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50)

5화

“…어, 어머니.”

레티시아는 말을 더듬었다.

눈엔 다시 눈물이 차오르고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비집고 울컥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가 마비라도 된 것처럼 제대로 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가슴의 통증만이 또렷하게 각인될 뿐이었다.

“레티시아, 왜 그러니?”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레티시아는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엄마가, 할머니와 오빠 편을 들어서 화가 난 거니?”

말문이 더더욱 막혔다. 조금도 진실에 가깝지 않은 추측이었다.

어머니는 레티시아의 침묵을 긍정으로 착각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레티시아, 철 다 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한참 멀었네.”

“그러게 말이야.”

옆에서 아버지가 한마디 거들었다.

“얼른 가서 사과하거라. 특히 패딩턴에게.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일일이 알려 주어야 알겠느냐?”

“레티시아, 어리광은 충분히 부렸잖니. 이쯤에서 고집을 꺾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부모님의 목소리에선 레티시아에 대한 애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반항에서 기인한 의아함과 짜증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결국, 레티시아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엉망이 되었을 얼굴이 창피했지만 감정의 급류는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다고 다 네 뜻대로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거라.”

뱃속이 부글거렸다. 이번엔 단순한 억울함이 아니었다.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대여섯 살 이후부터 레티시아는 울어서 무언가를 얻어 본 적이 없었다.

레티시아의 가족보다 더욱 벌이가 좋지 않은 집안의 아이들도 축일이면 수수깡 인형을 하나씩 쥐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산에서 세브란을 캐다 떠들썩한 산 아랫목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온종일 일만 하는데, 울어서든 다른 방법으로든 원하는 걸 얻은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겠는가?

아버지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한 어머니가 레티시아를 다시금 달래 보려고 시도했다.

“레티시아, 힘든 건 충분히 안단다. 엄마는 항상 친구들에게 자랑하는걸? 우리 딸, 레티시아만큼 착한 아이는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

“그래도 힘든 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란다. 패딩턴도,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힘들어요. 레티시아보다 훨씬 더 많이 고생하고 있단다. 바로 레티시아를 위해서.”

머리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태까지 레티시아를 어르고 달래 착한 아이의 틀에 가두었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소리였다.

“저보다 훨씬 더, 고생하고 있다고요?”

레티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새로운 기억에서조차 레티시아는 부모님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레티시아보다 훨씬 고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패딩턴과 할머니 또한 레티시아보다 고생하고 있다는 건 분명 틀린 소리였다.

그들이 그들 나름의 고생을 하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자신은 지옥에서 끝날 기약이 없는 고문을 받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래. 이 모든 것에 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자신이 지금 받는 부당한 대우에 시한이 정해져 있다면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족 전체를 위한 희생은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레티시아는 가족들을 사랑했으니까. 심지어 패딩턴과 할머니까지도 어느 정도는 사랑했다.

하지만 새로운 기억은 레티시아에게 뼈아픈 미래를 보여 주었다.

할머니는 레티시아보다도 오래 살았다. 패딩턴은 문관 아카데미에 합격하고 난 이후에도 레티시아가 벌어 오는 돈을 주머니에 챙겼다.

부모님 또한 레티시아의 미래를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았다.

“그럼 패딩턴에게 제 일을 시키세요. 제가 패딩턴처럼 공부할 테니까!”

“레티시아 우즈!”

아버지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버릇이더냐!”

어머니가 레티시아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레티시아, 아빠가 화나셨잖니. 어서 죄송하다고 빌어라.”

들끓던 피가 서서히 식었다. 레티시아는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저를 위해서 고생하고 있다고요? 그 반대가 아니고요?”

“그, 그게 무슨…….”

“이 집의 대체 누가, 절 위한 일을 해 주나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도 없었다.

레티시아는 매일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 그리고 자신이 세브란을 캐러 산에 간 사이 가족들이 먹을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다.

빨래와 청소 등 손이 많이 가는 집안일 역시 레티시아의 몫이었다.

키가 어느 정도 자라자 부모님은 레티시아에게 새 옷을 사 주는 대신, 어머니의 옛날 옷과 패딩턴에게 작아진 옷을 입혔다.

패딩턴은 매년 생일에 좋아하는 음식과 학용품을 받았지만, 레티시아의 생일엔 사랑한다는 입맞춤 한 번이 축하의 끝이었다.

레티시아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의 싸늘한 엄포만이 내려졌을 뿐이었다.

“패딩턴이 과장한 줄 알았더니… 정확하게 봤구나. 레티시아, 어디서 헛바람이 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외출은 금지다.”

“세브란은요? 제가 매일 열 포기를 캐 오지 않으면, 할머니께서 돌아가신다면서요? 그것도 거짓말이었나요?”

찰싹!

레티시아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기묘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눈앞이 번쩍하는 동시에 왼쪽 뺨이 화끈거렸다.

잠시 후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레티시아에게 손찌검한 적이 없었다.

허구한 날 매 맞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마을 대다수의 집과 달랐기에, 레티시아는 그 사실을 제법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얼얼한 뺨이 그간 폭력의 부재가 결코 부모님의 배려나 됨됨이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저 체벌을 가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레티시아 우즈는 그동안 그 어떤 요구에도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따르는 착한 딸이었으니까.

하지만 의문을 가지고 반기를 드는 딸 따윈 그들에겐 찍어 눌러야만 하는 자식에 불과했다.

레티시아는 몸과 마음 모두가 화끈거릴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알려 주세요. 왜 이제는 제가 세브란을 캐 올 필요가 없는지, 그동안 제가 열심히 캐지 않으면 할머니가 돌아가신다고 하신 건 거짓말이었는지!”

“혓바닥이 길구나.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우습게도 그 말을 들은 순간, 레티시아는 아버지가 그녀의 의구심이 맞다고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부 사람에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는 뜻이었으니까.

레티시아는 조금 더 아버지를 자극해 보기로 결심했다.

“누군지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산지기냐, 아니면 사냥꾼? 내 그놈들을……!”

울화통을 터뜨리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눈치를 준 다음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방금 말로 레티시아의 추측이 맞다는 걸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는 걸 불현듯 깨달은 듯했다.

아버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차가운 시선으로 레티시아의 방을 한 바퀴 훑었다. 작은 창문조차 없는, 창고나 다름없는 방.

“반성할 때까지 이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올 생각 하지 말아라.”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레티시아는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새로운 기억은 그녀에게 미래를 알려 주었지만, 현재가 얼마나 냉혹한지까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바보 같은 희망을 품었었다. 진심으로 얘기한다면 사랑하는 부모님이 자신을 이해해 주리라는.

하지만 방금 부모님과의 대화를 통해 레티시아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게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나, 완전히 멍청이였구나…….’

다시금 눈시울이 붉어졌다.

새로운 기억 일부가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전 삶의 기억이었다.

이전 삶의 그녀 또한 레티시아와 비슷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났다.

아니, 더욱 끔찍한 부모였다.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부터 단순한 화풀이를 위해 폭력을 가했으니까.

하지만 그 삶에서의 그녀는 레티시아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독립하여, 집과 연락을 완전히 끊은 것이다.

‘나도 그렇게 해야 해.’

하지만 레티시아는 도저히 전생의 자신처럼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가족들의 맨얼굴을 알게 되니 다시는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 밑에서 숨죽여 살아야 할 매분 매초가 독약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가출…….’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간 용돈이라곤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땡전 한 푼 없었다.

몇 년째 패딩턴만이 나이가 세 살 많다는 이유로 용돈을 받았다. 레티시아에겐 여유가 생기면 주겠다는 어머니의 미안해하는 말뿐이었다.

부모님이 쫓아올 수 없을 정도로 마을에서 멀리 떠나기만 하면 일자리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집안일이 능숙한 어린 하녀를 구하는 집은 많을 테니까.

만약 세브란을 캐야 하지 않았다면 레티시아는 진작 어느 부잣집의 하녀로 들어갔으리라.

문제는 마을을 떠날 방법이었다.

별 준비 없이 떠났다가는 산속을 굶주리며 헤매다 짐승에게 물려 죽을 게 뻔했다. 지금 레티시아의 수준엔 돈 한 푼 없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레티시아는 한참 동안 방 안을 서성이며 고민했다.

사실, 해결책은 금방 머릿속에 떠올랐다. 레티시아는 집 안 전체를 청소했기에 패딩턴이 여태까지 모은 용돈을 어디 두는지 알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 순순히 사과하고,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가 집 안 청소를 한다면 패딩턴의 돈을 몰래 가져가는 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울 것이다.

하지만 도둑질은 정말 내키지 않았다. 설령 그 돈이 레티시아가 하루 종일 캐서 가져온 세브란을 팔아 번 돈일지라도.

레티시아는 한참 동안 출구 없는 문제 속에서 헤매었다.

‘……!’

금안이 반짝 빛났다.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묘안이 떠올랐다.

그녀는 도둑질을 하지도, 돈 한 푼 없이 굶주리며 낯선 지방을 헤매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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