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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150)

2화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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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이 소년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가야 했다.

아직 세브란을 다섯 포기밖에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부모님께서 항상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레티시아는 강하니까, 약한 사람들을 항상 도와주어야 한다고.

그래서 편찮으신 할머니와 공부 말곤 아무것도 몰라 제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오빠를 야무진 레티시아가 보살펴 주어야 한다고.

이 소년은 분명 레티시아가 보호해 주어야 할 약자였다.

‘내일 열다섯 포기를 찾으면 될 거야.’

레티시아는 소년의 손을 꼭 잡았다.

“빨리 내려가야 해. 여긴 위험하거든. 곰이 나올 수도 있어.”

실언이었다.

요새 산에 곰이 자주 나온다는 패딩턴의 이야기가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때마침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스산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육중한 곰이 덤불을 헤치며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듯한 소리가.

레티시아는 소년을 잡아끌며 빠르게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레티시아의 머릿속엔 다섯 포기밖에 없는 세브란도, 편찮으신 할머니도, 실망할 부모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빨리 이 소년과 함께 산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레티시아와 소년이 돌이 가득한 비탈길을 내려가던 도중이었다.

“악!”

레티시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 동시에 두 아이는 비탈길을 크게 굴렀다.

세브란이 담긴 바구니 역시 레티시아의 여린 손에서 떨어져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진흙투성이가 된 레티시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작은 손이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레티시아의 얼굴에 묻은 진흙과 눈물을 닦아 준 건.

레티시아는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

달빛을 받은 소년의 금발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커다란 눈망울은 레티시아에 대한 걱정 탓에 어두워져 있었다.

“푸, 푸흡.”

레티시아의 웃음이 침묵을 깨트렸다.

소년의 손길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무언가를 닦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서툴고 거칠었다.

역시 날 때부터 애지중지 길러진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소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멈추었다.

“고마워.”

레티시아는 소년의 자그마한 오른손을 쥐며 감사 인사를 한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길에서 완전히 벗어난 탓에 제대로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달빛이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바위 세 개가 만든 틈새에 있었다.

좌우는 바위로 막혔고, 아래는 자칫했다간 굴러떨어져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낭떠러지였다.

레티시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만 한 돌들이 쌓인 한구석으로 다가갔다.

사방이 막혀 있으니, 벗어나려면 기어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이걸 밟고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녀는 돌들을 하나씩 디디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래!”

다소 쉰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레티시아는 말을 전혀 못하는 줄로만 알았던 소년의 목소리에 놀라 황급히 본디의 자리로 내려왔다.

작은 손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

레티시아가 의아해하면서도 소년 쪽으로 움직이는 순간.

수십 개는 될 듯한 돌덩어리들이 그녀가 방금 있던 자리를 덮쳤다.

“……!”

뻣뻣하게 굳은 레티시아의 몸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그녀는 달음박질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소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레티시아는 쉽게 소년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걱정과 안도감이 가득한 얼굴로 레티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소년의 몸을 꽉 껴안았다.

분명 값비쌀 듯한 소년의 옷 역시 레티시아처럼 진흙으로 잔뜩 더러워져 있었다.

“위험하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

“…바구니.”

“그래, 내 바구니처럼 사라질 뻔했지. 네가 아니었다면.”

레티시아는 애써 웃었다. 아니, 웃어야 할 당위성은 충분했다. 그녀는 방금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남지 않았던가.

소년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기뻤다. 그간 레티시아는 종종 말이 늦된 아이들을 봐 왔다. 이 소년도 그중 한 명일 뿐이다.

“이름이 뭐니? 난 레티시아야.”

“…….”

소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레티시아는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사실, 자신이 소년의 이름을 알든 모르든 빠져나갈 수 없는 바위틈에 갇혔다는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의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날이 밝으면 어른들이 자신들을 찾아내거나 빠져나갈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다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험.”

“위험? 뭐가 위험한데?”

레티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소년은 답답한 듯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위험!”

“위험?”

소년은 대답 대신 레티시아를 껴안았다.

‘아.’

레티시아는 소년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녀는 조금 전 소년을 껴안으면서,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소년은 바로 그 말을 하며 레티시아가 소년에게 해 주었던 행동을 원하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소년을 마주 안아 주다,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떨고 있어.’

비에 쫄딱 젖고 진흙에 한바탕 구른 상태이니 당연히 추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자신은 해가 지고 난 이후를 대비해 따뜻한 외투로 몸을 둘렀지만, 소년은 비싸고 얇아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주었다. 소년은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떴지만, 외투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추, 추우면 춥, 춥다고 말해야지.”

레티시아의 말 역시 추위로 떨리고 있었다. 소년은 레티시아를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케르베로스.”

“케르베로스?”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케르베로스는 머리 셋 달린 괴물이었다.

어린애들 겁줄 때나 하는 얘기가 갑자기 왜 튀어나온다는 말인가?

소년은 답답한 모양인지 짜증스러운 얼굴로 외투를 벗었다.

“벗지 마. 춥…….”

레티시아의 말은 끊겼다.

소년이 그녀와 자신의 등을 외투로 서툴게 덮은 탓이었다.

세 살이나 많은 오빠, 패딩턴에게서 물려받은 외투였기에 두 아이가 걸치기에는 충분했다.

외투 한쪽 자락을 꼭 붙든 레티시아는 케르베로스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나의 몸통에 머리가 셋 달린 괴물.

그들은 지금 한 몸통에 머리가 둘 달린 꼴이었다.

“너, 정말 똑똑하구나?”

문득 중얼거린 소리에 소년이 놀란 모양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아침.”

레티시아는 말뜻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고, 시작은 곧 처음이다.

“이런 말을 듣는 게 처음이라고?”

소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레티시아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화법은 할머니와 패딩턴이 심술을 부릴 때 쓰는 화법과 닮은 면이 있었다.

‘이럴 땐 죽어야지……. 내가 오래 살아서 뭐 하겠누. 가뭄 날 밭처럼 목이 타는데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는 손녀딸을 두고 있는데.’ ‘죄송해요. 여기 물 드셔요, 할머니.’ ‘조금 전 물 마시는 것도 못 봤더냐? 아무리 물을 마셔 봤자 이렇게 더우면 목이 타지. 어디 보자, 팔 움직이기도 힘들지만 부채를…….’ ‘제, 제가 부쳐 드릴게요!’

레티시아는 참아 보려고 했으나 할머니와 패딩턴 모두 괴팍하게 굴 땐 견디기가 힘들었다.

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온 부모님에게 울면서 털어놓기만 여러 번.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레티시아를 달래 주었다.

할머니는 편찮으시고, 오빠는 수도의 문관 아카데미에 합격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으니 이해하라면서.

만약 일시적인 상황이라면 견딜 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편찮으셨고, 패딩턴이 아카데미 지원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성인이 되려면 아직 수년이 남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할머니와 패딩턴이 절대 핵심을 얘기해 주지 않고 빙글 둘러서 하는 소리를 바로 알아듣는 법을 익혀야만 했다.

소년이 말하는 방식 역시 둘과 비슷했으나 심술에서 기인하지 않았다는 점이 달랐다.

굉장히 큰 차이점이었다.

레티시아는 외투를 더 꽁꽁 붙들었다. 소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명이 함께 입었다고 옷이 더 두꺼워지는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게도 강렬한 온기가 느껴졌다.

둘은 한 몸처럼 몸을 웅크리며 추위를 이겨 냈다.

아침이 올 때까지.

* * *

“미카엘 님!”

눈이 번쩍 떠졌다. 사방에서 ‘미카엘 님’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슬쩍 바라보니 해가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새벽이었다.

레티시아는 아직도 곤히 자는 소년을 흔들어 깨웠다.

소년은 잠에 취한 눈으로 레티시아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들려오는 ‘미카엘 님!’에 화들짝 놀라며 몸부림쳤다.

“저 사람들이 찾는 게, 너야?”

“…….”

“맞네. 역시 가출이었던 거지?”

“…….”

“그래. 그렇구나…….”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가출한 부잣집 소년이라니.

저렇게 많은 사람이 존칭까지 붙이며 찾고 있는 걸 보니 어쩌면 작위깨나 있는 귀족 도련님일지도 모른다.

“너, 귀족이니?”

“…….”

역시나 긍정을 의미하는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벌떡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귀족 도련님이 산에서 탈이라도 난다면 마을 전체가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여기예요! 여기 있어요!”

발소리들이 곧바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기다!”

미카엘을 발견한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곧바로 그들을 끌어 올렸다.

레티시아를 발견한 누군가가 크게 놀라며 이름을 물어보았고, 그녀는 ‘레티시아 우즈’라고 대답했다.

“네가 미카엘 님과 함께 있었구나. 정말 고맙다.”

그리고 그것이 레티시아가 받은 감사 인사의 끝이었다.

단 몇십 초 만에 레티시아는 인파에 밀려나 미카엘과 완전히 떨어졌다.

귀족의 사병들로 보이는 남자들은 웅성거리며 미카엘을 둘러싸더니,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부지런히 인파의 뒤를 쫓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미카엘은 자신이 말 한번 붙여 볼 수도 없는 귀족 도련님이겠지만, 그래도 마지막 인사만큼은 나누고 싶었다.

마침내 인파는 산을 완전히 내려왔다.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미카엘을 데려가기 위한 듯한 화려한 마차 행렬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고통과 추위, 피로는 하루 이틀 겪는 일이 아니니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그녀에게 신경을 써 주지 않는다는 적막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레티시아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해도, 인파에 완전히 둘러싸여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미카엘에게 전달될 리가 없었다.

레티시아는 눈을 감고 두 손에 고개를 파묻었다. 미카엘이 이곳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방의 소음조차 듣고 싶지 않아 무시하려 애쓰던 때였다.

“레티시아!”

지난밤 내내 떠듬떠듬 들었던 소년의 목소리가 레티시아의 귀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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