이었고, 폴란드의 독립 그 자체도 러시아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기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독립 이후 폴란드의 극우 정권이 러시아를 직간접적으로 도발해왔으니 실제로도 당대에 사는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오히려 혁명 이후 혼란기 탓에 러시아가 몸을 사리면서 진작에 일어났어야 할 전쟁이 1915년에서야 겨우 일어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아무튼, 이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건 1914년 러시아가 대륙횡단철도를 폴란드와의 접경지대까지 확장하겠다는 내용의 새로운 철도계획을 발표하면서였고 이를 침략의 전조라 간주한 폴란드군이 프랑스, 독일 등의 군사 원조 약속을 받아낸 뒤 1915년 1월 4일 기습적으로 공사현장을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개전 초 프랑스에서 지원한 비행선, 열차포 등의 최신 병기들을 앞세워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폴란드군은 3월 말 러시아의 악명 높은 라스푸티차에 발이 묶이며 스몰렌스크에서 공세 종말점에 다다랐고, 러시아는 자연환경이 폴란드의 발을 묶은 틈을 타 한국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여 육군항공대를 파병 받는 한편으로 동원을 마무리 지어 반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라스푸티차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4월, 벨라루스 상공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항공전이 시작되었다.

고작해야 의용군 간의 충돌이었다고 하나, 그 의의는 절대 작지 않았다. 우선, 벨라루스 항공전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프랑스와 군사적 충돌을 빚었다. 양측 모두 정규 참전이 아닌 의용군이라는 형태의 참전이었으나, 양국 육군항공대는 평균적으로 매일 1기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하거나 격추하며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고작해야 하루에 1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평균의 함정에 불과하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전파 기술이나 통신 기술이 발달한 것도 아니었고 항공기의 체공 시간도 극히 짧았기에, 일단 양측의 전투기가 만난다는 상황 자체가 드물었다. 일단 전투기가 적 전투기의 요격을 위해 투입되는 사례부터가 벨라루스 항공전 이후에나 등장하기 시작했고, 설령 육군의 요청에 따라 출격해도 그 무렵이면 이미 적 전투기들은 급유를 위해서건 탄약이 떨어져서건 자리를 떠난 지 오래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따라서, 실질적인 손실은 고작해야 사흘 사이에 집중되었다. 4월 초, 한국과 프랑스의 육군항공대는 러시아와 폴란드의 전쟁이 길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었다. 폴란드가 이 기회에 러시아를 산산조각내겠다며 공공연히 외치고 있었듯이, 러시아 또한 폴란드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고 공공연히 외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글자 그대로, 두 나라 중 하나가 멸망할 때까지 결코 끝날 수 없던 전쟁이었던 것이다.

다만 전쟁이 길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의견일치를 보인 이들 양측의 결론은 각각 달랐다. 프랑스 육군항공대가 극악의 라스푸티차로 전선이 소강된 틈에 왕성한 정찰 활동으로 러시아의 혁명 이후 전력 재건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알아보려 하였지만, 한국 육군항공대는 전선이 소강된 틈에 폴란드의 신식병기들을 파괴하여 앞으로 러시아가 수월히 반격작전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이렇게 양측의 전략이 극과 극을 달린 건, 기본적으로 양측의 운용전략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이 당시 대부분의 나라는 육군항공대를 정찰자원이라고 여겼다. 적 영공까지 날아가 적 지상군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파악해서 우군 지상군이 수월하게 작전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육군항공대의 역할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한국 육군항공대의 운용전략은 달랐다.

한국 육군항공대는 단지 적 지상군의 정보를 정찰해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적 지상군에게 직접적이고 심대한 타격을 입힐 것을 기대받았다. 기총을 이용해서건, 폭탄을 투하하건 말이다. 당연히 육군항공대가 책정받은 예산도 다른 나라들과는 자릿수가 하나씩 달랐고, 이 무렵 한국의 주력 전투기였던 불새 전투기에는 기관총 1문씩이 기본적으로 장비되어 있었다.

당연히 프랑스 육군항공대 또한 불새 전투기에 관한 개략적인 정보는 파악하고 있었고, 불새 전투기에 대항하기 위하여 뉴포르 12 전투기가 개발되기도 했지만, 개전 직전까지 해군과 육군의 전력증강에 우선순위가 밀려 실전배치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1915년 4월 1일, 한국 공군은 후일 벨라루스 항공전을 상징하게 된 「만우절 대공습」을 계획했다. 그 이름 그대로 4월 1일 만우절에 시작된 이 사흘간의 공습에서 가장 우선된 건 정찰도, 지상군 공습도 아닌 폴란드-프랑스의 항공전력 분쇄였다. 이 대공습을 위하여 제102, 109, 117 전투비행대대가 동원되고 예비전력으로 제116 전투비행대대가 비상대기 상태로 항시 지상에서 대기하였다.

다만 3개 비행대대가 동원되었다고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한 번에 출격한 건 첫날 새벽 6시에 있었던 첫 번째 공습뿐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육군항공대를 눈 있는 총알이라고 여겼고, 이를 근거로 전열 보병 시절의 삼단사격을 재현했다. 가령 제102 전투비행대대가 출격한 동안 제109, 117 비행대대는 출격을 준비하고, 다시 102 전투비행대대가 복귀하여 보급과 정비를 진행하는 동안 109, 117 전투비행대대가 차례로 출격하는 식으로 말이다.

결과적으로, 벨라루스 항공전을 통틀어 격추당한 35기의 전투기 중 26기가 이 사흘간에 걸쳐 발생했다. 이 중 한국 육군항공대의 전투 중 손실은 이륙 사고로 추락한 3기를 제외하면 1기뿐이었고, 이 끔찍한 교환비는 프랑스 육군항공대가 이후 전선에 나서기를 꺼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기껏해야 권총을 이용해서 개별적으로 항전하는 정찰기는 무리를 지어 기관총 사격을 퍼붓는 전투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폴란드 측 항공전력의 주축이었던 프랑스 육군항공대가 위축되어있는 동안 한국 육군항공대는 일방적으로 폴란드 지상군을 휩쓸었고, 직접적인 손실은 크지 않았어도 이러한 일방적인 공격은 폴란드군의 사기를 꺾는 데에 충분했다. 가장 큰 문제는 폴란드군의 기병 전력이 집중공습을 받았던 것이다.

한국 육군항공대는 본래 작전목표였던 장갑열차가 전투기의 화력으로 무력화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단단하다는 걸 눈치채자 곧장 그들의 표적을 한데 뭉쳐 다니는 폴란드군 기병대로 바꿨고, 병사들은 말에서 내려와 공습을 피할 수 있었어도 사방으로 날뛰는 말들은 공습을 피할 수 없었다. 꼭 그게 아니라도, 공포에 질려 부대를 떠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군마도 흔하디흔했다.

결국, 6월에 이르러 동원이 완료된 러시아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을 때, 폴란드군은 각 부대가 고립되어 유기적인 대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전령들까지 공습에 시달리게 된 까닭이다. 자랑하던 최신 병기들은 수의 폭력을 앞세운 러시아군의 파도에 휩쓸렸고, 러시아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하여 준비된 참호선은 전차를 앞세운 러시아군의 돌격에 하나둘 돌파당했다.

6월 1달 동안 러시아군이 27만 명을 손실하는 동안 폴란드군은 36만에 달하는 병사들을 잃고 말았다. 이는 당시 폴란드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주력사단 전부였으며, 당시 소식을 전해 들은 폴란드의 국방장관은 "안돼!"라는 단말마를 내지르며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다고 전해진다. 이미 폴란드의 패망은 확정적이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열강이 전면개입하거나 러시아의 자비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쪽도 쉽지 않았다. 독일과 프로이센은 이 기회에 눈엣가시였던 폴란드가 교훈을 깨닫기를 바랐으며, 프랑스는 자국 육군항공대의 일방적인 패배에 격노했으나 그들이 제시간에 도착하기에는 폴란드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러시아가 자비를 베풀어줘야 하는데, 개전 초기부터 폴란드의 멸망을 부르짖던 러시아가 이제 와 자비를 베풀 가능성은 없었다.

러시아와의 마지막 종전 협상조차 실패로 돌아가자, 폴란드 공화국은 폴란드 국민 마지막 한 사람까지 침략자 러시아에 맞서 싸울 것이라며 결사 항전을 부르짖었다. 폴란드군은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성인 여성들마저 무장시켜 전선에 투입했다. 글자 그대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가 죽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8월에 이르러서는 수도 바르샤바까지 러시아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패망의 위기에 빠진 폴란드를 구한 건 독일의 개입이었다. 국경을 넘어 크라쿠프까지 진군한 독일군은 러시아가 폴란드 멸망을 원하면 독일은 폴란드의 동맹으로서 폴란드의 결사 항전을 지원할 것이라며 개입 의사를 분명히 밝혔고, 러시아에서 이에 뭐라 대응하기도 전에 이미 전선의 러시아군과 독일군은 폴란드 각지에서 산발적인 무력충돌을 벌였다.

이때 한국은 독일의 군사개입을 맹비난하며 러시아에 은밀히 참전 의사를 전했으나, 막상 러시아에서 소극적으로 나서면서 3차대전은 일단 불발되었다. 이제 막 나라다운 나라 꼴을 갖추게 된 판국에 독일과 전면전을 치를 국력이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 탓이었다. 결국, 그해 11월 양국 대표가 빈에서 만나 종전 협상에 서명함으로써 러시아-폴란드 전쟁은 일단 마무리되었고, 러시아는 브레스트 등 혁명 당시 잃어버렸던 영토들을 수복하고 대륙횡단철도를 바르샤바까지 연결했으나 목표했던 폴란드 멸망은 실패했다.

이는 폴란드나 프랑스에도 불만족스러운 결과인 건 매한가지였다. 폴란드는 이후 독일군의 상시주둔을 허용하면서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일의 속국으로 전락했으며, 프랑스는 괜한 군사개입으로 체면만 구긴 채 독일이 종전 협상을 중재하는 걸 구경만 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전쟁의 승자는 자신들의 전략이 옳았음을 확인한 한국과 약간의 손실만으로 폴란드를 집어삼킨 독일 두 나라였다.

결과적으로 이 폴란드-러시아 전쟁은 유럽 공동체가 더욱 단단히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육군항공대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육상전을 치른 건 엄연히 러시아군이었고, 프랑스와 독일의 군사적 지원으로 동유럽의 군사 강국으로 떠오르던 신성 폴란드를 상대로 고작 1년도 안 되어 완승하면서 더는 혁명 직후의 오합지졸이 아니라는 걸 입증한 러시아군은 유럽의 공적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감은, 뒤이은 이란-튀르크 전쟁과 이를 계기로 발발한 인도 내전에서까지 한국이 개입을 시사하면서 정점을 찍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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