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522화 (522/530)

522화 【후일담】가짜 초인들의 시대

고조 천붕 이후, 2대 황제 선종이 내세운 원칙은 간단하게 줄여서 말하자면 「양보에 인색하지 말자」라는 것이었다. 선종이 직접 이러한 포고령을 내리거나 공식 석상에서 이러한 연설을 한 바는 없었지만, 고조 천붕 이후 선종은 일관적으로 양보에 양보를 거듭했다.

시작은 고조의 국장을 마무리 짓던 비정기 회맹이었다. 사전 고지도 없이 급습이나 다름없이 시작된 대타협은 그 시기와 방식 탓에 오해하기 쉽지만, 한국의 전면적인 양보와 후퇴로 정의되었다. 우선 맹주로서의 차등의결권이 소멸하여 모든 회원국이 같은 권한을 지니게 되었고, 매회맹 마다 가맹국의 국가원수가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도 사라졌다.

한때 한국조차 무시할 수 없었던 실농기구를 비롯한 조약기구 내 국제기구들의 권한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제 더는 각 국제기구가 각국의 의사를 무시하고서 회맹에서 의결한 바를 강요할 수 없었다. 합종군 또한 그간의 수직적인 구조에서 탈피하여 유사시 회맹 전체의 안보 보다 각국의 안보가 더욱 우선시 될 수 있음을 공인했고, 그간 동일시되던 한국군과 합종군의 지휘도 구분되었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양보가 있었으나, 이 중에서 가장 큰 건 바로 가맹국의 국가원수가 의무적으로 정기참가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에야 각국의 국가원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중대사를 논의하는 게 드문 일도 아니지만, 이때는 아니었다. 애당초 이때에는 오늘날처럼 여객기 사업이 활발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아주는 넓었다. 당연히, 각국의 국가원수가 정기회맹에 참가하려면 못해도 1개월에서 2개월 이상 여유를 잡고서 준비해야만 했다. 하다못해 이 회맹도 1년에 1번뿐이라면 조금 번거로울 따름이었겠지만, 고조 생전에는 온갖 이유로 비정기 회맹이 열리곤 했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아주의 왕이라면 1년의 절반은 뱃놀이하면서 보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조의 생전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였겠지만, 오늘날처럼 여객기를 타고서 하루 안에 지구 1바퀴를 돌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이제 막 교통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던 시대에 이러한 회맹이 각국의 국가원수들에게 더없이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하여 한마디도 불평하지 못했다.

오히려, 고조가 멋대로 천하의 중대사를 모조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라도 불러들여서 천하의 중대사를 논할 기회를 준다는 사실 자체에 감지덕지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만큼 생전 고조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그의 권세는 어렵지 않게 하늘을 나는 봉황조차 떨굴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한 나라의 국가원수를 짧아도 1분기, 길면 반년간을 붙잡아둔다는 폭거가 가능했던 것이다.

선종은 태상황이 떠나고 홀로 남게 되자 가장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다. 고조 집권 당시부터 이미 비정기 회맹이 조금씩 자취를 감추고 대리인이 참석해도 문제 삼지 않기는 했으나, 거기에서 더 나아가 아예 회맹에 참가해야 할 의무를 없앤 건 절대 작지 않았다. 한국은 더는 가맹국들에 여기로 와라, 저리로 가라 하지 않겠다는 걸 공표해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대신 각국의 외교 실무진이 상시 집결해 있는 사무 이사회에 더욱 막중한 권한을 부여하고, 이제는 4년 주기로 열리게 된 체전에는 반드시 각국 정상이 참여하도록 하여 민간교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으나 그 파급력은 절대 작지 않았다. 제아무리 외교 실무진과 민간교류에 큰 의미를 부여해도 매년, 그것도 비정기적으로 국가원수가 반드시 참가해야 하던 것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당대에 그렇게 악용된 사례는 없으나, 이는 어떤 의미에서 비공인 된 인질제도나 다름없었다. 일단 회맹이 열리면 해당 지역은 한국군이 주축이 된 합종군이 경비를 서고, 대개 회맹이 열리는 도시들도 한국이었으니 만일 한국과 관계가 틀어진 상태에서 회맹에 참가한다면 제 발로 적진으로 걸어 들어가는 격이다. 괜히 당대 일본에서 참근교대제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던 게 아니었다.

선종은 그 모든 걸 포기했다. 물론 그와 고조의 객관적인 역량 차이와 권위를 생각해보면 늦건 빠르건 어쩔 수 없이 악화할 수밖에 없는 제도였으나, 제 손으로 이를 놓아버린 것이다. 이는 확실하게 지킬 수 있을 것만 지키겠다는 선종의 각오가 표출된 결과였으나, 당대인들에게는 그리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선종이 고조의 후계자였다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고조가 생전 큰 인기를 누렸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보여준 황제라는 지위에 오르기까지의 파천황적인 행보와, 그에 대비되는 영리하고 세련된 통치술이었다. 그리고 선종 본인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많은 이들이 선종에게서 고조를 찾았다. 조선왕사에서 보기 드물게도 정비가 낳은 적장자라는 막강한 배경까지 있었으니 이런 기대는 어쩌면 당연했다.

그리고 선종은 고조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독무대가 되면서 만인의 기대가 모인 바로 그 순간에 파천황적인 행보도, 영리하고 세련된 통치술도 아닌 파격적인 양보를 선택했다. 고조를 위한 황릉을 세워 고조를 향한 사람들의 향수를 극대화하면서 말이다. 선종은 독무대에 올라 가장 먼저 자신은 고조와 같은 초인이 아니라고 선언한 셈이었다.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 경우에는 부정적인 반응이 더욱 컸다. 분명 이는 당대의 아주에 가장 필요한 조치 중 하나였고, 범 아주 조약기구가 오늘날까지도 존속할 수 있도록 안정성을 더한 조치였다고 뒤늦게나마 재평가받기는 했으나 당대에는 끔찍한 대중적 실망과 고조를 향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선종에게는 억울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이 당시 대중들이 문제시 삼은 건 바로 "황제가 너무 비굴하다"라는 점이었다. 고조 생전이라고 이런 양보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고조 생전에는 이미 압도적인 지위를 선점한 상태에서 일말의 자비를 발휘하듯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구도였다면 대타협은 고조 천붕 직후라는 상황을 이용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잠재우고 기습적으로 일을 처리한 주제에 그 협상 결과도 비굴하기 그지없는 양보와 양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반응은 절대주의와 민족주의로 대표되는 한국의 우파 진영에서 두드러졌다. 고조 생전의 군사적 성공과 외교적 성공에 도취해있던 이들에게 선종의 행동은 마치 제 손으로 고조의 업적을 팔아치우는 패륜 겸 매국 행위로 받아들여진 까닭이다. 꼭 이들이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맹주의 특권 중 상당 부분을 포기한 건 좋은 소리를 듣기 어려웠다.

머리로는 선종이 옳다는 걸 아는 이들조차 주변 여론이 무서워서라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대중에게 고조 생전에는 고조의 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선종의 첫인상은 무력하고, 무능하고 비굴하다는 최악의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대중적 인식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은 듯 보인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익명의 독자 또한 흔한 대중적 인식처럼 선종을 한국 역사상 최악의 황제라 저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류 학계의 평가는 그 정반대라는 사실을 들으면 아마 매우 놀랄 것이다. 대타협은 단지 일방적인 양보가 아니라, 기습공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계에서 주로 평가되는 대타협에서 선종이 거둔 최고의 외교적 성과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가맹국 간 거래 시에는 반드시 원화를 사용하도록 강요한 것이고, 두 번째는 각국의 작전권을 존중하도록 하여 그 거대한 덩치 탓에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위기 대처 시의 관료주의적 둔화 현상을 예방한 것이다.

우선 첫째, 가맹국 간 거래 시에 반드시 원화를 사용하도록 할 수 있었던 건 당연히 그 이전부터 가맹국 간 거래 시에 원화가 관례로 사용되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관례적인 사례였고, 실제로 원화를 사용하지 않고서 이루어지는 거래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대타협 이후 가맹국 간의 거래 시에는 반드시 원화를 사용하게 되자, 이러한 사례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각국은 무역 거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항상 일정량 이상의 원화를 보유하고 있어야만 했다. 이는 한국 국내의 원화 공급을 낮추어 선종을 향한 대중적 인식이 더욱 악화하는 데 일조하였으나, 이로써 가맹국들은 한국의 경제개입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할 마지막 울타리마저 잃어버렸다. 국고에 몇 kg의 금이 들어있는가가 아니라 1원당 얼마인가가 각국 통화의 가치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종은 눈에 보이는 족쇄들을 스스로 포기한 대신 보이지 않는 족쇄를 하나 더 추가한 셈이었다. 또, 맹주로서의 특권을 크게 줄였을지언정 맹주라는 지위 그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그 권한이 많이 줄어든 국제기구들의 본부도 여전히 한국에 있었다. 선종은 한국이 외교적 집중공세를 받게 될 고조 천붕 직후의 혼란기에 대처하기 위해 먼저 일방적인 양보를 퍼부어 가맹국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이다.

문제는 몇 번이고 이야기된 것이지만, 이러한 업적은 고조 천붕 후 한국의 양보 그 자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는 걸 사전에 숙지하고 또 선종이 눈에 보이는 족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로 대체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는가를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가맹국들의 양보 요구가 쏟아지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양보를 퍼붓고서 논쟁의 여지를 없애버린 선종의 예방조치는 분명 후대에는 고평가될 수 있을지 몰라도, 당대에는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결국, 선종은 타고난 외교적 재능을 살려 고조 천붕 이후 범 아주 조약기구의 동요를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끔찍한 위신 하락과 이에 따른 절대주의자들과의 전면적 충돌로 대표되는 국내의 혼란에 휩쓸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절대주의자들은 당대 한국의 가장 큰 정치세력이었다. 이 절대주의라는 단어 하나에 파시즘, 민족주의, 근왕파, 패권주의 등 많은 이념과 정치세력들이 함축되어 있었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을 없애거나 약화하려면, 우선 고조가 생전에 이룩한 그 무수한 업적을 강제로 잊게 하거나 아니면 세월이 잊게 하여야 했다. 그리고 어느 쪽도 선종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단독무대에 올라서자마자 이들과 적대하게 된 선종은 유감스럽게도 때 이른 임기 말 증후군에 시달리게 되었다. 국민당이 장악한 의회는 매일 같이 황제와 반목했고, 자유주의자들 또한 의회와 상의도 없이 대뜸 한국의 맹주 특권 후퇴라는 중요한 사안을 밀어붙여 버린 황제에게 딱히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절대주의자들에게는 황제가 너무나 문약하다며 실망을 샀다면, 반대로 자유주의자들에게는 황제가 의회를 무시하고 멋대로 정사를 처리한다며 실망을 사게 된 것이다. 그나마 절대주의자들과는 달리 자유주의자들은 여전히 황제를 향한 미적지근한 지지를 바쳤으나, 고조 생전의 광신적인 지지에 비하면 마지 못한 지지에 가까웠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국민이 황제에게 실망했다는 점이었다. 고조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국민의 지지로부터 나왔다고 생전 몇 차례고 언급한 바 있었고, 이는 국민의 지지 없이는 절대 황권 또한 없음을 뜻했다. 이야기인즉슨, 집권과 동시에 국민의 원망을 사게 된 선종은 후대의 황제들에게 비하면 여전히 강대하긴 해도 고조가 그랬듯이 뜻대로 황권을 휘두를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국민은 새로운 백마 탄 초인을 원했다. 선종이 고조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다음에도 말이다. 매일 같이 의회와 입씨름하는 황제의 모습은 이러한 여론을 더욱 부추겼다. 국민은 시답잖은 헌법이나 따지면서 의회와 매일 같이 입씨름하는 문약한 황제가 아닌,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그 어떤 사업에 손을 대건 성공만을 거듭하며 낡고 구태의연한 관습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제 갈 길을 가는 파천황적인 초인황제를 원했다.

그러나 당대에 그런 파천황적인 인간상을 지니고 태어난 황족은 없었다. 그나마 이강이 이러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할만했지만, 병약한 이강과 작지만 꽉 차 있던 고조 사이에는 억만 광년가량의 거리가 있었다. 다시 말해, 정상적인 제위 계승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초인황제가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민은 여전히 초인을 원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고조 천붕 이후 혼란상의 가장 큰 원흉이었다. 그야말로 혀깨나 놀릴 줄 아는 능변가란 능변가들은 개나 소나 내가 바로 그 백마 탄 초인이오-하고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국민의 눈과 귀를 현혹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정치 철새도 있었고, 선동가도 있었으며,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들도 있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황제가 대물림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펼친 우남 같은 위인도 있었다. "고조가 직접 황제 또한 국민 중 한 사람이오, 황제 또한 직업 중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황제가 대물림되어야 하는가? 황제가 진정 국민을 섬기기 위해 준비된 직업 중 하나일 뿐이라면, 국민이 황제를 채용해야지 어째서 그 지위가 대물림된다는 말인가?"라는 주장이었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황제의 뜻은 언제나 옳다."라며 절대주의의 극한을 달리는 이들도 있었다. "황제의 뜻이야말로 곧 국민의 뜻이오, 이 나라의 국본 일진데 어찌 불경하게도 그 뜻에 의문을 품는다는 말인가?"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선종에게는 불우하게도, 이들은 선종에게 남은 몇 안 되는 열성적인 지지자 중 하나였다. 선종의 인간 선언에도 이들은 여전히 선종이 한국의 새로운 초인이 되어줄 것이라는 무한한 기대를 바쳤다.

이렇듯 자신의 정치적 야망이나 이념을 펼치기 위해서인가, 개인적 사심을 채우기 위해서인가는 아무 상관 없었다. 아무튼, 그의 진짜 목적이 어느 쪽이건 간에,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겉으로라도 백마 탄 초인을 연기해야 했다. 무릇 한국의 정치인이란 고조가 그랬듯이 조금의 실수도 저질러서는 안 되었고, 한번 손을 댄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성공해야 했으며, 당연히 부정을 저질러서도 안 되었으나 술과 같은 유흥 문제는 제한 없이 허용되었다.

고조 천붕 이후 한국의 정치 풍조는 「가짜 고조들의 춘추전국시대」라는 한마디로 정의된다. 이는 오늘날의 한국 정계라고 그리 다르지는 않다. 이 점에서 선종은 그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성급하게 스스로 초인이 아닌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중이 보는 앞에서 공인해버리고 말았다.

한국 국민은 초인이 아닌 일개 인간에게 경의를 바치지 않았다. 국민의 경의를 받지 못하는 황제는 자신이 뜻한 대로 국정을 이끌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고조 대에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황권을 의회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도 불가능했다.

결국, 한국에는 황제와 의회라는 두 개의 태양이 뜨게 되었다.

그리고, 이 틈을 노리고서 서방세계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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