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Prologue
폭군.
데브란트 제국의 황제,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가 황위에 오르자마자 제국에 불기 시작한 피바람은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니 폐하의 고견을 청합니다.”
신임 재상, 리차드 파크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발언을 마쳤다.
감히 황제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전임자의 목이 잘린 지 겨우 일주일. 햇병아리 재상은 공포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매서운 눈길로 리차드 파크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사과.”
황제는 그 한마디만을 내뱉은 채 바로 입을 닫았다.
파크가 눈만 도르르 굴리며 얼어 있을 때였다.
자그마한 체구의 비서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서도 반짝이는 금안과 새빨간 머리가 인상적인 비서였다.
“폐하께선 루스카렐 공작을 조사하라고 명하십니다.”
“아, 알겠습니다.”
파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카엘을 향해 문서를 한 장 내밀었다.
“폐하, 테툰 왕국에서 국경 분쟁을 일으킬 계획을 짜고 있다는 첩보입니다.”
황제는 빠른 속도로 문서를 훑더니 생각에 잠겼다.
“…….”
침묵 끝에 나온 말은 이번에도 단 한 단어에 불과했다.
“…바다.”
비서는 잠시 눈알을 굴리더니, 다시금 빠르게 말을 시작했다.
“해군을 재정비하라고 하시는군요. 만약 테툰 왕국이 분란을 일으킬 경우, 통째로 수몰시킬 준비를 하라고 명하십니다.”
리차드 파크는 반쯤 경이에 찬 눈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 저 비서, 레티시아 우즈가 없었다면 제국은 이미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 * *
“폐하.”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가 자신의 유일한 비서, 레티시아 우즈의 부름에 반응했다. 흐트러진 금발 사이로 열대 바다 같은 오묘한 빛깔의 눈이 반짝 빛났다.
천사라고 해도 믿을 법한 얼굴이었으나 데브란트 제국은 물론 대륙 전체가 두려워하는 남자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침묵.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 침묵이 당장 말하라는 의미임을 잘 알았다.
지난 10년 동안 그녀는 비서로서 미카엘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했다.
평범한 평민에 불과한 그녀가 황제의 비서가 될 수 있었던 건 오직 미카엘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카엘이 말 자체를 전혀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간단한 단어 한두 가지 정도는 곧잘 소리 내어 말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심지어 뜻하는 바를 직관적으로 알려 주는 단어들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 속뜻을 완벽히 꿰뚫지 못하고 엉뚱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빠른 눈치와 감각으로 미카엘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레티시아였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에서 오직 레티시아 우즈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 여태까지 자신은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들을 이 입으로 해 왔던가.
레티시아의 역할은 황제의 입이었기에, 누군가를 처형하라는 말조차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지금 할 얘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렵게 느껴졌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본디 그녀는 미카엘과 단둘이 있을 땐 편안하게 얘기했지만, 지금만큼은 격식을 차려야 할 때였다.
“갑작스레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올해 안에 사직하고자 합니다.”
“…….”
미카엘의 얼굴에 많은 감정이 떠올랐다.
레티시아는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다.
1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으며,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겨우 열 살이었을 때부터 그의 곁에서 일했다. 미카엘이 놀라고 언짢아하는 건 당연했다.
레티시아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조속히 후보들을 물색하여 적임자를 뽑아야……!”
레티시아의 말이 급하게 끊어졌다. 미카엘이 그녀의 허리께를 감싸 안듯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탓이었다.
“폐, 폐하?”
레티시아는 어느새 자신이 황궁에 널린 비밀 공간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카엘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를 찬찬히 살피려는 찰나, 귓가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부탁이야, 레티시아. 제발 내 곁에 있어 줘.”
“……!”
레티시아의 금안이 커지더니 혼란에 잠식되어 흔들렸다.
미카엘이 말을 하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이해가 될, 제대로 된 말, 제대로 된 문장을!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이보다 더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레티시아의 몸을 황제가 안아 올렸다.
Chapter 1. 어둠 속의 미소년
열세 살에 불과한 레티시아 우즈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효녀였다.
누구나 그 사실을 인정했다.
어린 나이에도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아픈 할머니와 오빠를 온종일 보살폈으니까.
그 대가로 레티시아는 항상 칭찬을 얻었다.
“참 착하구나, 레티시아.”
“역시 우리 딸이 최고야.”
“레티시아는 어쩜 그렇게 사려 깊니?”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힘들고 고된 날들이 이어졌지만, 레티시아는 그 칭찬들에 매달렸다.
그녀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곤 오직 달콤한 말들뿐이었으니까.
* * *
‘추워…….’
레티시아는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가을비는 사정없이 내렸고, 아직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도 빗방울을 완전히 막아 주지는 못했다. 설사가상으로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직 돌아갈 순 없어.’
할머니의 병에 좋다는 희귀한 약초, 세브란을 이제 겨우 세 포기 찾았을 뿐이었다.
적어도 열 포기 이상 가져가지 못한다면 할머니는 물론 부모님마저 크게 실망하실 것이다.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그녀 때문에 실망하는 건 죽기보다도 싫었다.
레티시아는 그나마 덜 젖은 팔뚝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얼른 캐고 내려가자. 그럼 되잖아.’
하지만 어둑한 숲속에서 희귀한 약초를 캐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산에는 세브란과 이파리와 줄기의 모양새가 비슷한 식물들이 많이 자랐다.
비슷한 식물을 찾았다고 해도 뿌리를 캐 보기 전까진 정확히 세브란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덧 푸른빛이 도는 어스름이 세상을 장악했다. 레티시아는 손을 달달 떨며 산을 계속 올랐다.
곧 어스름이 짙어져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에 깔릴 것이다.
오늘은 보름날이니 달이 구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 주기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짙은 먹구름을 보니 요원해 보였다.
그나마 비가 어느덧 그쳤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정신 차려, 레티시아. 어머니, 아버지도 우리를 위해 이 시간까지 일하고 계시잖아.’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작년 가을, 세브란을 겨우 일곱 포기 가져갔을 때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레티시아에게 화내거나 그녀를 야단치지 않았다. 단지 부모님과 세 시간 동안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죄송해요.’
‘죄송할 것 없단다, 레티시아. 네 나이에 놀거나 한눈팔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저, 안 놀았어요.’
‘우리는 너를 야단치려는 게 아니야. 하지만 이것 하나만 명심하렴.’
부모님은 전혀 화난 것 같지 않았다. 단지 슬퍼 보일 뿐이었다.
‘세브란은 하찮은 풀처럼 보일지 몰라도 할머니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란다. 네가 제대로 캐지 않는다면… 할머니는 돌아가셔.’
그때만 생각하면 숨이 콱 막히는 듯했다.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산에서 내려가는 건 쉽다. 그냥 비탈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어둡고 뼛속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할머니를 위해 세브란을 더 캐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레티시아는 진흙을 열심히 파헤쳤다. 세브란 특유의 부들부들한 잔뿌리가 많으면서도 중심은 단단한 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일곱 포기를 더 찾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빗속에서 헤맨 성과는 겨우 두 포기 더 찾은 게 전부였다.
문득 세 살 많은 오빠, 패딩턴이 한 얘기가 떠올랐다.
‘요새 산에 곰이 그렇게 자주 나온다면서? 나는 산에 갈 일이 없어서 다행이야.’
레티시아는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갓난아기였을 때, 곰이 마을에 내려와 한 가족을 찢어 죽인 적이 있다고 했다.
다행히 그 이후로 곰에게 죽은 사람은 없지만 목격담은 종종 들려왔다.
부스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바구니가 요동쳤지만 다행히 세브란을 떨어트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주의를 기울였다. 만약 곰이 근처에 있다면 특유의 끔찍한 냄새가 날 것이다.
코를 열심히 킁킁거렸지만, 다행히도 젖은 풀 냄새와 진흙 냄새만 날 뿐이었다.
“괜히 놀랐네. 새였잖아.”
레티시아가 새인지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큰 소리로 말한 순간.
“아악!”
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이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레티시아는 연신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소중한 세브란이 들어 있는 바구니를 움켜쥐며 뒷걸음질 쳤다.
무언가가 어둠을 헤치고 그녀를 향해 자박자박 다가오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그때, 조금씩 걷힌 먹구름 사이로 밝은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백한 달빛이 레티시아의 눈앞에 내려앉았다.
“어……?”
레티시아의 입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섬뜩한 기척의 정체는 그녀보다 서너 살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다.
아주 잘생긴.
물론, 레티시아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처음 보는 꼬맹이의 얼굴에 넋이나 빼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누구니?”
“…….”
소년은 겁을 먹은 듯 입을 꾹 다물고 눈동자만 굴릴 뿐이었다.
“부모님은 어디 계셔?”
“…….”
“집이 어디니?”
“…….”
슬슬 짜증이 나려는 찰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말 자체를 못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아예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경우일지도 모른다.
“여기 있으면 위험해.”
레티시아는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지만, 소년은 여전히 잘생긴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나마 자신의 말에 눈동자가 흔들린 걸 보니, 소리 자체를 듣지 못하는 경우는 아니라는 게 위안이었다.
‘역시 말을 못하는 거구나.’
어쩌다 벙어리 소년이 산속에 홀로 있게 된 걸까. 궁금증이 스멀스멀 기어올랐으나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레티시아는 세브란 다섯 포기가 담긴 바구니와 겁에 질린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얼굴에 홀려 눈치채지 못했던 소년의 옷차림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화려한 자수와 값비싸 보이는 단추는 평범한 집 아들이 입을 만한 옷이 아니었다.
‘부잣집 아들?’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대체 어느 부잣집에서, 말 한마디 못하는 자식을 산속에 홀로 둔다는 말인가?
레티시아의 머릿속에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 떠올랐다.
“너, 가출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