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518화 (518/530)

518화 【후일담】인도 잔혹사

앞선 러시아-폴란드 전쟁과는 다르게 인도 내전은 우발적으로,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실제로도, 당대에 이를 예측한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일 공개된 모든 사료를 열람할 수 있게 된 우리야 그게 전혀 갑작스러울 것 없는 필연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사료 중 절반도 채 접할 수 없던 당대에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겉으로 보기에 인도 제국과 그 제후국들은 위태롭기는 해도 그럭저럭 현상 유지에 동의하고 있는 듯 보였다. 켈커타에 자리 잡은 백인 샤한샤는 통치를 인정받기 위하여 현지 토호들에게 줄곧 유화적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한 일방적인 저자세로 일관했고, 이는 비록 중앙의 통제력을 약화했으나 한편으로는 현지인들이 백인 샤한샤의 통치에 수긍하게 하였다.

일찍이 라자들을 위한 귀족원 수립에 수긍한 인도 제국의 샤한샤 에드워드 7세는 1907년 각주의 자치의회 설치를 수용했고, 다시 그의 수명이 다하기 직전이었던 1909년에는 라자들의 우려에도 벵골주에 한정된 국민투표와 평민원 수립을 강행했다. 이는 브리튼 자유국이 더욱 왕실을 꺼리게 하였으나, 벵골인들이 그들의 백인 샤한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충성여론은 특히 인도 제국의 도읍 캘커타 시에서 두드러졌는데, 켈커타는 영국이 인도에 다다르기 이전까지 작은 마을이었다가 1690년 동인도회사가 상관을 설치하면서 오늘날의 대도시로 성장했기에 영국의 영향력이 가장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는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영국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영국에 손에 발전하여 끝내는 제국의 도읍이 되었으니 그 애착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캘커타 현지의 지식인들도 이러한 에드워드 7세의 유화적 행보에 호의적이었다. 에드워드 7세가 벵골인들을 후대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평민원은 온전히 벵골인들을 위해 준비되었고, 인도 제국의 수도 또한 벵골주의 주도인 켈커타에 있었으며, 모든 사업은 켈커타에서 시작되어 먼저 벵골, 그 뒤에 인도 전역으로 퍼져갔다.

에드워드 7세가 끝내 켈커타에서 붕어하고 새로이 3대 인도 황제 조지 1세가 즉위하면서 이러한 충성여론은 더욱 확고해졌다. 샤한샤 조지는 그가 즉위하던 날 그에게 환호하는 켈커타 시민이 보는 앞에서 그는 인도 제국의 3대 황제 조지 1세라 선포했고, 이는 그가 인도인들의 황제로서 책임과 소명을 다하겠다는 뜻이었다.

막상 이렇게 선포한 뒤에도 뒤에서는 조국 영국을 그리워하며 인도의 풍습을 거리낀 했지만, 적어도 공개석상에서만큼은 조지 1세는 철저하게 인도인들의 황제로서 행동했다. 조지 1세는 호주, 캐나다 등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과 「자유무역동맹」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경제협력기구를 설치했고, 이 때문에 미국과 갈등을 빚으면서까지 구 식민지 간의 경제협력을 재건하면서 켈커타시를 제국의 새로운 무역중심지로 재탄생시키고자 노력했다.

조지 1세는 라자들의 반발에도 1916년 국민투표를 인도 전역에 확대하며 평민원에 힘을 실어주었고, 인도의 양귀비 재배를 근절하고 사비를 털어 인도 전역에 보건소를 세웠다. 조지 1세는 인도 제국 역사상 최초의 인도인 총독을 임명했고, 켈커타 대학을 확장하여 더욱 많은 인도인 지식인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안배했다.

한편으로 그는 스스로 벵골어를 배우고 그의 자식들에게도 인도인 가정교사를 붙여 힌디어, 벵골어를 익히도록 하였다. 조지 1세는 영어와 함께 힌디어, 벵골어를 인도 제국의 공용어로 공표하는 등 현지 문화에 더욱 유화적인 행보를 보였고, 그 스스로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나 모든 인도인의 황제가 되고자 주일마다 힌두교 사원과 이슬람 사원 모두에 참배했다.

그는 인도에 자유주의와 의회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고자 노력했고, 라자들의 반대로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인도 전역에 걸친 국민교육 사업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인도의 산업화를 위하여 언제나 관료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고, 직접 켈커타시의 면직물 공장에 방문하여 때투성이의 노동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끌어안아 주기도 했다.

조지 1세는 누가 뭐래도 대외적으로 모범적인 입헌군주이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군이었고, 조지 1세의 잘생긴 외모는 그의 평판을 더욱 긍정적으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이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평판이었으나, 그렇다고 그의 노력이 빛이 바래는 건 아니었다. 설령 머리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알고 있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인 법이다.

물론, 여기에는 조지 1세 그 자신이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 자유주의자였다는 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그는 켈커타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백성은 곧 나를 일컫는다"라고 발언하기도 했으며,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만성적인 기관지염에도 왕성하게 인도 곳곳을 시찰했다. 황제의 철도유람은 인도의 철도문제를 켈커타 관료사회에 각인시켰고, 인도 제국이 인도 전역의 교통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투자하도록 유도했다.

이렇듯 조지 1세는 평생에 걸쳐 색스코버그고타 왕조를 위해 헌신했고, 그의 노력은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 강경 독립론자였던 찬드라 보세조차 "황제여, 당신에게는 아무런 유감도 없습니다!"라는 한마디로 황제를 향한 심경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가 증오하는 건 영국인 관료들과 그들과 손을 잡은 라자들이지, 황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황제는 이 무렵 인도인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었기에, 인도의 내전은 모두에게 갑작스러웠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째서 이 모든 노력에도 인도에서 내전이 발발했는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역시나 힌두교와 이슬람의 역사적 갈등 탓이겠지만, 더욱 깊이 들어가자면 이 시기 오스만 튀르크의 주도로 수니파 무슬림 사이에서 널리 확산하던 이슬람 파시즘을 설명해야만 한다.

오스만 튀르크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는 「로마의 황제」라는 칭호를, 튀르크인들에게는 「튀르크의 파디샤」라는 칭호를, 비 튀르크 무슬림들에게는 「메카의 칼리파」라는 칭호를 내세워 왔다. 그러나 시대가 근대에 접어든 이래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황제의 칭호는 서로 상충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황제이고자 한다면 기독교인이 되어야 했고, 튀르크의 파디샤이고자 한다면 튀르크인 이외의 백성을 포기해야 했으며, 메카의 칼리파이고자 한다면 근대화를 포기해야 했다.

압뒬하미트 2세는 이러한 제국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슬람 파시즘을 선보였다. 이 이슬람 파시즘에 근거하자면 모든 무슬림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문화적 공통점을 가지는 하나의 이슬람 민족이었으며, 그 외 터키인, 아랍인, 페르시아인 등의 세분된 민족분류는 이슬람 세계의 분열을 일으키는 반드시 배척되어야 할 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달성되기 어려운 목표였다. 옛 정통 칼리파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 이슬람 세계는 명백한 수세였고, 이교도들은 결코 하나 된 이슬람 세계를 원하지 않기에 더더욱 이러한 민족분류를 부추기며 이슬람 세계의 분열을 유도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교도들의 개입에 맞서 하나 된 이슬람 제국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일치단결하여 정당한 권위를 가진 정당한 통치자의 통치 아래 일치단결해야만 했다.

따라서 모든 무슬림은 정통 칼리파가 지배하는 하나 된 이슬람 제국의 통치에 절대복종해야 했고, 그 정통 칼리파란 말할 것도 없이 예루살렘, 메카, 메디나. 이 세 성지의 칼리파 압뒬하미트 2세였다. 독일의 범게르만주의,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를 더욱 구체화하여 황제의 전제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 이슬람 파시즘은 오늘날에는 어처구니없이 보여도, 당대에는 적잖은 호응을 얻었다.

실제로 이 당시 이슬람 세계가 위기에 처한 건 사실이었을뿐더러, 압뒬하미트 2세는 어찌 되었건 칼리파였고 종교적 색채에 물들었기는 하나 파시즘이라는 근대적 이념을 끌어들임으로써 이슬람의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만 튀르크와 대립각을 세우던 이집트 또한 압뒬하미트 2세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에 반발했을지언정 이슬람 파시즘 자체는 자국의 사정에 맞게 고쳐 수용한 점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시작된 이슬람 파시즘 운동은 반쪽 열강 오스만 튀르크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세계적인 이념으로 발돋움하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바로 이웃한 인도까지 확산하였다. 조지 1세의 노력에도 여전히 인도의 문맹률은 반수를 훌쩍 넘기고 있었고, 이 끔찍한 문맹률은 인도인들이 아무런 비판적 사고 없이 파시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하였다.

인도 제국의 종교적 분열은 이러한 이슬람 파시즘 운동을 더욱 부추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지 1세의 유화적 행보에도 여전히 힌두교도들에게 무슬림은 총칼을 앞세워 그들의 고향을 짓밟은 침략자였고, 반대로 무슬림에게 힌두교도는 수백 년 전 일을 들먹이며 이미 수백 년간 자손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자신들을 내쫓으려는 강도 떼였다.

이런 와중 인도에 유입된 이슬람 파시즘 운동과 이에 따른 대중동원은 힌두교도들에게 이에 맞선 힌두 파시즘을 필요로 하기에 충분했다. 「신성 돌격대」가 힌두교 사원을 불태우고 그 안에서 기도를 올리던 신자들을 두들겨 패면, 이에 맞서 「방패단」이 무슬림 상점을 습격해 물건을 빼앗고 상점을 보던 여점원을 윤간하는 식이었다.

공권력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힌두교가 강세인 지역의 경찰들은 무슬림의 폭력만 단속하고 힌두교도의 폭력은 묵인했고, 이슬람이 강세인 지역의 경찰들은 당연히 무슬림의 폭력은 묵인하고 힌두교도의 폭력만 단속했다. 결국, 유일한 방법은 아예 다른 지역에서 온 경찰을 투입하는 것이었는데, 이들 또한 시크교가 되었건 불교가 되었건 적어도 종교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으니 종교 간 갈등에 더욱 불을 지르는 격이었다.

조지 1세와 켈커타 정부는 관용과 공존을 강조했지만, 이러한 관용과 공존은 벵골주에서만 효과를 보았을 뿐이었다. 이마저도 조지 1세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5:5라는 첨예한 종교분포를 보이던 벵골주 또한 마찬가지였을 테니 최악은 피했다고 위안해야 할 판국이었다.

인도의 낙후된 교통환경과 전근대적 봉건제도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켈커타 정부에서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수습해보려 해도, 현지 라자가 이를 방해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온다면 방법이 없었다. 만일 대영제국의 힘이 건재했다면 라자들에게 협력을 강요할 수도 있었겠지만, 인도 제국은 대영제국이 지난 2세기간 개발해온 벵골주를 기반으로 인도 각지의 라자들의 협조로 유지되는 국가연합에 불과했다.

그리고 인도의 라자들에게 파시즘의 확산과 이에 따른 치안 악화는 그들이 새로운 인도의 황제가 되기 위한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켈커타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졌다. 여기에 하나 된 인도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민족국가를 건국하고자 하는 각지의 분리주의자들까지 가세하니, 임시정부를 자칭하는 반정부 단체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915년 조지 1세의 낙마 사고는 폭탄이 터지는 데 필요한 마지막 요소- 곧 불씨를 제공했다. 비록 조지 1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활동을 재개하여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지만, 온 인도의 관심이 조지 1세의 안부에 쏠리었던 동안 펀자브에서는 이슬람 제국 건국을 꿈꾸는 무장단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들의 배후에 오스만 튀르크가 있었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음이라.

동유럽에서는 러시아와 폴란드의 정면충돌이 한창이던 1916년 7월 3일, 펀자브주를 위시한 인도 제국 서북부 무슬림 과반수 4개 주가 인도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들은 델리 술탄국의 후계자임을 선언하며 그들의 정식 국호를 「서인도 이슬람국」이라 선포했고, 독립과 동시에 메카의 칼리파로부터 전폭적인 지원과 독립보장을 약속받았다.

이에 켈커타 정부는 크게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이들 주에 한정된 독립투표였고, 하나는 즉각적인 자치령 인정이었다. 승리를 확신한 신성 조국당은 독립투표 제안을 받아들였고, 1918년 치러진 독립투표에서 72%의 투표 참가율, 56%의 독립반대표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신성 조국당이 독립을 포기하면서 인도는 평화를 되찾았다-가 되었다면 좋겠지만. 이들 신성 조국당은 켈커타 정부가 선거결과를 조작했다고 맹비난했다.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가득 찬 투표 상자가 수십 개는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 켈커타 정부는 혐의를 부정했으나, 후일 공개된 사료들을 확인해보면 일부 선거구에서 실제로 이미 가득 찬 투표함들이 배치되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 가득 찬 투표함이 신성 조국당의 것이냐 아니면 켈커타 정부의 것이냐, 혹은 지방의 독단이냐 중앙의 지시냐만 의견이 분분할 뿐 선거 그 자체는 부정선거가 맞았던 셈이다. 아무튼, 결과만 따지자면, 신성 조국당은 이 부정선거 논란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 이전까지 반반이던 독립 찬반여론이 독립에 반대하면 힌두교도로 뒤바뀐 것이다. 무슬림들에게 개종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면, 독립 반대 여론을 입 밖에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 셈이었다.

이때부터 신성 조국당은 그들의 목표를 독립에서 델리 술탄국 재건으로 바꾸었다. 켈커타 정부를 향한 분노로 인도 아대륙의 무슬림들을 일치단결시켜 다 무너져가는 인도 제국이라는 낡은 집을 허물고서 옛 델리 술탄국이 그러했고, 또 무굴 제국이 그러했듯이 북인도를 지배하는 새로운 이슬람 제국을 꿈꾼 것이다. 당연히, 이는 그들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1920년 2월 15일, 서인도 이슬람국은 인도 제국에 선전포고문을 전달했다. 이들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던 인도 제국은 선전포고문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인도 제국이 부정하건 말건 선전포고문을 전달한 서인도 이슬람국의 지하드 전사들은 국경을 넘어 델리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인도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아라비아해에는 매일 같이 이슬람 형제들을 위한 무기를 실은 상선들이 들락거렸다. 오스만 튀르크는 이들을 위한 의용사단을 파병했고, 브리튼 자유국은 무기를 대고 이탈리아 왕국은 탄약을 팔아치웠다. 이 시점에서 한국의 개입은 당대에도 이미 기정사실로 여겨지고 있었던 듯 보인다. 러시아까지 육군항공대를 파병한 한국이 인도에서 시작된 내전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도 우스웠을뿐더러, 인도는 한국과 왕실혼을 나눈 사이였으니 그럴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개입 수위였다. 당대의 외교가는 한국이 육군항공대를 파병하거나, 아예 더 나아가 의용사단을 파병할지도 모른다 추측했다. 러시아에서 보여준 행보를 생각하면 이러한 추측은 실로 지당해 보였다. 하지만 한국은 그들의 예측을 산산이 깨부수며 국제사회를 경악시켰다.

한국은 그 즉시 제3함대를 파병하여 아라비아해를 봉쇄하고 서인도 이슬람국으로 향하는 민간상선들을 나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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