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후일담】아주의 방패
어느 나라에나 그들의 긍지를 드러내는 표어가 있다. 가령 미국은 「자유의 등대」가 바로 그러하고, 프랑스는 「혁명의 고향」이 바로 그러하며, 독일은 「하나의 독일」, 러시아의 「제3의 로마」, 일본의 「화(和)의 나라」가 바로 이에 속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긍지를 보이는 표어는 과연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 대답은 언제나 「아주의 방패」였다. 이는 고조 생전 사관학교 1기 졸업식부터 강조되어온 바였기에, 오늘날까지 이를 대체할 표어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름 아닌 고조가 처음으로 고안해낸 표어라는 보증서가 붙어있으니 아마 이번 세기 안으로 이를 대체할 표어가 나타나기란 어려울 것이다.
처음에는 물론 국익 때문이었지만, 여느 표어가 그렇듯이 고조가 세상을 등질 무렵 이 「아주의 방패」라는 표어는 한국의 신념, 어쩌면 더 나아가 신앙과도 같은 어구가 되었다. 절대주의자들도, 자유주의자들도, 보수주의자들도 연방주의자들도 누구 하나 이 표어를 부정하는 정치세력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건 그들의 이념을 이 표어에 끼워 맞추려 노력해왔다.
그들이 이를 전통적인 천자국의 의무로 해석하든, 전체주의의 확산에 맞선 자유의 방파제라 해석하든 좌우지간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주의 방패로서 한국의 제1 목표는 언제나 아주의 평안과 질서 유지였다는 점이다. 한국의 패권이 유지되기 위해서라도 아주는 평화로워야 했고, 한국인들의 긍지가 지켜지기 위해서라도 아주는 한국이 주도하는 질서 아래에 놓여 있어야 했으며, 아주가 위기에 처했다는 건 방패가 제 역할을 못 했음을 뜻했다.
따라서 서구 세계의 개입은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든 의도했든 간에 한국의 역린을 건드린 격이었다. 그들의 장기적인 목표가 아주의 분열 내지는 가맹국간 정면충돌이었던 이상 한국은 아주의 방패로서 이에 단호히 대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위기 앞에서 한국은 단결을 택했다. 한국인끼리의 제살깎아먹기는 우선 아주가 평화를 되찾은 이후라도 전혀 늦지 않았다.
다만 이것이 고조 천붕 이후의 춘추전국시대가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를 가장 직접 보여주는 사건이 1932년 총선이다. 1932년 총선에서 국민당은 38%로 제1당을 유지했으나 54%->46%->38%의 내리막길을 걸으며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고, 이제는 자유당으로 개명한 보수당이 37%로 비약적인 약진을 보여주었으며 중앙당이 16%, 민주당이 새로 원내에 입성하여 나머지 9%를 가져가며 국민당-중앙당 연정 시대가 열렸다.
보다시피, 한국은 이 시기 엄청난 정치적 격변을 겪고 있었다. 고조의 빈자리를 채울 초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였으나, 이 무렵 한국 정계가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겪고 있었다는 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아닌 말로, 고조 천붕 이후 1932년까지 현역에 남아있던 건 김홍집 총리대신 한 사람뿐이었다.
어윤중 총리는 고조 천붕 이전 진즉 정계에서 은퇴하여 사회원로로 물러난 지 오래였고, 원세개 원수도 대륙횡단철도 지휘 중 건강 악화로 영면에 들었으며 김옥균 총리 또한 고조 천붕 이후 한국의 현실을 비관하여 은거, 김가진 내부 장관도 고조 천붕 이후 급히 쇠약해져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등지는 등 고조의 수족이나 다름없던 1세대 개화 인사들이 모두 죽거나 실무에서 물러나고 있던 것이다.
그나마 김홍집 총리와 함께 최후까지 자리를 지키던 한성근 대원수마저 군부의 동요를 가라앉히는데 기력을 쏟다가 끝내 1929년 선종에게 부월을 반환하고 바로 그해 세상을 등지니 이제 정말로 고조와 함께 천하를 호령하던 이들이 김홍집 한 사람 빼고 모두 사라진 격이었다.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김홍집 총리 또한 고조 생전에는 크게 중용 받지 못하다가 선종이 즉위한 이후 뒤늦게 출세한 경우였기에 논외라고 치면 이제 정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국에 복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흉이기도 했던 사실은 이들의 빈자리를 메운 이들 또한 누구 한 사람 호락호락한 이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들 모두가 서로 협력하며 힘을 한데 모았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이들 모두가 총리대신을-우남의 경우 종신통령을-바라고 있었기에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김홍집 총리가 이 시기 무수한 초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무소속을 꿋꿋이 유지했던 것 또한 총리가 무소속이 아니고서야 의회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가령 자유당에서 친 어윤중계 당내 원로들을 축출하고 당권을 장악한 우남은 고조 천붕 이후 처음으로 황제의 종신통령화를 제안한 충격적인, 혹은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같은 시기 활동한 몽양은 중앙당과 자유당에 조금씩 지지층을 갉아 먹히며 쇠락하던 국민당에 노조와의 협력이라는 새로운 활로를 제시하여 국민당의 이념색을 우파에서 좌파로 돌려놓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청년기의 행적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가기도 하나 시대에 뒤처져 사라져가던 유림 여론을 규합하여 중앙당을 이끈 백범은 이 시기 우파 민족주의 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고, 새롭게 원내에 입성한 민주당의 도산(島山)은 한국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대중운동의 역할을 강조하고 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고조 천붕 이후 한국 민주정치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었다.
이외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자격이 충분한 위인들이 모였으니 그야 집안이 조용할 리가 만무했다. 따라서 한국 정계의 춘추전국시대는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좋았다. 필자가 이들을 호로 돌려 부르고 있는 것 또한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쭉 이어지는 복잡한 정치양상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만일 고조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이들 모두를 휘어잡을지도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당대 황제였던 선종에게 그만한 재량은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들 모두가 서로 누런 송곳니를 드러내면서도 「아주의 방패」라는 하나의 표어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제를 비롯한 국내 사안에서는 매일 같이 헐뜯기 바쁘던 이들도 대외정책에서만큼은 한입을 모았던 것이다. 비록 수단과 시기에는 잡설이 오가도, 서역의 농간을 뿌리치기 위해서라도 서역에 크게 한 방 먹여줄 필요가 있다는 건 이 시기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었다.
물론 직접적인 계기는 공산주의 세력의 준동이었으나, 그게 아니었더라도 어떤 식으로건 이 시기 한국이 서역 세계와 정면충돌을 불사했을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서역 세계가 의도했든 아니면 방관했을 뿐이든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에 책임이 있다는 건 분명했고, 서역 세계가 이러한 태도를 계속 유지하는 이상 한국이 제아무리 가맹국들을 다독여봐야 아주의 혼란도 그만큼 장기화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과연 어떻게 서역 세계에 타격을 줄 것인가였다. 가장 빠른 해결책은 역시 전쟁이겠지만, 미주와 유럽 두 대륙을 동시에 적대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고 애당초 이들과 전면전을 각오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렇다면 한국 또한 서역 세계가 그러했듯이 간접적이고 간교한 책략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꼭 한국의 도덕성을 해치는 일일 필요는 없었다.
한국의 해결책은 이러했다. 우선, 이 시기 한국 정부는 무엇보다도 인도를 회유하는 데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무엇보다 한국에는 인도가 크게 혹할만한 미끼가 있었다. 바로 영국 열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겠다는 미끼 말이다. 이는 차마 인도 황실이 거부할 수 없는 미끼였다. 제아무리 인도 문화에 적응하고, 인도인의 황제이기를 자칭했다고 해도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 고향은 영국이었으니 말이다.
이는 차마 미국이 제안할 수 없는, 한국만이 제안할 수 있는 미끼였다. 영국의 공화 혁명으로 한때 대영제국에 충성을 다하던 인재들을 흡수하여 세계통치의 기반으로 삼은 미국으로서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도에 대영제국을 재건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제안을 할 수 없었다. 일부는 새로운 조국 미국에 충성을 다하겠지만, 그들 중 또 적지 않은 수가 영국 열도로 되돌아가고자 할 테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독일 또한 이를 제안할 수는 없었다. 우선 인도와 손이 맞닿기도 어렵겠지만, 영국의 왕정복고를 후원한다는 건 결국 유럽 공동체의 일원인 브리튼 자유국을 배신하겠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이는 국난에도 왕실이 인도에 동화되고 있다는 이유로 왕정복고를 꺼리던 당대 브리튼 자유국의 의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배신행위였다. 결국, 한국 이외에는 인도의 영국귀환을 후원할 나라가 없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강력하기는 했어도 결정적인 미끼라고 하기에는 곤란했다. 대영제국의 재건은 황실의 야심이지 인도인들의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말이다. 이 부분을 해결해준 것은 우습게도 프랑스의 중동 정책이었다. 프랑스가 한국의 서진을 막기 위하여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을 후원하자 다시 이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이 인도의 수니파 반군 세력을 후원하고 나선 것이다.
무엇보다, 오스만 튀르크가 해체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이 시기 중동의 주류 이념은 이슬람 파시즘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오스만 튀르크의 칼리파에게 충성하라는 부분이 제국 해체 이후 독립한 아랍국가들의 술탄들에게 충성하라고 바뀌었을 뿐 주요 골자는 거의 바뀌지 않은 채로 유지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중동의 주류 이념이 이슬람 파시즘인 이상, 바로 이웃한 인도의 수니파 반군 세력이 이에 흠뻑 젖게 되는 건 필연적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국과 손을 잡으면 미국의 분노를 살 것이라는 문제가 남아있었으나, 여기서 인도 제국은 한 가지 꾀를 냈다. 자신들은 이슬람 파시즘의 확산과 이에 따른 국내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중동에 개입하는 것뿐이고, 한국과 공투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우연히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였지만, 인도 제국은 이후 3차 대전 내내 이러한 견해를 유지하게 된다.
한편으로, 한국은 인도를 회유하는 동안 이하응이 남기고 떠난 미국의 아시아계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데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여기에는 마침 미국에서 인종갈등이 심화하고 있었다는 시대적 행운이 따르기도 했다. 중화권 국가들의 산업화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미국이 자랑하던 압도적인 공업력이 조금씩 그 영광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J.P.모건 투자은행을 위시한 금융가들에게야 아주의 산업화가 돈 놓고 돈 벌기의 노름판이었을지 몰라도, 점차 그들이 일하고 있는 공장이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 공장주나 노동자들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독일의 지원으로 기술적 격차마저 조금씩 좁아지니 입이 바싹바싹 말랐을 것이다.
물론 정치권도 마냥 손 놓고 있던 건 아니라 관세장벽을 둘러 보호무역을 강화하고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착취를 보다 심화하여 어떻게든 공장들을 지키려 했지만, 이러한 조치들에도 한계는 있었다. 미국이 관세를 높이면 한국을 비롯한 아주 국가들도 관세를 높이니 그만큼 미국 제품들이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고,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착취를 강화하면 또 그만큼 중남미의 반미운동이 힘을 얻어 중남미를 안정시키는 데에 더욱 많은 국력을 투자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C)을 비롯한 미국의 노조 집단은 아주와의 무역업에 종사하던 황인들을 원흉으로 지목했다. 미국 동부의 공장들이 하나둘 서부로 이전하고 있던 당대의 상황은 황인들이 미국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이들의 음모론에 더욱 큰 힘을 부여해주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한국이 미주를 정복하기에 앞서 미국의 아시아계 지역사회는 미국의 분열과 악화를 꾀하는 미주 정복의 선봉장이었다.
애당초 미국의 황인종 모두가 무역업에 종사하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들과 마찬가지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더 많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미국 공업의 점진적인 쇠락은 당대 그 어떤 정치인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였고, 이들에게는 그저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쏟아낼 분출구가 하나 필요했을 뿐이었다.
미국의 황인종 지역사회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 부활했다. 고종 사후 구심점을 잃고 분열과 내분을 거듭하며 사실상 와해되었던 검계 조직들도 이 시기에 재규합되기 시작했다. 황백 갈등이 심화하면 심화할수록 이들의 단결 또한 굳건해졌고, 이는 아주의 방패를 자부하던 한국과 이들의 유착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그럴 때마다 음모론 또한 더욱 확고해졌다.
이는 황인종이 다수를 차지하는 캘리포니아 등의 미 태평양 연안의 주들 사이에서 연방 탈퇴 안이 고개를 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여차하면 한국이 뒷배를 봐줄 것이라는 기대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도, 한국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여러 차례 모의실험을 돌려보기도 했으니 마냥 아무 근거도 없는 기대는 아니었다.
물론 태평양 연안 주들의 연방 탈퇴안은 실제로 결행되지는 못했으나 미 연방정부에 적잖은 위기감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실제로도 노조와 아시아계 지역사회의 갈등에 다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연방정부에서 이들의 갈등을 없애고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것 또한 바로 이 시기부터였다. 미국의 친일외교가 대뜸 한국의 멱살을 잡은 격이었다면, 한국 또한 태평양 연안 주들의 독립논의를 통해 미국의 멱살을 잡게 된 셈이었다.
위와 비교하면 대독일 정책은 한결 간단했다. 이미 독일을 위시한 유럽 공동체가 한국과의 결전을 각오하고 이를 위해 사전준비에 여념이 없는 게 분명하니 한국 또한 이들과의 결전을 각오하고서 사전준비에 나서면 그만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이란에 한국군 군사기지를 설치하거나, 러시아에 비행단을 상시주둔시키거나 함대를 페르시아만까지 전진 배치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후세의 입장에서 불평을 말하자면 설령 유럽이 이미 결전을 각오했더라도 최소한 전쟁을 피해 보려는 시도 정도는 해야 했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지적은 무의미하다. 고조 천붕 이후 잠깐 주춤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한국이 큰 실패를 겪고서 신중해진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한국은 여전히 승리를 향한 확신에 차 있었고, 그들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유럽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모습을 일관성 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탓에 오늘날 학계는 끝내 3차대전의 발발을 막지 못했음에도 이 시기 선종과 김홍집 등을 위시한 온건파 세력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비록 3차대전을 막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한국이 먼저 3차대전을 일으키는 최악의 사태는 막았다는 게 그 이유다. 당시 원내에서 제1야당인 자유당과 황색언론들이 매일 같이 전쟁, 전쟁 노래를 부르던 걸 생각하면 이들이 없었을 때 한국이 직접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물론 천만 다행히도, 3차대전의 시작을 알린 건 한국이 아닌 독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