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521화 (521/530)

521화 【후일담】초인의 빈자리

인간의 가치는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며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숫자로 결정된다고 그랬던가.

만일 이 낡은 격언이 사실이라면, 고조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고조가 세상을 등진 날 온 아주가, 나아가 세계가 한순간이나마 정지했으니 말이다. 고조의 천붕에 비통해하건, 고조의 천붕에 기뻐하건, 고조의 천붕에 시원 섭섭해하건 당대의 모든 이들이 이제 세상은 두 번 다시 고조의 생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한 가지 사실에만큼은 크게 공감했다. 세계가 송두리째 바뀌고 있었다.

그 사실에 전율하지 않았을 이는 당대에 단 한 사람도 없었으리라. 서역이 슬그머니 기어 올라오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유감을 표하는 동안, 온 아주가 눈물에 잠겼다. 이는 단지 비유가 아니었다. 땅을 내리치며 통곡을 하는 이들은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었고, 꺽 꺽 소리 높여 울다가 목이 상하여 언어장애인이 되거나 천붕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숱하게 나왔다.

아주에 있어서 고조란 그런 존재였다. 장장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군림해온 고조는 하나의 시대를 상징하기에 더없이 충분했다. 당대인 중 대다수가 고조가 아주를 통일한 뒤에야 비로소 어미 뱃속에서 나온 신세대였고, 고조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 적도, 고조가 떠난 세상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던 이들은 마치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 울었다.

오죽하면 처음에는 그 충심이 갸륵하다며 포상을 내리던 조정에서도 나날이 늘어나는 충의지사에 차마 더는 참지 못하고서 이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그만 생업에 복귀하라며 엄명을 내렸을까. 그조차도 부족하여 헌병대가 동원된 뒤에야 비로소 추모행렬은 끝이 났다. 물론, 그것이 국장의 끝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장례는 크게 세 곳에서 진행되었다. 유품을 싣고서 북경에서 한 번, 옥체를 싣고서 한성에서 한 번, 옷가지를 싣고서 봉천에서 한 번. 하지만 그조차도 없이 빈관을 싣고서 치러진 장례들도 수없이 많았다. 우스갯소리로 고조께서 되살아나시려거든 우선 저 수천수만 개의 관 중에서 진짜 관부터 찾아야 하실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장례가 곳곳에서 치러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교통이었다. 고조는 세상을 등지기 전 장례는 사흘이면 충분하다고 말했으나, 이는 고조의 천붕을 참배하러 얼마나 많은 참배객이 몰릴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내려진 황명이었다. 당장 한성에서만 사흘간 800만 명의 순례객이 오가던 판국이었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우선 장례를 각지에서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한성에 몰릴 참배객을 어떻게든 분산시켜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시간 내에 한성까지 올 수 없는 참배객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시골에서는 끝내 고조의 장례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비관하여 목숨을 끊는 이들이 나오기까지 했다고 하니, 당대인들이 어떤 심정으로 장례를 참배하였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오늘날 서력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20세기 초는 그런 시대였다. 오늘날에는 고조를 영웅이자 국부로서 숭상하기는 해도 고조를 신앙하는 이들은 드물지만, 20세기 초는 달랐다. 고조를 영웅이나 국부처럼 우리와 같은 인간의 범주로 바라보는 시선부터가 드물었다. 당대에 고조는 선신이건 악신이건 아무튼 신이나 신선의 범주로 받아들여졌다.

아직 오늘날처럼 합리적 사고관이 널리 퍼져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여전히 변경에는 글 한 자 읽지 못하고서 다만 농사일에만 몰두하는 순박한 농민들이 드물게나마 남아있던 시대였기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조 스스로는 항상 직업이 황제인 한국 국민 중 한 사람일 뿐이라 자칭했지만, 거기에 동감하는 이들은 한성 시민처럼 고등교육의 혜택을 톡톡히 본 이들 정도였다.

그렇게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조차 황제는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없다며 절대주의에 흠뻑 젖기도 했으니, 이처럼 광기에 가까운 추모 분위기는 설령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으려 했어도 막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대의 정부는 이처럼 광적인 추모 분위기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자결하거나 언어장애인이 되는 극단적인 경우조차 숫자가 너무 늘어서 사회적 분위기가 된 다음에야 이를 멈추려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오늘날 21세기의 가치관을 근거로 20세기 초반을 해석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인간이 보기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는 실책이다. 이러한 광적인 추모 분위기가 후일 한국 파시즘 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되기도 했기에 더더욱 그렇다. 만일 한국이 서역의 전체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한국 또한 이러한 전체주의적 사상에 휩쓸릴지도 몰랐을 일이다.

이것이 단지 고조의 죽음을 비탄하여 한국 정부 또한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기에 이러한 실책을 저질렀다면 필자 또한 이를 두고서 뭐라 언급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이 시기 한국 정부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고조 사후의 추모 분위기를 부추겼다. 고조가 세상을 등진 이후에도 고조의 권위를 빌어 아주를 하나로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너무나, 너무나 근시안적인 판단이었다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먼저 분명하게 말해둬야 할 사실은, 범 아주 조약기구가 흔히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이 시대 사람들의 낭만과 순정이 넘쳐나는 꿈과 희망의 결정체 같은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우선 가장 먼저 흔한 대중적 오해를 고쳐보자면, 범 아주 조약기구는 처음부터 각국이 자발적으로 아주대륙의 공동방위라는 공동목표를 위하여 뭉친 게 아니었다.

분명하게 말하건대, 범 아주 조약기구는 오히려 대한제국- 보다 정확히는 고조가 군사적 위업을 토대로 각국에 가맹을 강요하여 만들어진 대한제국의 패권투사용 국제기구였다. 범 아주 조약기구는 고조가 만들고 또 고조가 혼자 힘으로 유지하던 국제기구였기에, 고조의 부재는 곧 지도력의 부재를 뜻했다.

국내도 이런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대한제국은 거의 전적으로 고조 덕에 건국되어 고조 덕에 패권을 차지하고 고조 덕에 패권을 유지하는 나라였고 대한제국의 권력 기관들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국민도, 정부도 아닌 고조였다. 고조가 세상을 떠난다는 건, 한국의 권력 기관들을 통제할 중앙 사령탑을 잃는다는 것과 같았다. 사령탑을 잃은 그들이 어떤 혼란을 겪게 될지는 누가 생각해도 자명했다.

당연히 대한제국 정부라고 이를 몰랐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조가 태상황으로 물러난 이래로 당대 황제- 대한 선종 이원철과 내각은 고조의 천붕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고조 본인이 "늙은 몸"이라는 1인칭을 입에 달고 다니기 시작했으니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할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에는 고조를 대체할 무언가가 없었다. 고조 생전에 이러한 혼란상에 대비하여 많은 안배를 해두었음에도 말이다. 막상 고조 천붕이 닥치자, 고조의 안배는 모래성 위의 제국에 일단 석회 반죽을 부은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석회 반죽이 미처 굳기도 전에 제국이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단지 비관적 미래구상이 아닌 당장 코앞까지 닥쳐온 현실이었다.

이미 수십, 수백 차례 예고된 바였음에도 고조의 천붕 이후 당대의 명사들이 입을 모아 "고조가 떠난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라고 말할 것도 과장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고조도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게 될 운명이었고, 고조가 부재한 한국은 물론 여전히 아주 제일의 열강이었으나 아주의 구세주가 될 수는 없었다. 힘은 고스란히 남았으되 상징성을 잃은 것이다.

이러한 상징성의 부재는 결국 후일 역사가 증명하듯 한국을 향한 제후국들의 끝없는 도전과 견제, 그리고 한국의 제후국들을 향한 응징과 이간책으로 이어졌다. 물론 결과적으로 한국은 이 모든 위기를 이겨내고서 후일 대타협이라고 불리는 1928년 청도조약에서 맹주와 제후의 의무와 권리를 재차 명시하게 되지만 그건 결과론에 지나지 않는다. 고조의 천붕이 제국 선포 이래 한국이 직면한 최대의 난관이자 국가적 위기였음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마 선종은 직감적으로 보위에 오름과 동시에, 이 모든 난리를 수습할 역사적 사명을 가진 것을 깨달았으리라.

오늘날 공개된 선종의 일기에는 그의 이 무렵 심경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

"태상황께서는 늙은 몸을 사리실 생각이 전혀 없으시고, 내각은 여전히 날 시험하려 들고, 제후들은 내 처소에 수줍게 비밀편지를 전할 날만 기다리고, 국민은 그저 날 두 번째 아바마마로 밖에는 보지 않는구나. 만인지상의 황제가 대관절 언제부터 이리도 고된 일이 되었단 말인가?"

실제로도 이 무렵 고조는 늙은 몸을 이끌고서 틈만 나면 비행을 즐겼으니 선종의 시선에서 보면 글자 그대로 명을 재촉하는 거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비상 탈출용 낙하산이 보편화한 시대도 아니라 기관이 고장이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꼼짝없이 같이 추락하는 수밖에 없는 시대였으니 더더욱 그랬으리라.

결국, 선종은 가장 먼저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고조를 대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현실을 말이다. 그가 고조에 버금가는 권위를 세우려면 그의 생전에 한국을 세계의 주인으로 만들어 놓는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럼 그의 정권과 맹주의 지위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고조 사후에도 고조의 권위를 유지할 수단을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단지 고조의 적장자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괜히 고조의 적장자로서 고조가 평생 치장해온 초인이라는 이름의 옷으로 자신을 치장해봐야 처음부터 맞지 않는 옷이요, 고조의 적장자인데 왜 이것밖에는 못 하느냐는 실망이 번지는 순간 한순간에 무너질 모래 위의 성이었다.

선종은 그보다 현실적이고, 반영구적인 선전을 택했다. 바로 고조께서는 속세를 떠나신 뒤에도 여전히 우리 대한을 지켜주고 있다는 오래된 선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선종이 제위에 올라 가장 먼저 계획한 국가사업은 교육개혁과 더불어 고조가 묻힐 황릉을 만드는 일이었다.

"날 방부제로 썩지 않는 미라를 만들어 죽어서까지 관광객들 앞에 전시할 작정이더냐?"

"예?"

이는 당연하게도 첫 삽을 뜨기 전부터 고조의 반대에 직면했다. 주민등록번호 발언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시피, 자신을 새기의 영웅호걸이라 자부하면서도 막상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으로서 대우해주기를 누구보다 바랐던 모순된 소망을 지닌 고조였기에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고조는 생전 현충원에 매장되기를 늘 바랐다고 한다.

물론, 그런 고조의 개인적 바람과는 별개로 그의 발언에서부터 엿볼 수 있는 그의 엉뚱한 상상력에는 쓴웃음을 감출 수 없지만 말이다. 세기말의 혁명, 혹은 민란 이후에도 여전히 전통적인 유교적 윤리관이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황제의 옥체를 방부제로 썩지 않게 만들려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당장에 온갖 소리가 나올 텐데 아직 선말한초의 거 유들이 남아있는 시대에 미라도 모자라 대중들이 보는 앞에다 전시라니,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선종 또한 고조의 놀라운 상상력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이 부자의 대담을 기록한 최호길이라는 사관은 "시체가 관을 열고 제자리에서 기립한 걸 본 듯한 용안"이라고 묘사했다. 이처럼 재치있고 다소 불경스러운 비유는 고조 실록 말기와 선종 실록 내내 꾸준히 관측되는데, 이는 당시 황궁이 그만큼 태평성대의 낭만주의와 자유주의에 흠뻑 취해있었음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료 중 하나로 여겨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황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황궁에서 사관들은 일부일지언정 전체는 아니다. 즉, 자유주의적 탈권위주의를 보여주는 건 사관들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바마마, 소자가 어찌 그런 불효막심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소자는 단지 아바마마께서 보여주신 위업에 걸맞은 묘소를 마련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꾸몄는지 내가 모를 것 같으냐? 그러나 그럼 내 생전에 일부러 묘소를 마련하려는 이유는 또 무엇이더냐? 결국, 네 권력을 위해 이 늙은 몸의 이름을 빌려 쓰고 싶다는 뻔한 발상이렷다!"

"···예에, 그렇습니다! 좀 빌려주시지요! 빌려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자자손손 제후들과 찾아가 제삿밥도 매년 두둑이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회맹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어디가 덧납니까!"

"푸하핫! 네놈이 기어이 이 늙은 몸을 죽어서까지 이용하겠다고 나섰구나!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지. 머리 검은 짐승은 집안에 들이지 말라더니, 이게 딱 그 꼴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느냐!"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제가 저 한 사람 편해 보자고 이러겠습니까? 아바마마께서 이조차 협력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도대체 어찌하면 좋습니까!"

"어찌하면 좋겠냐고? 뭘 당연한 걸 묻고 있느냐? 그야 당연히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래, 이 늙은 아비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드는 걸 보면 배짱 하나는 천하제일이렷다! 그 배짱을 살려서 어디 열심히 세 치 혀를 놀려 구슬려 보지 그러느냐?"

"저는 아바마마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바마마께서도 해내지 못하신 과업을 제게 요구하지 마십시오! 아바마마께서도 저들을 말로 구슬린 게 아니라 전쟁에서 이겨 그 공으로 찍어 누르시지 않았습니까!"

"어허, 이놈이 그래도!"

"전 아바마마께서 저지르신 일들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바쁘단 말입니다!"

이상은 선종 실록에서 단 한 자의 왜곡도 없이 있는 그대로 옮긴 태상황과 현직 황제의 대담이다. 한자어를 잘못 해석한 거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선종 실록부터는 동음이의어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언문으로 기록되어있는지라 그럴 일은 없다. 보다시피, 탈권위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대화를 근거로 혹시 고조와 선종의 부자 관계가 극악했던 것이 아닌가? 의혹을 제기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실록이 기록하기를 이 대담 중 고조는 이렇다 할 폭력 한 번 휘두르지 않고서 언쟁만을 이어갔으며, 끝내 선종의 뜻에 따른 뒤에는 홀로 한탄했을지언정 이 일을 이유로 선종을 미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고조는 이후 관을 안치하고 남은 부지는 마땅한 묘터가 없는 백성을 위한 국립묘지로 사용하라는 유훈을 남겨 어디까지나 자신은 국민 중 한 사람일 뿐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물론 그 유훈대로 고조를 단지 국민 중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이는 오늘날까지도 드물지만 말이다. 좌우지간 이렇게 고조를 모실 황릉이 마련되면서, 대한제국은 고조 사후에도 여전히 고조의 권위를 필요할 때마다 빌려 올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조차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선종은 아마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 낙관한 것 같지만, 고조 사후의 혼란상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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