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후일담】자유 아주를 위하여
말할 것도 없지만, 이는 아랍 세계, 더 나아가 유럽 공동체를 향한 중대한 무력 도발이었다. 사태 초기 뒷짐을 지고 관망하던 프랑스, 독일 등이 한국의 함대 파병에 즉시 전면개입을 고려하고, 이 지역에 직접적인 이권이 얽힌 바 없던 미국 또한 우려를 표할 만큼 말이다. 한국이 함대를 파병하며 전면개입을 시사하였을 때 한국의 손을 들어준 건 아주 조약을 비롯한 한국의 거수기들을 제외하면 없었다.
한국이라고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한국에서 가장 잘 알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3함대를 인도양으로 보낸 것이다. 본토방위를 맡은 1함대는 움직일 수 없고, 2함대는 순양전함과 항모 위주로 편성되어 무력시위에 부적합했으며, 제1 기동함대는 아직 편성 중이었기에 한국에서 움직일 수 있는 해군 전력 중 가장 강력한 함대를 파병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왜 이런 판단을 내렸을까? 대외적인 명분은 물론 아주 이웃 형제를 돕자였지만 이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왕실혼이나 기존의 우호 관계도 명분일 뿐, 직접적인 이유는 되지 않았다. 진짜 이유는 그보다 훨씬 간단명료했다. 만일 인도에서 막지 못하면, 이슬람 파시즘의 파도가 보다 동쪽-말라카 해협까지 확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말라카 해협의 여러 국가는 이슬람이 강세였고, 이는 유럽인들이 손을 뻗고 난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 중 가장 성공적인 기독교화가 진행된 필리핀조차 만다 나오 섬 등지에는 무슬림 인구가 주류인 지경이고, 오늘날까지도 이들 국가는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해두고 있거나 명시해두지 않더라도 국민의 80% 이상이 무슬림 인구인 상태라 사실상 국교나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인도 제국이 붕괴하고, 이슬람 파시즘이 더욱 확산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세세한 전개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오갈 수 있겠으나, 그들이 한국 주도의 아주 조약에서 일제히 이탈하려 들 것이라는 점만큼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따라서 불이 말라카 해협까지 옮겨붙은 다음 뒤늦게 뒷수습에 나설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인도에서 이슬람 파시즘의 확산을 막아야만 했다.
당시 인도 주재 한국 대사 이상룡은 인도 내전이 발발하자 그 즉시 긴급전보를 통하여 "순망치한의 오랜 고사가 재현될 위기"라고 본국에 전했고, 이상룡의 충언은 그 즉시 받아들여졌다. 당시 집권여당이던 국민당은 인도 내전 개입을 두고 "전체주의의 물결에 맞선 자유 아주의 성전"이라 포장했고, 겉으로나마 구색을 갖추기 위하여 우방국들에 공동파병을 요구했다.
당대에 이러한 주장은 그저 뻔한 관영선전이라 여겨져 한국에서조차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하였으나, 이 시기 국민당의 자유 아주 선전은 후일 한국 정부가 처음으로 자국과 아주 조약을 일컬어 「자유 세계」라고 지칭했다는 점 때문에 후대의 학계에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그간 아주만을 강조하던 한국에서 자유라는 두 글자를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절대 작지 않다.
한국이 단지 아주의 지역 패권국으로 만족하지 않고서 본격적으로 아주 바깥까지 수중에 넣고자 하는 욕심을 품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무엇보다 중요한 증거인 까닭이다. 실제로, 이후로도 국민당은 자유 세계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한국의 군사력 투사를 애용하며 야당들 또한 정권을 잡고 난 다음에는 아주 조약 내부의 문제에는 아주를, 아주 바깥의 문제에는 자유를 내세우며 개입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의 본격적인 개입주의 외교는, 그 첫 장을 위태로운 성공으로 장식했다. 한국의 아라비아해 봉쇄에 맞서 유럽 공동체에서도 연합함대를 편성해 대치하는 등 정면대립에 나서자, 이를 틈 타 미국이 쿠바 앞바다에 백색함대를 전진 배치하고 브리튼 자유국 건국 이래 수차례의 휴전과 개전이 반복되던 아일랜드 독립전쟁 개입을 시사한 덕택이었다.
미국이라고 한국의 영향력이 계속 확대되는 것이 달가웠을 리는 없겠지만, 당장은 한국을 견제하는 것보다 미주 대륙에서 유럽세력을 완전히 배제하고 대서양을 온전히 미국의 호수로 만드는 걸 우선시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력이 분산된 유럽이 어지간해서는 미국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렸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인도양에서는 한국, 대서양에서는 미국과 대치하게 된 유럽 공동체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연합함대의 기둥을 맡고 있던 프랑스로서는 당장 카리브해의 식민지들을 미국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이 더 급했다. 결국, 대서양이 더 급했던 유럽 공동체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던 한국과 타협을 택했고, 1920년이 끝나기 전에 양국 함대는 동시에 아라비아해에서 물러났다.
이는 유럽 공동체 또한 인도 내전에서 인도 제국의 입장을 지지하기로 했음을 뜻했고, 실제로도 이후 유럽 공동체-특히 프랑스는 지중해 함대를 동원해 서인도 이슬람국으로 향하는 오스만 튀르크의 수송선들을 적극적으로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개입을 방관할 경우 한국에 다시 아라비아해를 봉쇄할 명분이 생기게 되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스만 튀르크는 이러한 유럽 공동체의 개입을 두고서 "민족자결주의를 오염시키는 제국주의적 내정간섭"이라며 맹비난했으나, 그렇다고 이들에게 유럽 공동체와 전쟁을 할 힘이 있을 리도 만무했고 실제로도 유럽 공동체는 오스만 튀르크의 항의를 귓등으로 흘려넘겼다. 이마저도 튀르크를 최대한 배려한 것이었는데, 미국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쿠바 독립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유럽 공동체는 튀르크에게 아예 침묵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렇게 오스만 튀르크의 군사지원이 봉쇄된 동안 한국은 버마를 거쳐 켈커타 정부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말 글자 그대로 모든 물자를 지원했다. 한국은 군사고문단을 파견했고, 무기와 탄약을 지원했으며, 육군항공대를 파병하여 인도군의 반군 소탕 작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범 아주 조약기구는 인도 제국의 공식 입장에 따라 서인도 이슬람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군사개입은 반군토벌이라 정당화되었다.
그 반면 오스만 튀르크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서인도 이슬람국은 양귀비를 재배하면서 간신히 세력을 유지하는 지방 군벌 세력으로 전락했다. 여기에 인도 내전 때문에 발생한 난민들은 서인도와 아프간 일대의 치안을 급격히 악화시켰고, 이러한 난민 문제와 마약유통은 대영제국이 몰락한 이래로 간신히 명줄만 붙어있던 카자르 왕조 이란에 마지막 결정타가 되었다.
1921년 12월 6일, 레자 한 팔레비 준장이 이끄는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이 이란 제국의 수도 테헤란을 점령했다. 군사 정변을 주도한 레자 한은 스스로 군부대신이 되었고, 1923년 10월 다시 총리대신을 겸직하게 되었으며 이후 1925년 10월 31일 이란 국회가 제정 폐지를 결의함으로써 레자 한 팔레비 총리대신 겸 군부대신은 이란 공화국의 국부이자 종신통령이 되었다.
이란의 군사혁명은 서인도 이슬람국의 관에 대못을 박아주었다. 군사혁명을 주도한 레자 한 종신통령은 강경한 세속주의자였고, 당연히 그는 이슬람 민족을 만들고자 한 이슬람 파시즘을 혐오했다. 그리고 꼭 그런 개인적 가치관에 따른 호불호가 아니더라도, 당장 아프간을 거쳐 매일 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과 마약은 이란 공화국에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제1 당면과제였다.
난민 문제 자체가 원래 썩 달갑지 않은 문제이기도 했거니와, 전통적인 수니파-시아파 종파 간 악감정이 이들 난민과 현지 주민의 유혈사태를 부추기고 있었다. 거기에 이들 난민 중 적지 않은 수는 서인도 이슬람국의 패잔병이기도 했다. 이들 패잔병이 도적 떼로 변하고 이 도적들을 막는다는 핑계로 민병대가 우후죽순 불어나는 판국이었으니, 이제 막 군사혁명을 이룩한 이란 공화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사활이 걸린 문제였던 셈이다.
따라서, 군사혁명 이후 레자 한 종신통령이 가장 먼저 취한 정책은 서인도 이슬람국과의 국경을 봉쇄하고 인도 제국의 반군토벌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인도 내전에서 인도 제국과 협력하게 되면서 이란 공화국은 인도-보다 정확히는 그 이전 대영제국과의 불평등조약을 청산할 수 있었고, 인도와의 담판으로 외교권을 회복하면서 한국과 본격적인 국교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한국에도 절대 나쁜 일이 아니었다. 이란 공화국의 종신통령 레자 한 팔레비는 이란의 대표적인 친한파였다. 팔레비 종신통령은 한 사람의 초인이 절대권력을 이용해 위로부터의 혁명을 밀어붙인 끝에 열강으로 발돋움한 한국과 앞으로 절대권력을 앞세워 위로부터의 혁명을 진행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겹쳐보았다. 비록 제정과 공화정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팔레비가 종신통령직을 역임하게 된 시점에서 사실 별 차이도 없었다.
팔레비 종신통령은 이란의 근대화를 위하여 한국의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여겼기에, 군사혁명 이후 한국과의 우호 관계 구축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 또한 이란의 근대화를 주요정책으로 내세운 팔레비 종신통령을 호의적으로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이 무렵 아주 바깥까지 국력을 투사할 욕심을 품고 있던 한국에 이란의 접근은 둘도 없는 좋은 기회였다.
이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유사시에 한국의 손을 들어줄 잠재적 아군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건 절대 부정적인 사태가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오스만 튀르크가 이슬람 파시즘을 앞세우며 전 세계의 수니파 무슬림들을 현혹하려 들던 판국에 이란이 지역 강국으로 재차 발돋움하여 성공적으로 오스만 튀르크의 확장을 견제해줄 수 있다면, 한국은 이슬람 파시즘의 확산을 저지하는 데에 투자할 국력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과 이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면서, 한국과 이란은 본격적인 군사동맹 논의에 나섰다. 당시 한국에서는 김옥균 외무부 장관이 직접 테헤란을 방문하고 이란 공화국 또한 팔레비 종신통령이 장관을 마중하러 나오는 등 이러한 군사동맹 논의는 단지 시기와 세부적인 조항이 문제가 되었을 뿐 체결 자체는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러한 이란과 한국의 밀월 관계는 오스만 튀르크를 격노시켰다. 한국의 군사개입과 이에 따른 유럽의 압력에 굴복하면서 체면을 구긴 칼리파는 이미 그 권위와 능력을 의심받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무슬림들은 이교도들에게 속절없이 끌려다니는 칼리파의 모습에 실망감을 드러냈고, 이러한 실망은 잠시나마 소강세에 접어들었던 각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을 재발시켰다.
당장 제도 이스탄불에서 청년 튀르크당이 공공연히 활동을 재개하고, 이집트를 뒷배로 업은 아랍 민족주의 반군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마당에 오랜 앙숙 이란이 한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오스만 튀르크의 부드러운 뱃살을 찔러온다면, 오스만 튀르크로서는 이에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여기에 부활한 러시아까지 다시 남하하기 시작한다면, 그야말로 언제 죽을지만 손꼽아 기다리는 신세가 될 터였다.
이제 와 유럽의 도움을 기대해보려 해도, 유럽은 이미 쿠바 혁명을 계기로 시작된 미국과의 전쟁에 숨 돌릴 틈 하나 없었다. 카리브해에서 유럽 연합 함대를 궤멸시키고서 영국 해역을 봉쇄한 미국은 이 시점에서 이미 유럽 공동체에 항복을 종용하고 있었다. 육전이 자신 없던 미국과 육전만큼은 자신이 있던 유럽 탓에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서 전쟁이 늘어지고 있을 뿐, 이미 승패는 갈린 지 오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고 하나 끝내 이란 침공을 택한 압둘메지트 2세의 선택은 현명하다고 호평받기는 어려웠다. 1927년 수니파 형제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이란을 침공한 오스만 튀르크는 또다시 3함대와의 악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아라비아해를 봉쇄한 한국은 오스만 튀르크의 선제공격을 침략행위라 규정하며 즉시 철수하라고 요구했고, 오스만 튀르크가 한국의 요구를 거부하자 정식 선전포고문을 전달했다.
명분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전체주의 침략자들에 맞서서 자유의 형제들을 돕자.」 드물게도 고조가 직접 고안했다고 하는 이 표어는 관영선전이라는 야유를 받았던 이전과 달리 머지않아 아주 바깥으로 파병을 나가는 모든 아주 합종군의 표어가 되었다. 아주 합종군은 튀르크군이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이란군과 기 싸움을 하는 동안 아라비아반도에 상륙하여 아랍 민족주의 반군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아랍 반군의 성장은 오스만 튀르크를 내부로부터 서서히 무너뜨렸다.
한편으로, 합종군은 이들 반군의 협조를 위하여 그들을 아주 조약에 끌어들일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약속했다. 이는 이들 아랍 반군에게 괜한 경계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으나, 사실 이들을 초대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정식으로 가맹국이 되면 이들의 근대화를 위하여 적잖은 물자와 인력을 투자해야 했으니 말이다. 이미 성장한계에 부딪힌 지 오래였던 범 아주 조약기구의 현실을 생각했을 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날에야 유전이 발견되어 알라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고 추앙받지만, 이 당시만 해도 유전은커녕 낙타나 치고 살던 낙후된 지역을 식민지로 삼을 것도 아니라면 구태여 일부러 책임져줘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이슬람주의 세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수파에 속하던 세속주의 세력이 그냥 떠나가려는 아주 합종군의 바짓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전쟁은 합종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이란 공화국은 비록 많은 피를 흘렸으나 끝내 유프라테스강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메디나와 메카가 아랍인 민병대에게 포위되었으며 이들을 막아야 할 튀르크군은 막상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케말 장군을 위시한 청년 튀르크당은 이미 개전 이전부터 군사 정변을 계획하고 있었고, 전황이 기울기 시작하자 망설임 없이 이를 실행에 옮겼다.
결국, 이란-튀르크 전쟁은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이끄는 청년 튀르크당이 이스탄불을 장악하고 칼리파를 내쫓으면서 종전을 맞이했다. 이란과 터키의 국경은 유프라테스강을 기준으로 동과 서로 다시 그어졌고, 아라비아반도의 열국은 독립을 쟁취했다. 이런 와중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이집트 왕국이 신생 팔레스타인 술탄국을 무력합병하고 나아가 터키령 시리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란 공화국이 터키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단 흐지부지되었다.
비슷한 시기, 유럽과 미국의 전쟁도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뉴욕에서 이루어진 이 종전 협상에서 유럽-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랑스와 스페인은 미주 대륙 내 모든 식민영토를 포기하게 되었으며, 아일랜드 또한 독립을 쟁취하여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게 되면서 대서양은 완전히 미국의 호수로 다시 태어났다. 여전히 육전에 약하다는 약점을 노출하기는 했어도, 아무튼 승전은 승전이었고 미국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치욕적인 패전과 한국의 중동 침투라는 끔찍한 현실에 절망한 유럽은, 본격적으로 전체주의에 물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