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화 【후일담】청구의 가을바람
시작은 프랑스였다. 앞선 폴란드-러시아 전쟁에서도 체면이 깎이고 한국의 영향권이 중동까지 확대되는 것도 모자라 미국에 대서양 함대를 손실하고 아일랜드에 미 함대가 상시주둔하게 된 시점에서 프랑스는 더는 유럽 공동체의 맹주를 자칭할 자격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적의 대 육군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서, 프랑스는 세계를 3분 하는 3대 열강에서 일개 지역 열강으로 추락했다.
미국에 완패한 바로 같은 날 나폴레옹 4세는 패전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며 제위를 포기했다. 그날로 프랑스의 제정은 끝났고, 새로이 재건된 프랑스 제3 공화국은 당시까지도 생존하고 있던 루이 베르그송 대원수에게 대통령직을 제안했으나 대원수는 이를 돌려보냈다. 자신은 너무 늙고 병들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100세를 앞둔 고령의 나이였으니, 마냥 겸손함을 보였다고 하기도 뭣했다.
그리고 이것이 프랑스에는 가장 큰 불운이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에 적합한 이가 없었다는 현실이었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있는 이들이야 흔하디흔했으나, 막상 그만한 인망이나 세력을 갖춘 이가 없었다. 결국, 조기 대선에서 프랑스 제3 공화국은 나폴레옹 4세의 황태자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하기에 이른다. 결국, 황제가 종신대통령으로 내려왔을 뿐 기존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게 된 셈이다.
이는 나폴레옹 4세가 말년에 보여준 실정에 넌더리를 내고 있던 이들을 크게 분노시켰다. 프랑스의 국론은 친 보나파르트와 반 보나파르트로 나뉘어 매일 같이 다투었고,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등 세기말을 연상케 하는 혼란상을 보여주었다. 이 틈을 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세력을 키우고 반 보나파르트 운동을 주도하게 되자, 프랑스는 언제 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혼란은 친 보나파르트 연정이 국민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일단 수습되었지만, 이 연정 체제도 그렇게 이상적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친 보나파르트 연정이라고 하지만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 중에는 자유주의자도 있었고, 군국주의자도 있었으며, 부르봉 오를레앙 파와 구체제 옹호자들도 있었다.
이들의 구심점은 종신통령 나폴레옹 5세라기보다는 반공이라는 기치였기에, 당연히 친 보나파르트 연정은 반공 정책을 제외한 모든 사안에서 내분을 거듭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프랑스의 외교적 영향력을 매일 같이 야금야금 갉아먹었고, 프랑스의 식민통치력마저 크게 약화했다. 프랑스가 나날이 약화하는 틈을 타 독일은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었고, 이는 프랑스가 독일 패권의 부속품으로 전락했음을 뜻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스페인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스페인은 미국에 완패하고 쿠바를 상실한 그 즉시 정변이 발발하여 그날로 내전을 시작했다. 본디 의회가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선언한 시점에서 끝났어야 할 정변은 같은 왕가를 공유하고 있던 이탈리아 왕국이 개입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만일 이탈리아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스페인의 혼란은 공화국 선포로 끝났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신은 스페인의 편이 아니었다.
이들의 가장 큰 불운은 이탈리아의 힘이 어중간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탈리아가 더욱 강했더라면 스페인 공화파가 초전박살 나면서 조기종전을 이룩했을 것이고, 반대로 이탈리아가 더욱 약했더라면 이탈리아가 초전박살 나면서 스페인 공화국의 영웅적 승리로 마무리되었을 테지만 이탈리아는 어중간하게 강했다. 스페인 공화파는 이탈리아의 후원을 받는 왕당파의 공세를 견뎌내지 못했지만, 이탈리아 또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스페인은 기나긴 내전을 겪으며 쑥대밭이 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이 스페인을 사실상 전면 침공하면서 시작된 내전은 스페인 왕정이 재건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내전 내내 이탈리아 왕국에서 전적인 후원을 받은 스페인 왕실은 이탈리아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는 이탈리아의 뒤를 이어 파시즘에 물든 유럽 국가가 또 하나 늘었음을 뜻했다.
아니 사실, 이 당시 유럽의 주요국 중 파시즘에 물들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건 독일 하나뿐이었다.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브리튼 자유국과 프랑스는 패전 이후 복수를 외치며 매일 같이 국론이 극단화되어가고 있었으며 스페인은 이탈리아의 개입으로 파시즘 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그 덕택에 역설적으로 유럽 공동체는 이전에 없을 만큼 단단히 뭉치게 되었으나, 이를 호평하기에는 이미 너무 사태가 악화한 뒤였다.
그리고 사실, 독일 또한 이웃 나라들의 정치적 혼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파시즘이 사실상 유럽 대륙의 주류 정치이념으로 떠오르면서, 유럽 각지에 존재하는 파시즘 정당끼리의 협력관계 또한 매일 같이 강성해지고 있던 까닭이다. 거기에, 새롭게 맹주가 된 유럽 공동체의 주요 구성국들 대부분이 파시즘이거나 파시즘과 다를 바 없는 극단적 정치 풍조를 지니게 된 시점에서 그들의 맹주가 된 독일로서는 이들의 바람을 정면으로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근묵자흑이라고 했던가. 이 시기의 독일이 바로 그러했다. 그들에게 가장 큰 불운이 있다면 역시 그들이 한창 전체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던 유럽 대륙에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유럽 패권을 손에 거머쥐면서 당장 그들이 원하던 모든 것을 손에 거머쥔 독일 제국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손에 넣은 바로 그 유럽 때문에 사지로 조금씩 내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장 3차대전이 발발하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프랑스가 미국에 완패를 겪고 몰락하면서 반대급부로 독일의 유럽 패권이 공고해진 덕택이었다. 바로 이 탓에 독일 또한 나머지 유럽의 의견을 무시하고서 멋대로 유럽 공동체를 이끌 수는 없었지만, 반대로 유럽 공동체 또한 독일의 의견을 무시하고서 날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지만, 독일로서는 3차대전이 그리 절실하지 않았다. 나날이 강성해져 가는 러시아가 다소 위협적이긴 했으나 프로이센, 폴란드라는 방패막이를 둔 독일로서는 아직 직접 국경을 접한 것도 아닌 러시아를 당장에 손봐둬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거기에 프랑스가 미국에 패배한 이래 나날이 쇠락하고, 이탈리아는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면서 보여준 악랄한 행보로 유럽의 외톨이가 되어버린 까닭에 유럽 패권은 반석에 오른 상태였다.
전쟁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거나 반드시 파괴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법인데, 당시 독일에는 그런 절실한 목표가 없었다. 오히려, 이들로서는 당분간 충돌을 피하면서 유럽 패권을 반석에 오르도록 하는 게 보다 이상적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유럽은 속으로 끝없이 곪아가면서도 당분간 큰 사고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독일의 속셈이 그렇다고 다른 나라들이 독일의 속셈을 따라줄 필요는 없다는 점이었으나, 이 부분에서 독일에는 운이 따라주었다. 우선 그들의 가장 큰 적이었던 러시아가 나날이 강성해지는 독일의 모습에 먼저 겁을 집어먹고서 몸을 한껏 움츠렸고, 대서양 패권을 거머쥔 미국은 이 이상 유럽과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당시 세력권만 이야기한다면 세계 제1위의 패권세력은 다름 아닌 범 아주 조약기구였다. 세상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를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미국이겠지만, 나라 하나가 아니라 세력 전체의 덩치와 세계 정치에 끼치는 파급력을 고려한다면 범 아주 조약기구를 따라올 세력이 없던 것이다. 당연히, 이 시점에서 세계패권을 위하여 미국이 꺾어야 할 적 1순위는 범 아주 조약기구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를 위해서는 미국은 독일과 협력관계를 구축하거나 최소한 불가침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독일과 미국은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었다. 독일은 미국에 대항한 복수전을 외치는 프랑스와 브리튼의 보복여론을 억제했고, 미국은 독일에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그들의 유럽 패권이 더욱 공고해질 수 있도록 도왔다. 고조가 가장 두려워하던 미주-유럽 협력이 시작된 것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이는 한국에 전혀 긍정적인 전개라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하는 전개였다. 이렇게 유럽이 독일 일강 구도로 단일화되고, 미국이 이를 도우면서 유럽이 다시금 아주에 맞설 수 있도록 돕는다면 결국 그 끝은 유럽과 아주의 정면충돌-곧 3차대전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한국은 그간 보여준 적극적인 개입노선이 무색하게도 아무런 대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부정할 여지 없는 한국 외교가 최악의 실책이었으나, 막상 학계에서 이를 두고 외교가를 비난하는 여론은 드물다. 가장 맹렬하게 외교가를 비판하는 학자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쉽다"라고 말할 뿐이고, 대부분은 "운이 나빴다"라고 한숨을 내쉴 뿐이다.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악재였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어째서 이 최악의 실수가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를 받고 있는가? 외교가의 로비 탓이라고 의심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아마 내막을 안다면, 독자들 또한 이건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절로 끄덕이리라고 필자는 믿는다.
해답은 간단하다.
바로 이 무렵, 태상황으로 물러나 있던 고조가 천수를 다하여 하늘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도 살았지. 오래도 살았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필이면 지금인가. 상제께서도 참으로 짓궂으시구나."
고조 자신도 이렇게 한탄했을 만큼, 한국에는 시기가 좋지 못했다. 아니, 사실 고조의 천붕은 언제 일어났어도 한국에는 매우 좋지 못한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전장에서 크게 다쳐 몸져누웠을지언정 생전 이렇다 할 병치레 하나 없이 살아온 고조가 생전 처음으로 홍역을 앓다 몸져누운 그날부로, 한국 정부는 무력화되었다.
이미 태상황으로 물러나 있던 고조가 일하지 못하게 되니 행정업무가 멈춘 것이 아니라, 모든 신료의 관심이 고조의 안부에 쏠려 누구 하나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신료들의 게으름을 탓하기에는, 애당초 이 당시 아주 대륙 전역이 고조의 병치레에 모든 관심이 쏠려있었다. 이 당시 아주 대륙에 고조의 천붕은 단지 하나의 시대가 끝났다를 의미하지 않았다.
고조는 그 시대를 만들어낸 오직 한 사람뿐인 아주의 백마 탄 초인이었다. 고조가 태상황으로 물러나기 이전부터 무속인들은 아직 죽지도 않은 고조를 신으로 모셨고, 전국의 사찰들은 현세에 내린 보살이라며 칭송했다. 고조는 아주의 상징이었고, 공통점이라고는 불교 전래와 인종을 제외하면 없다시피 한 범 아주 조약기구가 그런대로 하나로서 유지되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 고조의 죽음은 당대에 그 누구도 미처 상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충격이라는 표현을 비유가 아닌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당시 고조의 죽음이 당대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정부의 태도에서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고조가 세상을 떠나는 그 즉시 예정되어있던 한국과 범 아주 조약기구의 혼란상이었다.
고조는 대한제국에 있어서 쐐기 같은 존재였고, 범 아주 조약기구에는 주춧돌 같은 존재였다. 이들을 집이라고 가정한다면 고조가 사라지면 한국에는 단단한 동아줄이나 강력한 접착제가 필요했고, 범 아주 조약기구는 아예 석회를 들이부어서라도 어떻게든 지반을 굳혀야 했다. 그리고 어느 쪽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에서 독일과 미국이 유착관계를 형성하는 동안 꼼작도 못 하고 집안 단속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슬퍼하지들 말아라.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이것이 나의 끝이 아닌 줄 알고 있는데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
그러나, 막상 고조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의연했다고 한다. 실록을 비롯하여 당대의 주요 사료들을 교차 검증해봐도 단지 겉으로 의연하게 보이려 노력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이를 근거해서 추측하건대, 고조는 그 나름대로 확고한 사후관을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도 고조는 그의 병환을 우려하는 고 황후에게 "내 살아서 덕을 쌓았으니 다음 생에도 사람으로 태어날 것인데, 무엇을 그리도 두려워하시오?"라며 웃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두고 고태후의 불교 신앙 탓에 불가에서 말하는 환생에 빗대어 위로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으나, 이후 선종과의 대담에서도 "내 죽어서 사람이 될지 벼룩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너를 잊지 않겠다 약속하마"라고 발언하였던 걸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 보인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죽음을 직감한 것인지 홍역으로 앓아누운 고조는 늘 가까이하던 명동성당을 찾는 대신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였다고 한다. 이를 볼 때, 고조가 처음부터 불교 신앙을 지니고 있었는지 아니면 나이를 먹고서 불교적 사후관에 매료된 것인지는 몰라도 이 시기 고조가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을 믿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다만, 그렇다고 이 시기 고조가 불교에 매료되어 있었던 건 아닌 듯 보인다. 실제로, 달라이 라마를 대면한 고조의 첫 물음은 사뭇 엉뚱한 질문이었다.
"그래, 이거 하나만 여쭙시다. 난 뭐 하는 놈인 거요?"
오늘날까지도 이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학계에서도 끝없이 의견이 갈리고 있다. 만일 환생을 믿고 있었다면 사후 자신이 무엇으로 태어날지를 물었을 것이고, 불교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면 달라이 라마에게 공경을 보였을 터이며, 달라이 라마를 욕보이려 했다면 달라이 라마의 대답에 말꼬리를 잡았을 텐데, 고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조의 질문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자아 성찰에 가까웠다. 혹은, 일부러 자신의 업적들을 달라이 라마의 입으로 설명하게 하면서 우쭐거릴 셈이었던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고조가 일부러 그렇게 하면서까지 자신을 과시할 인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더더욱 의아한 것은 이때 달라이 라마의 대답이다.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어떤 의도에서 나온 대답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고조는 이 대답에 크게 만족했던 듯 피 가래를 연거푸 뱉으면서도 궁이 떠나가도록 웃고 또 웃었다고 한다. 그 대답에 얼마나 만족했던지, 고조는 병환이 악화한 탓에 이 짧은 문답을 끝으로 헤어져야 했음에도 달라이 라마의 귀향길을 황실의 위병들이 직접 호위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고조의 마지막 대외활동이었다.
"상은 삼 일로 끝내도록 하라. 상복도 그 뒤에는 치워버리거라. 비문에는 아무것도 적지 마라. 내가 무엇을 하였는지 온 천하가 알 것인데 무엇 하러 내 치적을 후대에 자랑한다는 말이더냐? 비문에 적을 건 다만 내 이름 두 자면 그걸로 충분하니라."
서력 1928년 10월 3일 오전 8시 43분경.
청구의 가을바람을 맞으며, 대한의 백마 탄 초인이 하늘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