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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150)

3화

“레티시아!”

고개를 든 레티시아의 금빛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카엘이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축축한 흙바닥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 한 채 멍하니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이 어린 소년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따돌리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레티시아.”

“미카엘.”

레티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미카엘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더니, 황급히 가슴팍에서 무언가를 떼어 레티시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레티시아가 여태껏 본 그 무엇보다도 값비싸 보이는 브로치였다.

울부짖는 사자를 영롱한 보석들로 표현한 브로치가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거렸다.

미카엘의 옷에 달린 그 어떤 장식보다도 화려한 걸 보니, 이 귀족 도련님에게도 제법 귀중한 물건인 듯했다.

미카엘은 브로치를 쥔 레티시아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초조하게 가리면서 입을 열었다.

“…무덤.”

“무덤?”

레티시아는 멍하니 되묻다가 의미를 깨달았다. 무덤에 묻힌 사람은 영원히 보이지 않게 된다.

미카엘은 브로치를 숨기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만약 이 값비싸 보이는 브로치를 레티시아에게 준 걸 들킨다면, 저자들에게 뺏길 테니까.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브로치를 앞치마 주머니 안에 넣은 다음에야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레티시아의 가슴속에 왈칵, 치솟았다.

“미카엘 님, 저희를 더 힘들게 하지 마십시오.”

성인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을 덮더니 미카엘을 레티시아에게서 거칠게 떼어 냈다.

레티시아는 인파가 미카엘을 다시금 집어삼키고, 화려한 마차 행렬에 모두 탑승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파의 목적은 정말로 미카엘을 데려오는 것 하나였던 모양인지, 순식간에 산 아랫길을 빠져나갔다.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은 다음에야 레티시아는 자신이 작별 인사 한마디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가. 잘 있어. 잘 지내야 해.”

뒤늦게 중얼거려 보았지만 미카엘에게 절대 닿을 리가 없는 말들이었다.

레티시아는 앞치마 주머니 속에 얌전히 들어 있는 브로치를 꺼냈다.

‘부모님께 얘기하면… 기뻐하시겠지.’

이 브로치 하나면 부모님의 오랜 골칫덩어리였던 패딩턴의 문관 아카데미 학비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저 이상한 귀족 도련님과 다시 마주칠 리가 없으니, 팔아 버린다 한들 들키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번만큼은 누구에게도 브로치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미카엘이 얼마나 큰 결심을 하고 자신에게 이 브로치를 주었는지 알았으니까.

레티시아는 허리춤에 찬 복대에 브로치를 집어넣었다.

귀하신 귀족 도련님과는 달리, 누구도 그녀를 찾으러 나오지 않는 집까지 걸어갈 시간이었다.

* * *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열네 살이 되었지만 레티시아의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할머니는 편찮으셨고 오빠 패딩턴은 몇 년 뒤 있을 시험공부에만 온종일 매달렸다.

부모님 역시 모든 집안일을 레티시아에게 맡겼다.

“…휴.”

레티시아는 이마에 방울방울 맺힌 땀을 건성으로 훔쳤다.

푹푹 찌는 여름날 세브란을 캐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원한 집 안에 있을 패딩턴과 할머니가 부러웠지만, 둘 다 나름대로 힘든 상황에 부닥쳐 있었기에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가 빨리 캐서 집에 일찍 돌아가면 되는 문제야.’

레티시아는 계속해서 세브란을 캐는 데 매진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급작스런 소나기였다.

다행히 세브란을 열한 포기 캐어 내려갈 채비를 하던 차였다.

레티시아는 서둘러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르릉, 쾅!

하늘이 번쩍하더니 곧바로 천지가 진동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번개가 치자마자 천둥소리가 들린다는 건, 벼락이 바로 근처까지 왔다는 의미였다.

레티시아는 복대에서 브로치를 꺼내 꽉 쥐었다. 그간 이 산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던 시간은 오직 미카엘과 함께했던 그 하룻밤뿐이었다.

따라서 이 브로치를 쥐고 있으면 미카엘의 손을 잡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제는 달려야 할 때였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빗줄기가 거셌지만, 레티시아는 넘어지고 구르면서 산을 뛰어 내려갔다.

그간 벼락을 맞아 시커멓게 타오른 나무들을 여럿 보아 왔다.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레티시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겨우 산 아랫길에 발을 디딘 순간, 벼락이 그녀를 강타했으니까.

통나무처럼 쓰러진 레티시아는 고통에 겨워 신음했으나 누구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통에 몸부림치던 레티시아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쩍 떠올랐다.

오늘 새벽, 레티시아가 만든 도시락을 들고 집을 나가던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그다음은 바로 어젯밤, 발에 생긴 물집을 터뜨리던 기억이었다.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자신은 사람이 죽기 직전 스쳐 지나간다는 일생의 기억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짧고 단조로웠기 때문에 모든 기억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제, 정말로 죽는구나…….’

레티시아가 완전히 체념했을 때였다.

‘……!’

도저히 믿기지 않은 기억이 머릿속에 박혔다. 자신은 이미 죽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괴물에 의해서.

‘괴물이, 아니야.’

레티시아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었다. 아니, 그때는 레티시아가 아닌 다른 이름이었다.

다른 이름, 다른 세상, 다른 삶…….

레티시아는 전생의 자신이 무척 좋아하던 소설의 기억을 보았다. 그 소설의 세계는 레티시아의 세계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기억은 마치 그 소설 말곤 아무것도 중요치 않다는 것처럼 소설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비추었다.

‘패딩턴이야!’

패딩턴에 관한 구절을 발견하면서, 레티시아는 그 소설이 정말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망스럽게도 패딩턴은 그 소설에서 흔하디흔한 악당으로 등장했다.

문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제법 직급이 높은 문관이 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뇌물을 밝히고 심성이 음험해 사사건건 여주인공의 앞길을 막는 악덕 상사.

조금 지나지 않아 레티시아에 관한 구절도 머리에 들어왔다.

레티시아는 패딩턴이 문관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까지는 집안일만 하며 살았다.

하지만 패딩턴이 합격 통지서를 받자마자 곧바로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의 하녀가 되었다.

모든 월급을 패딩턴의 학비와 할머니의 약값에 보태기 위해서.

패딩턴이 문관 아카데미를 졸업했을 땐 레티시아는 이미 혼기를 놓친 상태였다.

하지만 하녀는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었고 레티시아는 집안일을 잘했기 때문에 풍족하지는 않아도 만족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매번 부모님이나 패딩턴이 모아 둔 돈을 온갖 핑계를 대어 가며 가져가지 않았다면.

순진한 레티시아는 주변인이 말려도 가족이 아니면 누가 돕느냐면서 가진 돈을 모두 내주었다.

심지어 소설 속에선 패딩턴은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는 레티시아의 장례식까지 짤막하게 언급되었다.

찌질한 악당에게 평생 등골을 빼먹힌 불쌍한 여동생.

그게 레티시아 우즈였다.

기억은 삽시간에 끝났다.

레티시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여전히 세찬 빗줄기가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몸은 뻣뻣하기만 할 뿐 더 이상의 고통이나 상처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는 기쁨이나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것에 대한 의문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에 통째로 들어앉은 새롭고 낯선 기억을 감당하기도 힘들었으니까.

레티시아는 한참 동안 빗속에 그저 서 있었다.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추위와 고통이 이 세계 역시 진짜 세계라는 것을, 단순한 활자 속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빗물과 뒤섞여 아래로 흘렀다.

‘차라리 이 모든 게, 다 가짜였으면…….’

빗속에서 레티시아는 자기 자신의 삶 자체가 누군가가 꾸며 낸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결국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게 현실이며, 레티시아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녀를 평생 이용하리라는 사실을.

툭.

오른팔에 힘이 풀려 세브란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진흙탕에 떨어졌다.

레티시아는 반사적으로 바구니를 주우려다 허리를 숙인 그대로 얼어붙었다.

세브란에 대한 사실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약에 필요한 세브란은 한 달에 백 포기 정도.

레티시아는 쉬는 날 없이 매일같이 세브란을 캐러 나갔기 때문에 한 달에 적어도 삼백 포기는 캐서 집으로 가져왔다.

‘나머지 세브란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여태까지 한 번도 든 적 없는 의문이었으나, 지금은 여태까지 궁금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였다.

세브란은 값비싼 약재였다. 그걸 과연 고스란히 보관만 해 두었을까?

“아니야!”

레티시아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건, 잘못된 생각이야.’

죄책감이 레티시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작게 주먹을 말아 이마를 콩콩 쳤다.

자신은 어느덧 부모님을 의심하고 있었다.

책 속에서 그녀에게 부당하게 군 건 오직 패딩턴뿐이었다.

부모님 또한 레티시아가 모아 둔 돈을 가져갔다고 언급되긴 했으나, 정말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전부 미래의 일 아닌가.

레티시아는 진흙탕에 처박힌 바구니를 바라보며 잠시간 망설이다가, 결국엔 주워 들었다.

‘집에 가자.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안락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할머니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반겼다.

“세브란은?”

아니, 세브란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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