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후일담】대서양 적백내전
그러나 여기에는 여전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유럽 공동체의 붕괴가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다고 해도, 왜 하필이면 그 수단이 공산 혁명이었을까? 더욱 온건한 공화 혁명일 수는 없었던 것일까?
냉전 시기 사학계는 그 원흉으로 당시 사회주의 국제당을 이끈 트로츠키의 영도력을 이야기하고는 했지만, 냉전이 마무리되고 당시의 기밀자료들이 대부분 민간에 공개된 오늘날에는 한물간 학설로 평가받는다. 냉전 시기 공산 진영의 선전과는 달리 당시 트로츠키가 특유의 독불장군 기질 탓에 그가 이끄는 계파를 휘어잡았을지언정 전체 사회주의 계파들의 포용에는 서툴렀다는 게 드러난 까닭이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다가 적군에 합류하여 유련 설립 초기 트로츠키를 보좌한 블라디미르 레닌 총서기의 지도력이 더욱 고평가되고 있다. 만일 혁명이 독일이 아닌 러시아에서 시작되었다면 러시아인인 레닌이 트로츠키 사후에라도 정국을 주도하지 않았겠느냐는 관측마저 나오고 있는 판국이다. 이렇듯, 트로츠키가 삐뚤어진 천재였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도 그 혼자만의 역량으로 유럽을 적화시키기에는 부족했다는 게 오늘날 학계의 주된 평가다.
무엇보다 트로츠키는 적백내전의 시작을 알린 주모자가 아니었다. 트로츠키가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건 사회주의 국제당이 적군의 손을 들어준 다음이었고, 그가 사후 미텔 유로파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통칭 유련의 영웅으로 떠오른 건 그가 혁명 확산에 거대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여, 사회주의 국제당은 유럽 적화에 큰 공헌을 했을지언정 적백내전의 시작을 알린 독일 적화에 관여한 바는 적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의 봉화를 올린 건 도대체 누구였는가? 이를 이야기하려면 오토 슈트라서와 그가 제창한 슈트라서주의를 이야기해야만 한다. 바로 이 슈트라서 형제와 그들을 추종하던 독일 민족해방전선이야말로 혁명의 봉화를 올린, 적백내전의 시작을 알린 이들이기 때문이다.
슈트라서주의를 처음 제창한 슈트라서 형제는 이 시대 유럽에는 흔하디흔한 파시스트였다. 그들이 당시 유럽에 흔히 퍼져있던 주류 파시스트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그가 파시스트인 동시에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파시스트로서 국제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주의를 추종했으나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자로서 제국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주의를 추종했다.
이 슈트라서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반민주주의, 반자본주의였다. 슈트라서주의에 입각하자면, 의회 민주주의는 허상에 불과했으며 의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 한국 등 소위 민주국가들의 정치는 크게 부르주아 독재, 그림자 의회, 중우 독재로 구분되었다.
부를 독점한 극소수의 부르주아 몇몇에 의하여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던가, 표면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진정한 실세들이 모든 걸 그림자 속에서 결정하고 있던가, 어리석은 대중을 선동한 몇몇 특출난 개인에게 독재 당하고 있던가 3가지 상태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투표란 단지 민중에게 그들이 그 나라의 주권을 쥐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교묘한 장치에 불과했고, 옛 봉건시대의 민중이 신과 무지의 권위에 의하여 지배당하였다면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민중은 투표라는 허상에 속아 자신이 그 나라의 주인이라도 된 양 착각하고서 금융자본에 지배당한 채 살아가는 불쌍하고 가엾은 족속이었다.
이처럼 교묘한 지배에서 벗어나 부르주아 독재를 타파하고 그 나라의 인민이 진정으로 그 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의회 민주주의라는 허상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었고, 여기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 의회 민주주의라는 공룡을 지탱하는 금융자본에 단호히 맞서야만 했다.
금융자본과의 투쟁 끝에 인민이 그들의 손으로 직접 거짓된 중우정치로 그들을 속여온 배금주의 정치인들을 단죄한 뒤에야 비로소 인민은 그들을 속박해온 물질의 주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본연의 진정한 내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렇게 태어난 새로운 조국에는 일국 일당제의 원칙에 따라 군림하는 오직 하나의 정당이 옛 부르주아 독재자들의 부를 본연의 주인들에게 재분배하고 진정 인민이 주인이 되는 인민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당혹스럽고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지만, 이러한 슈트라서 형제의 주장은 파시즘이 유행하고 있던 이 당시 유럽에는 제법 적잖은 호응을 얻었다. 파시스트들이 주장하는 본연의 가치에 따라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적 가치들을 포용하여 사상적 진일보를 이루었다는 게 이 당시 추종자들의 설명이었다.
무엇보다 슈트라서주의가 유행을 끈 것은 당시 마르크스주의 계열 정당들의 정당 활동이 전면금지 된 상황에서 그나마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 계열 정당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 자신의 주장에 따르자면 슈트라서주의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에서 좋은 부분만 선별적으로 취한 아주 새로운 제4의 이념이었지만, 외부인들은 그들을 좌파 파시즘 운동으로 여겼던 까닭이다.
어느 정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긍정하던 독일 중앙당조차 분류상으로는 일단 파시즘 정당으로 구분되던 당시 유럽의 정치적 현실에서, 어느 정도 공산주의적 가치를 빌려 오기는 했어도 여전히 파시즘적 가치가 뿌리 내려있던 슈트라서주의가 파시즘이 아닌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정당 활동은 단 한 차례도 금지된 적 없었고, 3차대전 발발 당시에는 이미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이라는 당명으로 원내 제2야당으로서 절찬리에 활동 중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위치는 슈트라서주의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호응을 얻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현실적으로 공산당, 사회당이라는 당명을 내걸고서 원내 입성을 노릴 수 없었던 이 당시 정치적 현실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 그 사이 어딘가 즈음에 있는 슈트라서주의는 활동이 금지된 공산주의자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던 까닭이다.
이들 공산주의자 출신 전향자 중 일부는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을 내부로부터 완전한 공산주의 정당으로 바꾸어 나갈 것이라는 야심을 지니고 있었으나, 진심으로 슈트라서주의에 찬동하여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에 가입하는 이들도 절대 적지 않았다. 파시즘과 슈트라서주의가 반민주주의 투쟁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듯이, 공산주의와 슈트라서주의 또한 반자본주의 투쟁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조금씩 힘을 불려 나가던 슈트라서주의와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이 본격적으로 독일을 주도하게 된 것은 3차대전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개전 초기만 해도 독일 중앙당의 그늘에 가려 당시 여타 독일의 정당들이 그렇듯이 거수기로 전락했던 이들은 미국의 3차대전 개입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당세를 불리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미국의 3차대전 개입은 미국이 3차대전에 참전한 1941년이 아닌, 그보다 앞서 유럽이 러시아 전선에서 결정적인 우세를 점했을 당시 미국의 지원중단을 뜻한다. 이미 아프리카 식민지 문제 탓에 오랜 세월 반미감정이 축적되어 있던 프랑스와 달리 이 시기까지만 해도 대단치 않았던 독일의 반미감정이 이때를 기점으로 폭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뒤늦게나마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고 독일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이미 독일인들의 대미감정은 악화할 대로 악화한 다음이었다.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중앙당이 전쟁이 장기화한 원흉은 바로 이때 미국의 지원중단이라고 선전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패전을 앞둔 정권이 으레 벌이는 흔하디흔한 책임회피였으나, 한편으로는 진실이기도 했다.
실제로도 미국이 이때 지원을 줄이는 대신 더욱 전폭적으로 후원했다면 적어도 러시아 전선에서만큼은 유럽 공동체가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주류 사학계의 결론이니 말이다. 이러한 반미여론의 대두는 미국과의 친선을 주도하고 있던 온건 파시즘 세력의 몰락을 초래했으며, 이는 독일 민주주의의 종말을 의미했다.
황인종과의 숙명적인 대결을 지상 과업으로 삼기는 했으나 그 외 국외정치에서는 미국과의 공존을 추구하고 국내정치에서는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긍정하던 온건 파시즘 세력이 대거 몰락하면서 민주주의를 타락이라고 규정짓는 수구 파시즘 세력이 득세한 것이다. 이는 파시즘 정당이라고 하기에 부족한 감이 많던 독일 중앙당이 주도권을 잃었음을 뜻했다.
이들 온건 파시즘 세력이 남아있을 동안에야 이들도 그럭저럭 사상적 동지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의회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수구 파시즘 세력이 득세한 상황에서 파시즘 정당이라고 포장되었을 뿐인 보수적 자유주의 정당이었던 독일 중앙당에는 더는 믿고 후방을 맡길 아군이 없었다. 원내의 모든 정당이 중앙당의 권좌를 탐내고 있었고, 이제 중앙당은 힘의 균형을 잘 조율하여 어떻게든 이이제이를 노려야만 했다.
중앙당의 비극은 의회정치에서 선방하고서도 끝내 대중동원에서 패배하였다는 점이다. 보수적이고 대중과 거리가 먼 귀족들이 주축이 된 중앙당은 더욱 서민적이고, 친 대중적인 그들의 정적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공권력은 이미 오랜 전시체제로 무력화된 지 오래였고, 전쟁이 말기로 치달을수록 독일 곳곳에서는 저마다의 준군사조직을 보유한 파시즘 정당들이 패전 이후를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대중동원에서 가장 큰 세력확장을 이룩한 건 다름 아닌 슈트라서 형제의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이었다. 우파 파시즘 정당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원내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 좌파 파시즘 정당은 국가사회주의당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사회주의당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활약은 그중에서도 도드라졌다. 괴벨스는 미국을 일컬어 "혐오스러운 유대 자본의 온상"이라고 맹비난하며 반미주의를 더욱 부추겼고, 독일인들은이들의 선전에 열광했다.
무엇보다 이들이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이 러시아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은 이 당시 「러시아와의 즉각적인, 조건 없는 종전」을 주장한 유일한 정당이었다. 여타 우파 파시즘 정당들과는 달리, 이들은 부분적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기에 러시아와의 대전쟁을 「반자본주의 투쟁 동지들 간의 참혹한 내전」이라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침은 당시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었던 러시아에 이들을 친러정당이라고 판단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독일의 항전 의지를 꺾고 전후 독일에 친러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먼저 손을 건넸고, 전후 독일의 새로운 집권여당이 될 구상을 하느라 여념이 없던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은 러시아와 기꺼이 손을 잡았다. 이제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은 군부 내의 내통자들과 러시아에서 막대한 무기를 공급받게 되었고, 전쟁 말기에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독일 북동부 지역을 점거한 군벌세력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혁명의 봉화를 알린 것은 태평양 전선에서 전해져온 미 태평양 함대의 패전 소식이었다. 이를 전해 듣고서 비로소 때가 왔음을 확신한 독일 국가사회주의당 당수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1944년 1월 9일 패전책임을 운운하며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당시 수상이었던 하인리히 브뤼닝은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이 공산주의자들과의 유착 탓에 다른 파시즘 정당들과 사이가 나쁘다는 점과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라는 논리를 들어 버텼지만, 이미 세는 기운 다음이었다.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의 지시 아래 베를린을 시작으로 독일 북부를 휩쓴 총파업은 독일 제국에 사형을 선고했다. 독일 제국에 이 총파업을 진압할 여력은 더는 남아있지 않았고, 수상 하인리히 브리닝이 카이저의 명을 받들어 제국 수상직에서 사임하고 국가사회주의당이 장악한 의회가 제정 폐지와 공화정 실시, 러시아와의 즉각적인 종전을 연이어 통과시키면서 독일 제국은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전선에 나가 있던 독일 제국의 전통적인 귀족 장교들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후방이야 어쨌건 전선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을뿐더러, 무엇보다 제정을 폐지하고 새로 정권을 거머쥔 국가사회주의당이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하고 부의 재분배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당장 그들의 봉토를 빼앗기게 생긴 귀족들이 이 새로운 빨갱이 정권에 호의적일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여기에 프랑스 제국과 이탈리아 제국을 비롯하여 아직 패전을 인정하지 않은 나라들도 있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이들은 멋대로 패전을 선언하고 러시아와의 종전을 꾀하는 이 새로운 독일 정권을 배신자로 간주했다. 때마침 독일 국가사회주의당과 공산주의자들의 유착은 이들에게 좋은 명분을 주었다.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이 종전과 제정 폐지를 선언한 직후, 독일은 공산 혁명 확산저지를 부르짖는 옛 동맹국들에 포위당했다.
적백내전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작되었다. 제정 복고를 외치는 귀족들과 공산 혁명 분쇄를 외치는 옛 동맹국들에 둘러싸인 새로운 독일 공화국은 트로츠키가 이끄는 사회주의 국제당과 손잡고서 그들의 옛 동맹국들을 하나둘씩 내부로부터 무너뜨려 나갔다. 오랜 전시동원으로 피폐해진 건 다른 유럽 나라들도 마찬가지였기에, 미국의 전면적인 개입과 필사적인 지원에도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듯 유럽 공동체는 삽시간에 폭삭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오랜 세월 유럽 공동체의 맹주로 군림해온 독일이 가장 먼저 공산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와 독일을 배제하고서 나머지 유럽 국가들끼리 손을 잡으려 해도, 애당초 독일이 없는 유럽 공동체라는 건 성립할 수가 없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방방곡곡까지 연결된 유럽 횡단 철도를 따라 유럽 대륙 전역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공산 도미노는 끝내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을 무너뜨리고, 다시 대서양을 건너 라틴 아메리카를 무너뜨렸다.
선종의 관대한 항복 요구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지만, 이 시기 유럽 대륙과 라틴 아메리카를 휩쓴 적백내전은 3차대전 종전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미 유럽 대륙과 라틴 아메리카가 적백내전에 휩쓸린 상황이었기에, 3차대전 종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 사회주의 국제당은 한국으로부터 막대한 후원을 받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제당이 한국과의 조속한 종전을 외치고 있었던 까닭이다. 미국이 적백내전이 이 이상 확산하는 걸 막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과 사회주의 국제당의 유착을 끊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한국과의 종전에 동의하여야 했다. 한국이라고 좋아서 이들을 지원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양 진영이 한성조약에 서명한 1944년 8월 4일에는 이미 멕시코까지 빨치산들과의 내전을 시작한 다음이었다. 서아프리카를 포함하여 대서양 세계는 이미 적화되었거나 적화를 꾀하는 빨치산들과 내전이 한창이었고, 미국은 캐나다와 더불어 대서양 세계에서 이를 수습할 둘뿐인 국가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한국이 바라던 전개도 아니었다. 한국이 바란 건 사회주의 국제당이 유럽의 전쟁 수행을 방해하고 반전여론을 부추기도록 하는 정도였지, 대서양 세계가 송두리째 적백내전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의 전쟁도 끝이 나자, 이제 진짜로 사회주의 국제당은 한국에도 골칫거리가 되었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건 어느 진영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공산주의의 불길이 어디까지 확산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적백내전은 1946년 6월 7일 인도 황실이 영국 열도에 돌아오고 48년 미국의 하바나 핵 폭격에 대한 맞대응으로 미텔 유로파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통칭 유련이 북해 공해상에 핵실험을 성공시키면서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기나긴 빨치산 전쟁이 끝났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빨치산 전쟁은 이제 막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핵을 향한 공포에 근간한 열강들의 평화와 시산혈해로 더럽혀진 중소 국들의 이념대결, 곧 냉전 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