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여기 있어요.”
레티시아는 머뭇거리며 바구니를 건넸다.
진흙에 한바탕 뒹군 듯한 바구니와 비에 젖어 엉망진창으로 물러진 세브란을 본 할머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심성 없기는. 이 할미가 죽기만 바라는 모양이구나.”
“아니에요!”
“그럼 왜 이 모양 이 꼴로 세브란을 간수했지? 앞으론 그냥 나가지 말아라. 내가 직접 캐는 게 더 낫겠다. 그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그게 바로 네가 원하는 거겠지.”
할머니의 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저, 크게 굴러서…….”
“굴렀다고?”
할머니는 그제야 레티시아 역시 진흙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그녀를 훑어보았다.
“에구머니나, 레티시아! 그러다 감기라도 걸려서 옮기면 어떻게 하려고! 네 정녕 내가 죽길 원하는 모양이구나.”
“저, 저는…….”
레티시아는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야말로 벼락에 맞아 죽을 뻔했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매몰차게 레티시아의 말을 끊었다.
“얼른 옷 갈아입고 이 진흙들 좀 닦아라. 패딩턴이 잠시 쉬러 나왔다가 밟을까 봐 무섭구나.”
할머니는 손을 휘휘 내저었는데,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신호였다.
레티시아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아…….”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았지만 울음 섞인 신음은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가 레티시아를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차가운 진실이, 비수처럼 박혔기에.
분명 자신의 꼴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를 맞으며 진흙탕에 오래 쓰러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할머니의 입에선 레티시아를 걱정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오직 꾸중과 명령뿐.
레티시아는 그나마 깨끗한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대충 훔쳤다.
‘어머니, 아버지를 기다릴래. 그리고 말하겠어. 산에서 세브란을 캐는 건 이젠 싫다고, 집안일은 하겠지만 나를 싫어하는 할머니를 돌보는 것도 싫다고…….’
레티시아는 옷을 갈아입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깨끗한 옷마저 진흙투성이가 될 게 뻔했다.
그녀는 흙투성이 신발과 앞치마만 벗어 둔 채 방을 나섰다.
낡은 수도 펌프는 끼익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깨끗하고 차가운 물이 나왔다. 레티시아가 서둘러 진흙을 씻어 내던 중이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레티시아를 밀쳐 내고 펌프 앞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비켜.”
패딩턴이었다.
그는 아직 진흙을 뚝뚝 흘리는 레티시아는 본체만체하고서 집 안에서 제일 커다란 물통에 물을 한가득 받기 시작했다.
“지, 진흙만 좀 씻어 내고 싶어. 오늘 세브란을 캐다가 크게 굴렀거든. 봐 봐, 머리에 진흙 잔뜩이잖아.”
평소라면 패딩턴이 용무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새로운 기억을 얻고 나니 전처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에 진흙이 굳으면 떼어 내기가 힘들어져서…….”
“그럼 이참에 자르든가. 어차피 보기 싫은 머리, 짧게라도 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레티시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타오르는 듯한 새빨간 머리는 어릴 적부터 패딩턴이 그녀를 놀려 먹는 소재 중 하나였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금발이나 갈색 머리였고, 옛날 옛적에 돌아가셔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외할머니만이 레티시아와 같은 빨강 머리라고 들었다.
패딩턴은 한참 동안 물통에 물을 받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오늘 점심 영 별로더라. 저녁은 제대로 좀 해.”
“…안 해.”
“뭐라고?”
“저녁, 안 한다고.”
패딩턴은 열심히 펌프를 움직이던 손을 멈춘 채 레티시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레티시아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곤해. 오늘 크게 다칠 뻔했고. 잘 거야.”
“피곤하다고 저녁을 안 차리겠다고? 그럼 다들 굶으라는 소리야?”
“직접 차려.”
기묘한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레티시아는 단 한 번도 패딩턴과 싸워 본 적이 없었다.
패딩턴의 무리한 요구들에 불만을 가진 적이 적지 않았지만, 공부하느라 힘들 거라는 생각에 대충 맞춰 주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레티시아는 패딩턴이, 그리고 부모님이 모르는 사실을 알았다.
패딩턴은 차라리 문관 아카데미에 합격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는 뇌물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않는 나라의 암 덩어리가 될 예정이었으니까.
패딩턴의 대답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미쳤냐?”
레티시아는 대답 대신 패딩턴이 물을 받던 물통으로 성큼 다가섰다. 깨끗한 물이 물통 가득 찰랑거리고 있었다.
‘…….’
레티시아는 잠시 물을 노려보다가, 진흙 탓에 잔뜩 엉킨 머리칼을 그대로 집어넣었다.
“너!”
패딩턴이 곧바로 레티시아를 밀쳐 냈지만, 이미 그가 열심히 펌프를 움직여 받은 물통 속 물은 진흙으로 더러워진 상태였다.
레티시아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목덜미 뒤로 넘겼다. 통쾌함과 미약한 죄책감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 목덜미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떠오르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아직도 이 물이 필요해?”
“이, 이게……. 완전히 돌았네.”
패딩턴은 화가 나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만 달싹였다가 물통조차 내버려 둔 채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레티시아는 패딩턴이 ‘어머니, 아버지’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레티시아는 그가 조금 전까지 있던 자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물통 속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칼에 묻은 진흙들을 모두 씻어 내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레티시아는 자유를 느꼈다.
“레티시아!”
곤하게 잠에 빠져 있던 레티시아는 낡은 문짝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어, 어머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딱딱하게 굳은 부모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레티시아는 그제야 ‘어머니, 아버지’라고 중얼거렸던 패딩턴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 깨달았다.
지친 레티시아가 곤히 잠든 사이 일을 마친 부모님이 돌아오셨고, 패딩턴이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친 것이다.
그다지 화가 나거나 놀라지는 않았다. 분명 패딩턴이 할 법한 짓이었으니까.
‘어떻게든 버텼어야 했는데.’
일찍 잠들어 버려 자신을 항변하지 못한 게 아주 조금, 후회될 뿐이었다.
어머니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패딩턴에게 얘기 다 들었다.”
“할머니에게도 무례하게 굴었다는구나.”
아버지의 묵직한 음성도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잠에 빠진 동안 할머니와 패딩턴이 이미 자기들 좋을 대로 얘기를 다 해 놓았을 것이다.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 일어난 일들만 두고 보면 적어도 패딩턴에게는 무례하게 군 게 맞기는 했으니까.
‘그래도 할머니에게는 잘못한 게 없는데…….’
하지만 레티시아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하나를 잘못한 것과 열 개를 잘못한 건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네.”
“레티시아, 대체 왜 그랬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여태까지 레티시아를 달래 왔던 투와는 거리가 먼, 다그치는 투였다.
레티시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갑작스럽게 얻게 된 기억이 아니더라도 할머니와 패딩턴에게는 쌓인 게 참 많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다른 문제였다.
만약 그동안 레티시아를 잠시나마 달래 주고 칭찬해 주는 부모님이 없었다면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마저도 레티시아는 부모님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해요.”
“레티시아.”
아버지가 허리를 굽혀 레티시아와 눈을 맞추었다.
“힘들다고 가족에게 화풀이해선 못써.”
“…….”
“레티시아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나이가 많을수록 더 힘든 법이란다. 다들 레티시아보다 훨씬 힘들면서도 참고 있어요.”
“…….”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가슴 역시 속이 답답해서 꽉 막히는 듯했다.
여태까지 레티시아는 가족 중 자신이 가장 덜 힘들다는 말을 믿어 왔다.
하지만 새로운 기억이 그 말만큼은 완전히 거짓부렁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건… 아니야.’
아버지는 레티시아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오해했는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입 밖으로 시시각각 나오는 말과는 달리, 손길만큼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 이번 한 번만큼은 봐주마. 어서 가서 네 오빠와 할머니께 사죄하거라.”
“…….”
레티시아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아버지가 다시 한번 그녀를 재촉했다.
“레티시아?”
“…저, 힘들어요.”
“뭐?”
“힘들다고요!”
레티시아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새벽에 제가 제일 먼저 일어나잖아요. 두 분이 출근하시기 두 시간 전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만들어야 하니까! 낮 동안은 산에서 온종일 세브란을 캐고, 돌아오면 온갖 집안일들이… 쌓여서…….”
레티시아는 말을 하면 할수록 이 모든 것들이 진작 말했어야 했던 일들임을 깨달았다.
자신은 새로운 기억 때문에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기억은 원래 있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에 불과했다.
원래부터 레티시아는 힘들었다. 버텨 내기 버거울 정도로. 철이 들기도 전부터 해야만 했던 고된 노동의 대가라곤 부모님의 칭찬이 전부였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칭찬조차 레티시아가 어렵고 고된 일을 해내었을 때에만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레티시아!”
어머니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레티시아를 껴안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구나.”
“…어머니.”
“우리 딸… 얼마나 힘들었니?”
뜨거운 눈물이 레티시아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역시 어머니만큼은 자신을 이해해 주었다.
레티시아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가시 돋치고 상처 입은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을 때까지.
“이, 이제 괜찮아요.”
흥분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레티시아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어머니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구나. 이제 네 오빠와 할머니께 사과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