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528화 (528/530)

528화 【후일담】3차대전 종전

한국의 핵 개발 계획인 「오얏꽃 계획」의 시초는 흔히 1925년 아주 연구기금 주관 과학의 날 행사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졌다. 더욱 정확히는, 이날 시행된 과학의 날 행사에 참여하여 자리를 빛낸 고조의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1925년 4월 21일 고조는 이날 "오늘날 우리 아주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 과학 기술을 선도하는 주요 기술선도세력 중 하나로 거듭났소."라고 자리에 모인 학자들의 공로를 치하하면서도 "그러나 주요 기술선도세력 중 하나만으로는 부족하오. 우리는 언제나 더욱 높은 곳을 노려야만 하오. 만족은 곧 정체를 의미하기 때문이오."라고 덧붙이며 학자들을 채찍질했다.

보통의 인물이라면 여기서 그쳤겠지만, 고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서 이날 "장차 세계는 지난 19세기 초엽 서역에서 증기기관을 선점했듯이 더욱 강력한 동력원을 확보하는 세력이 이끌어가게 될 것이오."라고 더욱 구체적인 향후의 지향점을 제시하며 "짐은 20세기를 빛낼 새로운 동력원은 저 태양의 힘, 곧 원자력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소"라고 이날의 대담을 마무리 지었다.

언제나 그랬다시피, 고조가 언제부터 원자력 기술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가 하는 점은 아직도 불명확하다. 이때까지도 당대의 석학들조차 원자력 상용화 가능 여부를 두고서 의견이 분분한 와중이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들 또한 언젠가는 핵을 이용하여 무기를 제조하던가 발전소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건 직감하고 있었어도, 그 미래가 10년 뒤인가 100년 뒤인가를 두고서는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세계열강들이 원자력 기술에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이기는 했어도, 한국처럼 초국가적 사업으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핵융합 기술이 언젠가는 상용화될 것이라 믿어도 막상 언제쯤 상용화될 것인가를 두고서는 의견이 분분하듯, 이 시기의 원자력은 그야말로 언제 완성될 것이라는 기약조차 없이 시간과 재화를 쏟아부어야 하는 머나먼 미래기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조가 일부러 이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아주 연구기금에서도 원자력 기술에 어느 정도 투자는 했을 테지만, 연구원 개개인-혹은 연구소 몇 곳이 시험 삼아 파고드는 수준에 그쳤을 연구가 고조의 이 한마디로 크게 뒤바뀌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 없다. 고조는 또 한차례 그의 초인적인 통찰력으로 시대를 뛰어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조가 한 번 이를 언급하자, 아주 연구기금은 어떠한 불평불만 없이 원자력을 20세기의 주요 개발 과제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박용희의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아득한 미래기술이라는 점? 상관없었다. 아주인들은 고조의 초인적인 통찰력에 신앙이나 다름없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항생제와 암모니아 합성이라는 전례도 있지 않던가. 이 두 차례의 성공 경험은 아주 연구기금에서 미혹을 앗아갔다. 고조가 그렇게 말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이 시기 아주 연구기금의 방침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고조가 원자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고, 과학자의 사명은 고조께서 그리신 미래구상을 현실화하는 것이다」일 것이다. 이처럼 과학자를 황실의 도구로써 강조하는 수직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학풍은 오늘날까지도 아주 연구기금의 대표적인 폐단으로 손꼽히지만, 이때만큼은 한 번 방침이 정해지면 폭발적인 화력을 보여주는 본연의 장점을 유감없이 뽐낼 수 있었다.

그 결과 1925년부터 시작된 아주 연구기금의 원자력 연구개발-통칭 「연오 계획」은 1933년 금융위기로 한 번 좌초되기도 했으나, 미국이 선전포고문을 전달한 1941년에는 이미 대동(大同), 후흐호트 등의 지역에서 시험적인 형태의 원자로를 완성하여 플루토늄 생산에 박차를 가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유럽이 1937년, 미국이 1940년에야 비로소 핵 개발에 착수했던 점을 생각하면 한국의 핵 개발은 당대 세계열강들과 비교해도 10년이상 앞서고 있던 셈이었다.

다만, 이를 두고서 한국의 핵 개발이 시작부터 핵기술의 무기화를 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애당초 고조가 핵기술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한 까닭은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20세기를 빛낼 새로운 동력원」을 개발하기 위함이었으며, 따라서 애초의 개발 방침은 핵폭탄 개발이 아니라 발전용 원자로 개발이었다.

거기에, 이 사업을 지시한 고조 또한 원자력의 무기화를 바라지는 않았다. 고조는 원자력의 무기화 방안을 제시하는 아주 연구기금의 연구 이사진에게 "그야 태양의 힘을 사람이 다루게 된다면 꼭 엄청날 테지만, 그 힘이 제 것인 양 천벌을 남용하다 큰 화를 당할까 두렵구나."라며 보기 드문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분명 핵무기의 파괴력은 엄청날 테지만, 바로 그 때문에라도 멀리해야 할 것이라며 또다시 시대를 앞선 혜안을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조 본인이 직접 핵무기 개발사업을 완곡히 돌려서 거절한 바도 있었기에, 학계에서는 만일 33년 금융위기와 36년 3차대전 발발이라는 대사건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핵무기 개발은 없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물론 언젠가 핵 개발 경쟁 때문에라도 무기화를 피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10년, 20년 뒤로 미뤄졌으리라.

그러나 33년 금융위기와 이에 따른 부동산 시장 불황이 아주 전역을 휩쓸고 3차대전이 시작되자 한국에는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후일 수습했다고는 하나 개전 초기 러시아 전선에서의 연전연패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우군의 인명피해는 적었으나, 36년 한 해 동안만 3천 기 이상의 항공기와 차량 2만 대를 손실한 연합군은 전시동원이 마무리되는 39년까지 반격은커녕 전선을 유지하는 데에 모든 힘을 쏟아야 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사업인 「오얏꽃 계획」은 1939년 이처럼 암울한 전황 속에서 시작되었다. 오얏꽃 계획은 국방부 산하의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처음 건의되었고, 이는 곧장 의회와 선종의 인가를 얻어 전시경제체제 전환의 일환으로서 실시되었다. 고조가 핵무기를 두고서 우려를 표한 바 있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핵무기를 개발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긴 건 아니었고 당장 어떻게든 전황을 뒤집을 결전 병기가 필요하던 한국은 잠시 고조의 우려를 잊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된 오얏꽃 계획은 그간의 발전용 원자로 연구에 힘입어 매우 빠르게 진척되었다. 애당초 필요한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으니 진척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우라늄 채광이야 한참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고, 중수를 생산할 공장도 이미 가동 중이었던데다가, 핵연료재처리 시설 또한 연구용 수준의 설비라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 시설들을 활용하여 핵무기를 제조할 연구진 또한 이미 기존에 발전용 원자로 설비를 연구하고 있었던 연구진을 투입하면 그만이었다. 당시 연구를 지휘한 홍병식 박사는 후일 취재진 앞에서 이 오얏꽃 계획과 연오 계획을 일컬어 "똑같은 칼을 조리용으로 쓰기에 식칼이라 부르고 사람을 죽이는 데 쓴다고 비수라 부르는 격."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사람을 죽이는 기술도 사람을 위하는 기술도 결국 기술적 근간은 똑같다는 비꼼이었다.

이렇듯 사적인 자리에서 핵무기 개발을 명한 윗선을 은근히 원망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홍병식 박사는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우선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홍병식 박사가 이끄는 이들 연구진은 1940년 12월 플루토늄을 처음으로 추출해내고 뒤이어 1941년 6월에 격발장치를 완성하여 1942년 1월 몽골 고원에서 원격기폭으로 최초의 핵실험까지 마무리 지었다.

연오 계획부터 세면 17년이지만, 오얏꽃 계획부터 세면 고작 3년여 만에 사업이 종료된 것이다. 이마저도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이 승기를 잡게 되면서 되려 투자가 줄어들었음에도 이룩한 성과였다. 이 엄청난 성취에도, 홍병식 박사는 "군인들에게 감시당하면서 아침밥을 조리하는 기분이었다."라고 후일 자평했다. 본인들에게는 일상과도 같았던 일과를 군인들에게 감시를 받으면서 진행했다며 불평한 것이다.

그러나 홍병식 박사의 표현대로 이미 연오 계획부터 시작하여 핵물리학 연구에 청춘을 바쳐온 이들 연구진에게 플루토늄 추출을 비롯한 핵물질 처리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오얏꽃 계획에서 가장 큰 개발 난점은 핵무기 제조가 아닌 경량화와 투발 수단의 확보였다. 막상 핵무기를 완성하자 원자폭탄이 너무나 무거워 이를 투발할 폭격기부터 개발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당초, 이 시기 연합군은 핵무기 투발을 시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제공권을 확보하지도 못했다. 유럽 전역에서는 매달 수천 대의 전투기가 새로 보급되고 한편으로는 폐기처분 되고 있었고, 태평양 전역에서는 항모 전단 간 함대 결전이 한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작 원자폭탄 1발을 투입한다면 실효성 이전에 우선 핵무기를 사용할 때까지 그 폭격기가 무사할 수 있을까부터 걱정해야 했다.

최악의 경우, 사용해보기도 전에 격추되어 적에게 노획될 경우의 수까지 고려해야 했다. 이를 각오하고서 핵무기를 사용하려면 적어도 2, 3발 이상의 원자폭탄을 준비해야 할 터였다. 그래야지만 설령 1, 2발이 적진에 도달하지도 못하고서 불발로 끝나더라도 마지막 1발은 목표지점을 타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때문에 막상 개발을 마무리 지은 이후에도 전선에서는 한동안 재래식 전쟁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이 재래식 전쟁에서 연합군은 그리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근소한 우위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대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모든 건 미국의 참전 탓이었다.

미국의 참전은 치명적이었다. 1941년 미국의 참전은 연합군을 향하여 기울고 있던 저울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미국의 대대적인 물자지원과 지상군 파병은 너무 일찍 전시경제체제로 이행한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뒷심이 떨어져 조금씩 서쪽으로 밀려나고 있던 유럽 동맹군에게 반격을 노릴 마지막 뒷심을 불어넣었다.

당장이라도 바르샤바를 거머쥘 듯 러시아 대부분을 수복하고 서쪽으로 진격하던 연합군은 되려 벨라루스를 내주고서 밀려나야 했고, 라이베리아를 발판 삼아 서아프리카에 진출한 미군이 합종군의 서진을 견제하면서 뒷수습만 남아있던 듯했던 아프리카 전선이 재차 막을 올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던 건 태평양 전선이 열리면서 양면 전선이 시작된 점이었다. 글자 그대로, 힘을 온전히 서쪽에만 집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 태평양 함대와 합종군 태평양 함대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과의 약속을 깨고서 하와이 왕국을 병합하기 이전부터 양측은 전쟁계획을 준비하고 있었고, 만일 전쟁이 벌어지면 전쟁이 기나긴 대치전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결정적인 승리로 적 함대를 전멸시킨다는 극단적인 가정으로 어떻게 단기 결전을 노려보려 해도, 태평양 섬들을 함락시키고서 적 본국 해안가로 가는 도중에 적 함대가 재건되어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조선소들을 총동원해서라도 평시에 유지하고 있던 함대의 수배 이상을 건조해낼 수 있는 양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대치전이 벌어지게 될 경우, 일단 한국의 성장세를 꺾어두기만 해도 전쟁목표를 달성하는 격이었던 미국에는 나빠질 게 하나도 없었지만, 양면 전선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에는 좋아질 게 하나도 없었다.

이에 따라 태평양 전역은 양면 전선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미 태평양 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고 와야 하는 연합군 태평양 함대와 연합군의 공세를 적당히 맞받아치면서 최악의 경우라도 진주만에 틀어박혀 하와이만 지켜내면 그만인 미 태평양 함대의 수 싸움이 되었다.

7차까지 이어진 미드웨이 해전과 횟수를 세는 것도 무의미한 알류샨 공방전은 그 상징과도 같았다. 이 7차례의 미드웨이 해전 내내 연합군은 어떻게든 미 태평양 함대가 어쩔 수 없이 함대 결전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판을 만들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고, 미 태평양 함대는 이에 맞서 어떻게든 이 함정을 사전에 간파하던가 피해를 최소화하고서 후퇴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역에서만 양측이 손실한 만재배수량의 총합이 각각 60만 톤을 넘어가는 와중에도 승부는 나지 않았다. 태평양 전역이 막을 올린 지 꼭 2년이 지난 1943년까지도 말이다. 견디다 못한 연합군에서 도박적으로 노린 진주만 상륙전은 끝내 이를 사전에 파악한 미군의 역습으로 참패로 끝났고, 이에 득의양양해진 미군의 산호해 진출은 운 나쁘게도 연합군 정찰기에 사전 발각되어 참패로 끝나면서 주고받은 격이 되었다.

장장 2년에 걸쳐 수백만 톤의 쇳덩어리를 태평양 밑바닥에 처박은 양군은 이제 기진맥진하여 숨을 고르고 있었고, 태평양 전선이 잠시 고착된 동안 유럽 전선에서는 벨로루시-폴란드 근방에서 전선이 끝없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힘과 힘의 충돌이 마침내 균형을 이룬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미국의 전쟁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뜻했다.

한편 한국은 이제 지쳐가고 있었다.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도 어느새 7년째였고, 전시동원이 이루어진 지도 4년을 넘어 5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국가재정이 무사할 리가 만무했다. 한계가 임박해오고 있었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전황을 뒤집어야만 했다. 그리고 대단히 다행스럽게도, 전황을 뒤집을 비장의 패는 이미 한국의 수중에 쥐어져 있었다.

1943년 8월 3일 새벽 5시 30분, 연합군은 미드웨이 해역에 모여있던 미 수상함대를 핵 폭격했다. 목표는 미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하여 진주만 방위에 구멍을 내는 것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진주만 또한 무력화하여 하와이 해방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날의 핵 폭격은 비록 미드웨이 해역에 모여있던 미 수상함대를 무력화하기에는 다소 부족했으나, 통신설비를 파괴하여 8차 미드웨이 해전이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마무리되는 데에는 결정적인 공헌을 해주었다.

8차례에 걸친 함대 결전 끝에 미 항모부대를 용궁으로 보내며 마침내 태평양 전역의 제공권을 거머쥔 연합군 태평양 함대는 재차 8월 8일 진주만을 핵 폭격했다. 이 또한 미 태평양 함대를 격멸하기에는 부족했으나 진주만 핵 폭격으로 모항을 잃은 미 태평양 함대는 하와이를 포기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본격적으로 하와이를 봉쇄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한 연합군은 8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1943년 12월 2일 하와이를 해방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1944년, 승기는 다시금 연합군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종전은 멀고도 멀어 보였다. 여전히 유럽 전선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고, 하와이를 빼앗긴 미국도 이 무렵 플루토늄 추출에 성공하여 핵무기 개발이 막바지 단계에 다다른 와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핵 개발 시설을 파괴하거나 유럽이 전쟁에서 이탈하는 수준의 대승리가 필요했는데, 어느 쪽도 쉽지 않아 보였다.

승패는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누구도 예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결정 났다. 장장 8년간을 끈 3차대전은 레프 트로츠키가 이끄는 사회주의 국제당에 의하여 유럽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붕괴하면서 끝났다. 적백내전이 시작된 유럽은 더는 3차대전을 이어갈 수 없었고, 미국으로서는 이미 승패가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한국이 관대한 항복조건을 제의하는 판국에 결사 항전을 고집할 명분이 없었다.

결국, 2대 황제 선종이 내각의 격렬한 반발에도 유럽과 미국에 대한 영토할양과 군정을 배제한 채로 식민국가들의 독립인정, 가벼운 수준의 전쟁배상금과 군축 요구 등 대단히 관대한 항복조건을 동맹군 측에 제의하고 이처럼 관대한 조건이 후일 한성조약을 통해 재차 확인되면서 연합군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혹자는 혁명 당시 유럽 동맹군의 전력을 근거로 만일 적백내전이 1년만 더 뒤로 미루어졌다면 승패는 모르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주류학계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이 장장 5년간의 전시동원으로 기진맥진했던 것과 그 이상으로 장장 8년간 전시동원체제를 유지하던 유럽 공동체에 내부로부터 터져 나온 혁명의 목소리를 억누르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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