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525화 (525/530)

525화 【후일담】3차대전 발발

다만 3차대전의 시작을 알린 것이 독일이었다고 하나, 한 가지 분명히 말해둬야 할 것은 독일은 단지 봉화를 올린 것뿐 세계가 타오를 무대는 이미 준비된 지 오래였다는 사실이다.

흔히 한국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이 시기 세계 정치는 공통으로 혼란스러웠다. 아주는 고조가 세상을 떠났기에 그러했고, 미주는 미국 공업의 쇠락 때문에 나날이 흉흉해져 가는 민심 탓에 그러했으며, 유럽은 나날이 공고해지는 독일의 유럽 통치와 그에 저항하기 시작한 각국의 사정 탓에 그러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국민이 외부의 적에게 시선을 돌리도록 하여 혼란을 가라앉히고자 했다는 것이다. 가령 한국은 서역 세계의 개입과 견제 때문에 아주 대륙이 위기에 처했다며 선전했고, 미국은 독일과 한국이 그들의 공장들을 빼앗아 가고 있다고 선전했으며, 독일은 그들의 지배에 의문을 품는 나라들에 러시아와 한국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음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이러한 선전은 당장 불만을 회피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을지 모르나 한편으로 그럭저럭 적대적 공존을 유지하던 세계열강 간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다. 일례로, 천하회맹과 같은 공식 석상에서는 크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어도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전쟁위기가 찾아올 때는 삼국 간의 비밀협상으로 일을 수습하곤 했던 세계열강 간의 공조가 30년대를 전후로 하여 자취를 감추게 된다.

독일은 중화권에 손을 뻗으며 한국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에 대응하여 한국은 페르시아만까지 함대를 전진 배치하여 수에즈 운하 봉쇄를 운운하며 유럽의 역린을 건드렸다. 한국의 미 서부 독립운동 후원은 미국을 격노시켰고, 라이베리아를 거친 미국의 서아프리카 반란군 후원은 아프리카의 원자재에 크게 기대고 있던 유럽의 공장들에 끔찍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일본을 방패 삼아 한국의 태평양 진출을 성공적으로 견제했다고 확신한 미국은 끝내 하와이 왕국을 병합하며 한국과의 밀약을 깨트렸고, 미국을 신대륙의 지역 열강으로 묶어두고 싶었던 독일은 중남미 라틴 국가들에 산업고문단을 파견하며 미국의 신경을 건드렸다. 1933년의 샌프란시스코 민란과 시위대를 향한 연방수사국의 인권유린은 한미관계를 파탄 냈다.

더는 각국의 외교실무진은 겉치레로라도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입을 모아 한국/독일/미국이 국제평화를 위협하고 있노라 외쳤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세계열강들은 앞다투어 국제평화를 파괴해댔다. 10년이나 가면 다행일 거라는 고조의 촌평과는 달리 반세기 가까이 3차 대전의 발발을 막아주었던 천하회맹은 이제 그 효용을 다해가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물론 각국 수뇌부의 팽창주의도 팽창주의지만, 그 팽창주의가 고개를 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계 경제가 성장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소비시장은 거의 늘지 않고 있는데 공장들만 마구 늘어나고 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소비시장은 늘기보다는 정체 내지는 줄어들고 있기까지 했다.

집은 1채만 있으면 충분했고, 자동차도 1대면 평생 쓰고도 남았고, 옷이나 화장품은 매번 유행이 바뀌긴 하지만 반대로 유행에 신경 쓰지 않으면 그리 자주 바꿀 필요는 없었다. 이 시절에 TV가 있던 것도 아니니 기껏해야 라디오인데 이 라디오도 이 무렵에는 거의 보급이 끝난 지 오래였고, 그렇다고 이 시대에 오늘날처럼 기호식품이 발전한 것도 아니었으니 먹고 사는 게 해결된 시점에서 엥겔지수가 오를 이유도 없었다.

이미 침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직후의 건설 대호황을 마지막으로 아주 대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중진국 함정을 탈출하기 위한 중화권 국가들의 발버둥은 자국의 성장률을 높여주었을지 몰라도 이웃 국가들의 경제성장은 더욱 둔화시켰다. 그들이 중진국 함정에서 탈출하여 공업선진국으로 진출하려면, 기존의 공업선진국들은 그만큼의 지분을 이들에게 내줘야 했기 때문이다.

중화권 국가들에서 공장이 새로 들어섰다는 이야기는, 공장이 불어난 만큼 그들이 국외로부터 수입해야 할 공산품이 줄어들었음을 뜻했다. 그건 곧 중화권 국가에 물건을 팔던 공장들이 경영난에 빠졌음을 뜻했고, 이는 대부분은 도산 혹은 국유화를 의미했다. 그리고 전자는 실업자를 양산하여 민간경제에 충격을 주었고, 후자는 국가재정에 충격을 주었다.

한때 전 세계를 먹여 살릴 수 있다던 미국 공업이 쇠락하게 된 것도 이러한 세계 경제의 성장한계와 무관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침체에서 탈피하려던 미국 정부의 대대적인 금융투자는 나날이 둔화하여가던 세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그들의 해양패권을 더욱 공고하게 해줬으나 한편으로는 안 그래도 경영난에 빠져있던 미국 국내의 공장들에 더욱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나마 한국이 고속성장을 유지하던 무렵에는 한국의 소비력으로 어떻게든 메울 수 있었으나, 고조 천붕 이후 투자시장이 얼어붙으면서 한국의 고속성장 시대가 끝나자 그것도 어려워졌다. 세계 경제 성장은 둔화하기 시작했고, 이제 중화권에서 공장이 하나 새로 만들어졌다는 건 꼼짝없이 세계 어딘가에서는 공장이 하나 도산했음을 뜻하게 되었다.

이때 독일과 유럽 시장이 구원투수로 나서면 좋았겠지만, 이미 유럽 시장은 반쯤 갈라파고스 상태에 접었던지 오래였다. 이는 비단 독일만의 의지가 아닌 유럽 국가들 모두의 의지기도 했는데, 이렇게 형성된 유럽의 거대한 관세장벽은 아주와 미주의 공산품으로부터 유럽 공업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인 조치라 포장되어왔다.

이 거대한 관세장벽 덕택에 유럽은 오랜 전란 때문인 쇠락에서 벗어나 재도약할 기틀을 닦았지만, 한편으로는 독일에 대한 경제적 종속을 나날이 심화시켜 많은 나라에 반발을 샀다. 이 반발을 해결하기 위한 독일과 러시아의 군비경쟁은 당장 회원국들의 불만을 없애는 데에는 효율적이었을지 몰라도 아무런 생산성도 없는 군수산업에 대한 투자는 결국 조금씩 이들의 경제성장을 둔화시켰다.

1933년 뉴욕발 금융위기는 그 전주곡과도 같았다. 언제나 있었던, 일상적일 거라 여겨졌던 금융위기는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너 세계 경제를 초토화했다. 이 금융위기의 여파로 미국 금융경제의 기둥이라 할 수 있었던 J.P 모건 투자은행이 파산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런던 금융가의 몰락 이래로 대서양, 태평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금융제국을 건설한 모건 투자은행의 경영난은 범세계적인 경제위기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가장 먼저 경제성장의 상당 부분을 금융에 의존해왔던 미국이 무릎을 꿇었고, 단 한 차례도 실패한 적 없다던 한성의 부동산 신화가 무너졌으며, 독일과 러시아의 군비경쟁이 반강제로 종지부를 찍었다. 즉각적인 각국 정부의 대응으로 세계 대공황은 피했으나, 범세계적인 경제 침체는 피할 수 없었다. 고조 즉위 이후 80년간의 기나긴 경제호황을 누려온 아주 대륙에는 너무나 끔찍한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아주 대륙의 이러한 절망은 유럽 대륙에는 투정이나 다름없었다. 애당초, 군비경쟁이 끝났다는 게 하루아침에 그 거대한 군대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지 않던가. 이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에도, 독일은 군비감축이라는 선택지를 고를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그러했다. 오히려 독러의 진정한 전쟁위기는 경제 침체 이후에 찾아왔다.

우선 독일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완화하여 군축에 성공한다면 그동안 러시아에 맞선다는 명분 아래 억눌러져 온 이웃 국가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할 것이고, 러시아와의 사전 조율 없는 군축은 러시아에 어서 침략해달라고 손짓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자살행위였다. 러시아로서는 화해의 손짓도 거절하고 이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 와중에도 그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려 안달을 쓰는 독일을 믿고 군축을 택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파산선언과 전쟁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여기서 가장 피가 덜 흐를 선택지는 물론 파산이었고, 또 그들 각국에 가장 나은 선택지도 파산이었겠지만, 한편으로 이는 정권의 붕괴를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오. 상대국이 파산보다 전쟁을 택하도록 더욱 부추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번 파산을 선언하고서 다시 일어서는 고된 과정이 이미 파산을 선언한 오랜 적국에서 모든 걸 빼앗아 경제를 재건하기보다 쉽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결국, 독일은 전쟁을 택했고,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였다. 명분은 대외적으로 「간악한 러시아의 침략을 사전저지하기 위한 예방전쟁」이라고 포장되었으나, 실질적인 전쟁 목표는 러시아를 꺾어 그 전쟁배상금과 이권으로 경제를 회복하고 유럽에서의 패권을 공고히 하는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대외적인 명분은 물론 「독일 침략자들에 맞선 러시아 인민들의 위대한 대조국전쟁」이었지만 실질적인 목표는 경제난 때문인 국내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독일을 꺾어 그 전쟁배상금과 이권으로 경제를 회복하고 유럽 공동체를 와해시켜 유럽 진출을 완성 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1936년 3월 7일, 3차 대전이 막을 올랐다. 한 번 불이 붙기 시작하자, 확산은 순식간이었다. 당대의 정치인들에게 이 세계대전이 경제 침체를 해결하기 위한 유효한 수단으로 여겨진 까닭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는 실제로도 꼭 들어맞았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전쟁은 가장 빠른 경제부흥책이기도 했다. 3차대전의 발발은 경제 침체를 말끔히 날려버렸고, 대신에 수천만의 인명 또한 가져갔다.

러시아가 독일의 침략에 휩쓸리자 러시아의 혈맹을 자처하던 한국에서도 즉각적으로 독일과 유럽 공동체에 선전포고하였고, 같은 해 5월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국경수비대 간의 맨손 싸움으로 시작된 터키군과 이란군의 무력충돌은 이집트의 개입으로 인해 전면전으로 번지면서 중동 전선이 시작되었다. 중동 전선이 개막하자 한국의 지중해 진출을 경계하던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나라들이 중동 전선에 개입하며 지상군을 투입했고, 이에 이란군이 한국을 중동에 끌어들이며 중동전선 또한 3차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자 한국에서 유럽 동맹군의 관심을 돌려놓기 위하여 아프리카 대륙의 독립을 후원하고 나서면서 동아프리카 전선이 시작되었고, 아프리카에 너무 많은 전력을 돌릴 수 없던 유럽 동맹군은 아프리카의 반군 세력을 상대로 생화학병기를 투입했다. 이는 식민지인들의 공포를 불러일으켜 이들과의 협력을 피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나, 합종군이 유럽의 생화학병기 이용을 대대적으로 반유럽 선전에 이용하면서 유럽 동맹군의 자충수가 되었다.

에티오피아 혁명 전선이 지부티에 상륙교두보를 제공하여 합종군이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하면서 아프리카 전선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아주 합종군은 민족자결주의에 기반을 둔 아프리카의 무력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 동맹군 또한 자치권 확대를 통한 단계적인 독립을 약속하며 현지인들을 징병하여 전선에 투입하였다.

양측은 승리를 위하여 거리낌 없이 생화학병기를 투입했고, 이는 아프리카 대륙이 역병에 신음하게 하여 유럽의 식민행정체제를 파괴하고 각지에서 생존을 위한 난민 군벌 세력이 난립하게 하였다. 뒤늦게 유럽 공동체에서는 생화학병기 사용을 중단하고자 했으나, 이미 한 번 퍼진 역병은 걷잡을 수 없었다. 결국, 아프리카 전선은 1937년 초엽, 그러니까 사실상 개전과 동시에 합종군의 승리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일부 전선에서의 국소적인 승리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주전장이라고 할 수 있던 독일-러시아 전선에서는 러시아-아주 연합군이 유럽 동맹군의 질적 우위에 맥을 추지 못하면서 개전 이래로 줄곧 유럽 동맹군의 우위가 이어지고 있었고, 중동 전선에서는 시리아를 해방하는 등 이란-아주 연합군이 우위를 잡았으나 결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전황을 바꾼 건 외부적 요인이었다. 프랑스-이집트 연합군이 한국의 수에즈 운하 점령과 지중해 진출에 대비하여 유사시 수에즈 운하를 폭파할 준비를 하자 이에 격분한 인도에서 단순 지원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참전을 택하면서 인도 또한 참전국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나 복이 있으면 흉이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인도의 참전으로 중동 전선은 완전한 연합군 우위로 기울게 되었으나, 전후 인도 아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한 동맹세력이 발족할 것을 우려한 미국이 독일의 손을 들어주면서 미국이 3차대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중립을 표방하며 양측에 물자를 판매하는데 그치던 입장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유럽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까지도 여전히 미국의 개입은 대대적인 물자지원과 함선 판매로 그쳤으나, 한편으로 미국은 직접 서역의 전쟁과 무관한 일본, 말라카 등 미국의 투자를 유치한 환태평양의 우호국들이 중립을 지키거나 태업하도록 유도하는 등 한국을 지원할 의향은 없음을 분명히 보였다. 이는 한국이 유럽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항상 태평양 방면에 일정 숫자 이상의 함대를 준비해둬야 함을 뜻했고, 사실상의 양면 전선은 전쟁 초기 한국의 진을 빼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마냥 유럽의 승전을 도울 생각이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미국은 한편으로 아프리카 해방을 외치며 서아프리카의 반군 세력을 후원하던 라이베리아에 대한 군사적 후원을 더욱 강화했다. 직접 미국과 라이베리아는 동맹은커녕 더는 보호국 관계도 아니었지만, 상식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던 라이베리아의 국채를 있는 대로 사들이며 그들이 아프리카 해방전쟁을 수행할 물자를 대는 모습은 유럽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요컨대, 이 시기 미국이 원한 가장 이상적인 전후 구상은 유럽의 전쟁 수행을 돕고 한국의 전쟁 수행을 방해하여 한국이 패하고 유럽이 승리하도록 유도하되, 그 과정에서 유럽 또한 중동과 아프리카 지배권을 상실하고 유럽의 식민국가들을 해방해 그들을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국과 유럽의 공멸을 꾀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이 유럽과 전쟁 중인 와중에 또다시 미국과 전쟁을 각오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숨어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속셈을 입증이라도 하듯, 미국은 키예프가 유럽 동맹군에 함락당하고 모스크바까지 유럽 동맹군의 사정권에 들어온 1937년 말엽부터 은근히 유럽 동맹군에 대한 후원을 줄이는 모습을 보인다. 제아무리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이 선전해도 양측의 주력전력이 맞부딪히고 있는 러시아 전선에서 유럽 동맹군이 승기를 굳히자 유럽에 대한 지원을 줄여 유럽의 전력 소모를 극대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야말로 양측의 공멸을 바라고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행보였다.

그러나, 이 3차대전이 서력 1936년부터 1944년까지 장장 8년이라는 세월에 걸쳐서 세계를 불태울 것이라는 걸 이 시점에는 누구 한 사람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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