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화 【후일담】대한 포위망
다만 오해하면 곤란한 것이, 흔히 서역이라고 마치 하나인 것처럼 이야기되고는 하지만 프랑스-독일의 유럽 공동체와 미국의 워싱턴 조약기구는 엄연히 별개의 이해관계를 맺은 별개의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독일 이 두 나라의 접근법조차 극과 극이었으니 고조 천붕 이후 서역 세계의 접근을 마치 하나의 전체 뜻이 개입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건 한국과 아주의 불화와 혼란을 획책했다는 것만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이들은 이 기회에 한국이 두 번 다시 패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거나 최소한 패권 주장을 반백 년 이상 늦추려 시도했고, 이는 아주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불화의 씨앗을 심어두었다. 이들이 한때 한국의 우호국이었음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는 오랜 교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당대 최강의 열강이었던 미국은 한국이 아주에 발목이 잡혀 태평양 너머를 넘볼 수 없게 하고 싶어 했다. 이미 인도양까지 진출한 한국의 다음 목표는 자연히 지중해나 태평양이 될 수밖에 없었고, 혼란을 수습한 한국이 이후 어느 쪽으로 진출하건 미국으로서는 전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이 대양을 선점한 이상, 한국은 언제까지고 대륙세력으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는 당연하지만, 독일과 유럽 공동체에도 같이 적용되었다. 흔히 오해하는 점이지만, 이 당시 미국은 아주만이 아니라 유럽을 상대로도 이간책을 펼쳤다. 한국이 미국과 태평양을 두고 경쟁하는 패권 경쟁국이라면, 마찬가지로 독일 또한 미국과 대서양을 두고 경쟁하는 패권 경쟁국이었던 까닭이다. 단지 한때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 이 시기 독일과 미국은 진정한 우방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따라서, 이 당시 미국의 책략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접근과 전폭적인 후원. 둘째, 러시아에 대한 우호적인 접근과 전폭적인 후원. 일본의 성장을 후원하여 한국과 일본의 불화를 유도하고 러시아의 성장을 후원하여 러시아가 한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독일이 대서양으로 시선을 돌릴 수 없도록 발목을 잡도록 획책한 것이다.
물론 이 친러, 친일 외교만이 전부였을 리는 없었다. 미국은 그들이 지닌 가장 큰 무기-자본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이러한 거대 자본의 운용은 당대의 그 어떤 열강도 감히 따라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미국은 호주, 필리핀, 대만, 말라카, 사라왁 등 태평양과 맞닿고 있는 모든 크고 작은 나라들에 천문학적인 자본투자를 미끼로 추파를 던지며 한국의 태평양 진출에 대비한 무형의 장벽을 세우고자 시도했다.
또 한편으로 미국은 인도와 이란처럼 한국의 영향력에 잠식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들에도 같이 추파를 던졌다. 미국은 특히 인도 제국과의 관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당시 미국 국무부의 외교실무진 상당수가 공화 혁명 이후 대영제국에서 건너온 이들이 많았던 것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이들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왕실에 대한 충심이 남아있던 것이다.
물론, 이를 두고 미국이 옛 대영제국의 그림자에 휘둘렸다고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후일 공개된 비밀문건들에 따르자면 이 당시 미국은 진지하게 장기적으로 인도 제국이 제3의 패권 세력으로 성장하여 한국-독일의 구대륙 패권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여기에 미국의 의도대로 러시아까지 완전히 자립하게 되면, 구대륙은 독일과 러시아, 인도와 한국이라는 4개의 덩어리가 패권을 두고 다투는 아비규환이 될 터였다.
흔히 「후버 계획」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막대한 자본투자를 담보로 한 친미 세력의 확대는 황제권-의회권의 정면충돌이라는 정치적 혼란에 힘입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호주 왕국이 중립외교를 표방하며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간을 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고, 범 아주 조약기구와는 별개로 일본을 필두로 한 환태평양 경제합작기구가 발족하여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당장 한국의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고, 미국과 한국 사이의 긴장 관계를 이용하여 제각각 자국의 경제적-외교적 이익을 추구한 것뿐이었으나 그 의의는 절대 작지 않았다. 우선 일본에서 「일본은 아주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환태평양 세력이다」라는 외교관이 확립되었으며, 이후로도 미국과 한국 사이의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며 독자적인 외교적 지위를 갖추려 노력하게 되었다.
일본은 범 아주 조약기구의 가맹국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에 속한 대륙 국가는 아니며, 어디까지나 아주와 떼려야 뗄 수 없이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환태평양 해양국가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후일의 회맹 탈퇴 투표로까지 이어지는 일본 대외관의 주춧돌이 되었다. 실제로도, 고조와 요시노부 일왕이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일본은 합종군의 정기훈련에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이후 회맹에서 일본이 빈번하게 한국에 어깃장을 놓을 수 있는 심리적 근간이 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이후 일본의 존재를 두고두고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는 후일 미국의 태평양 패권에 매우 유리하게 자리하게 된다. 미국의 목표가 한국의 태평양 진출 견제뿐이라면, 그야말로 두 번 다시 없을 대성공이었던 셈이었다.
다만 친일정책과 달리 미국의 친러, 친인 정책은 그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는 독일 주도의 질서 아래 나날이 한 덩어리가 되어가는 유럽 공동체를 위험시한 나머지 미국의 후원금을 거의 모두 군비증강에 쏟아부으면서 경제적 자립은커녕 독일과의 군비경쟁으로 3차대전을 유발했고, 인도는 당장 대외확장보다는 내전 수습과 오랜 힌두-이슬람 종교갈등 완화가 더 급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도는 그나마 나았다. 한국에 큰 은혜를 입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한국에 종속될만한 덩치는 아니었던 인도는 미국의 후원 속에 제3의 패권 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어도 자주, 중립노선을 자칭할 수는 있었다. 한국과 미국이 충돌할 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을 것이라 공언한 것이다. 최소한 인도양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니, 미국의 대인도 정책은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러시아였다. 미국의 후원은 당시 악화한 국민감정에 힘입어 러시아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축소 시켰으나, 독일과 러시아의 군비경쟁을 일으켜 3차 대전의 원흉이 되었다. 3차 대전이 유럽 공산화와 브라질 코뮌을 비롯한 중남미 공산정권 난립의 원인이 된 걸 생각하면, 미국의 친러 정책은 돌고 돌아 미국의 자충수로 돌아온 셈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미국이 3차대전과 냉전 시대를 자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런 미래의 이야기는 그 당시의 정부에 책임을 넘기고서 이야기하자면, 당장 이 당시 미국의 세계정책은 대성공이었다. 우선 고조 생전에는 마치 하나의 나라처럼 움직이던 범 아주 조약기구는 일본이 독자노선을 추구하면서 동태평양 진출이라는 위업을 눈앞에 두고 분열되었고, 독일과 러시아가 서로 노려보며 육군력-공군력 증강에 열을 올린 덕택에 한동안 미국의 대서양 패권에 도전할 세력도 사라졌다.
프랑스는 독일 견제와 아프리카 식민지 통제에도 급급했고, 인도는 중립을 선언했으며 브리튼이 아일랜드를 두고서 미국과 대립하기도 했으나 양국의 격차를 고려하면 작은 도발조차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달리 말하자면, 그 누구도 감히 미국의 세계패권에 도전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해야 할 미국의 전성기였다.
여기서 의아한 점은, 당시 공화당 정권이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자국 내의 화교 연결망의 이용과 중화권 국가들과의 연계에 대해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일 중화권 국가들이 한국에 반기를 들도록 유도한다면 범 아주 조약기구를 뒤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대한제국 패권의 종식까지 노려봄 직했음에도 말이다.
오히려 이 시기 미국은 일본의 접근에는 호의적으로 응대했지만, 중화권 국가들의 접근에는 사뭇 냉담한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미국이 한국과 전면전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이들의 노동집약적 공업화가 쇠락한 산업단지 지대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당대의 비밀문건들이 아직 미공개 상태인 관계로 명쾌한 해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느 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을지는 의견이 갈려도, 우선 두 가지 이유 모두 결정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괜히 한국의 역린을 건드려서 한국과 전면전을 치를 생각도 없었고, 중화권에서 생산한 공산품들이 갈수록 미국 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던 것도 거슬렸을 테니 의식적으로 중화권을 멀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는 오늘날 주류학설이기도 하다.
그 반면, 독일의 개입은 중화권 국가들과의 적극적인 연대로 대표되었다. 미국이 의식적으로 중화권과 거리를 두며 한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고자 했다면, 이들은 그 반대로 한국과 전면전을 각오하더라도 대한제국 패권의 종식을 원한 것이다. 독일이 유럽의 맹주를 자처한 이상, 이미 한국이 이란과 손잡고서 지중해를 넘보고 있는 시점에서 타협과 공존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독일과 한국이 공존하게 되는 경우의 수는 한국이 평화적으로 이란을 포기하고서 인도양 너머로 후퇴하거나, 독일과 한국 둘 중 한쪽이 패망하여 패권경쟁이 종식되는 경우 두 가지뿐이었다. 그리고 한국이 평화적으로 이란을 포기한다는 가정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당장 고조 생전에 누리던 맹주로서의 특권을 내려놓은 것만으로도 국론이 두 쪽이 날 지경이었는데, 고조와 한국에 큰 호감을 보이던 이란의 팔레비 정권을 포기한다면 선종은 군사 정변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 정면충돌 밖에는 남지 않았다. 독일이 힘으로 한국을 러시아와 이란에서 내쫓던가, 한국이 힘으로 독일을 밀어내고 더욱 서진하던가 둘 중 하나의 결말만이 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국내의 혼란으로 독일과의 전쟁을 각오할 여력이 없던 한국과 달리, 독일은 한국과의 전쟁을 준비할 각오도 여력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다. 그 대표적인 책략이 바로 중화권과의 협력 추구였던 것이다.
물론, 그보다 현실적인 목표는 3차 대전이 벌어졌을 시 한국이 유럽 전선에 개입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설령 중화권의 도전이 처참한 패배로 끝나더라도 그들이 패망하는 동안 번 시간으로 유럽 동맹군이 페트로그라드에 깃발을 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계산이었다. 아무튼, 당시 독일의 제1 주적은 러시아였으며, 한국에 대한 견제는 유사시 러시아의 아군으로 참전할 수 있는 전력을 사전에 줄여놓기 위한 책략이었지 한국의 파멸이 제1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중화권의 여느 국가들 또한 독일의 목표가 무엇인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이 자신들을 한번 쓰고 버릴 패로 보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애초에 현실적으로 중화권 국가들이 한국에 도전하면 독일 함대가 남중국해까지 마중 나올 리도 없었으니 그들이 버림패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거부하기에는 독일의 접근은 중화권 국가들에 분명 매혹적이었다. 당시 이들은 경공업-노동집약적 중공업 단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중진국 함정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에 중화권 국가들이 중진국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울 의향이 없다는 건 누가 봐도 명백했다. 애당초, 그걸 도와봐야 한국에는 손해만 될 뿐일 테니 말이다.
이 탓에 당시의 기록을 살피면, 오히려 독일이 더욱 적극적으로 중화권 국가들에 접근하고 중화권 국가들이 한국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독일로서는 어떻게든 이들과 한국이 서로 미워하도록 유도해야 했고, 중화권 국가들로서는 독일의 도움을 아예 거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독일만 믿고서 한국에 맞서는 건 자살행위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독일의 대중 정책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분명 중화권이 기술집약적 공업에 도전할 수 있도록 발판을 제공해주어 한국과 중화권 간의 격차를 줄여주었으나, 정작 중화권이 한국에 척을 지도록 하는 데까지는 실패했다. 애당초, 중화권 국가들로서는 이미 한국에서 많은 양보를 약속한 마당에 독일의 약속만 믿고서 한국과 전면전을 각오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독일에는 유감스럽지만, 중화권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려면 독일의 개입 이후에도 반세기는 더 필요했다. 결국, 중화권의 배반을 성사시키기는커녕 후일 이들이 생산한 무기들이 합종군과 러시아군을 위해 사용되어 3차 대전 당시 유럽 병사들을 두고두고 괴롭히게 되었음을 생각하면, 어찌 보았을 때 남 좋은 일만 시켜준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는 범 아주 조약기구에 대한 직접적인 이간책을 시도하기보다는 한국이 주춤한 틈을 타 이집트, 터키 등과 손잡고 지중해 방벽을 두르는 데에 집중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당시 프랑스의 여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한국 또한 고조 천붕으로 소란스러웠지만, 프랑스라고 딱히 사정이 더 나을 것도 없던 것이다.
독일이 러시아와의 결전 준비에 모든 힘을 쏟고 있었다면, 프랑스는 이집트와 터키를 내세워 중동에서 이란-보다 정확히는 그 뒤에 있는 한국의 서진을 저지하는 데에 집중했다. 만에 하나라도 예루살렘이 한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면 그보다 끔찍한 사태도 없을뿐더러, 여기서 한국의 서진을 막지 못한다면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한국의 영향력이 침투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프랑스가 한국 견제를 포기하고서 지중해 방벽에만 집중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과 독일이 각각의 방법으로 한국에 맞선 포위망을 세우고자 시도했다면, 프랑스는 개화 초기부터 이어져 온 한국과의 오랜 민간 교류를 최대한 이용하여 한국 국내정치의 혼란을 유도했다. 프랑스는 사회주의 국제당의 동방정책을 방관했고, 때마침 새로운 초인을 갈망하고 있던 사회적 분위기에 맞물려 한국 공산당이 창당되어 본격적인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
고조 천붕 이후 절대주의, 자유주의 대립만으로도 아주 혼란스러웠던 한국 정계에 유럽발 공산주의 세력들까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이러한 유럽발 공산주의 세력은 단 한 차례도 한국 정계를 주도하지 못했으나, 고춧가루 부대의 역할만큼은 톡톡히 해냈다. 단지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만으로 민심을 어지럽혔으니 말이다.
프랑스의 목표가 한국의 국내정치를 더욱 교란하는 것뿐이었다면, 프랑스의 견제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가 지중해 방벽을 굳히었던 동안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면, 프랑스의 견제책은 대실패였다.
유럽발 공산주의 세력의 준동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을 제외한 한국의 모든 정당이 속된 말로 「좌우지간 코쟁이들부터 손 봐주고 마저 하자」라는 하나의 대의 명제에 동감하게 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