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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150)

6화

패딩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세등등한 얼굴로 동생,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벌레 한 마리 못 눌러 죽일 정도로 착하고 멍청한 동생이 느닷없이 달려들길래 놀랐지만, 역시 잠깐의 변덕이었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는 레티시아는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였다.

“저, 정말 죄송해요……. 미안해, 패딩턴.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그렇다고 하니 다들 레티시아를 용서해 주자.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는 법이잖니. 레티시아도 많이 반성하고 있을 거야.”

잔잔한 미소를 띤 그들의 부모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더욱더 푹 숙였다. 마치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저… 말 몇 마디로는 도저히 주워 담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어요. 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레티시아!”

그들의 어머니는 정말로 감격한 듯했다.

“우리 착한 딸. 하지만 그렇게 상심할 필요 없단다. 여태까지 잘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해 주면 돼. 어렵지 않지?”

“여태까지 제가 해 온 건 그저 당연한 것들이잖아요. 전 더 도움이 되고 싶어요.”

패딩턴의 입술이 비틀렸다. 레티시아는 항상 저렇게 제 무덤을 팠다.

물론, 레티시아의 무덤이 깊으면 깊을수록 패딩턴에겐 이득이었기에 여태껏 지적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레티시아가 더 열심히 하겠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환영이란다. 도와줄 수 있는 힘껏 도와줄게.”

“저, 정말이에요?”

“그럼.”

어머니는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자, 이제 그만 들어가 자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야 하잖니?”

하지만 레티시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 돈을 벌어서… 패딩턴의 아카데미 학비에 보태고 싶어요.”

“레티시아, 넌 너무 어리잖니. 아직 돈을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제니퍼도 얼마 전에 자작가 하녀로 갔다고 들었어요. 저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레티시아는 발개진 눈을 손으로 비볐다.

“아까 방에서 많이 반성했어요. 제가 그동안 너무 철이 없었나 싶어서……. 이젠 정말로 도움이 되고 싶어요.”

패딩턴은 코웃음을 치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레티시아는 항상 멍청했지만, 이번만큼은 실소를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제 발로 하녀가 되어 자신의 학비에 보태겠다고?

그렇지 않아도 최근 세브란의 노지 재배가 늘어났다며 걱정하는 부모님의 대화를 들은 적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레티시아가 캐 오는 세브란을 팔아 쏠쏠한 수익을 얻었다.

하지만 최근 세브란의 노지 재배가 늘어난 탓에 시가가 떨어져 예전의 반절도 안 되는 수익을 겨우 얻을 뿐이었다.

앞으로 세브란의 가격은 더더욱 떨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레티시아가 느닷없는 반항을 좀 하더니, 제 발로 하녀가 되겠단다.

심지어 그 월급을 모두 순순히 내놓겠다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패딩턴이 느끼는 건 오직 조소뿐이었다.

‘멍청한 것.’

패딩턴은 항상 멍청한 사람들을 경멸해 왔다.

백치 수준으로 순진한 여동생은 이용하기 편한 존재였지만, 하나뿐인 형제라는 사실이 이따금 수치로 느껴지곤 했다.

‘하기야 본인이 저러니 누구를 원망하겠어.’

* * *

바로 그다음 날.

레티시아 우즈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의 하녀가 되었다.

고용주는 혼자서 어른 두 사람 몫은 해내는 레티시아의 평판을 알았기에 월급을 제법 후하게 쳐주었다.

우즈 일가는 그녀가 이제 다달이 고스란히 가져다줄 월급을 생각하며 기뻐했다.

하지만 단 한 달 만에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레티시아 우즈는, 첫 월급을 받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Chapter 2. 집 나가면 안 고생

“열여섯 살이라고? 그렇게 안 보이는데.”

제퍼슨 남작가의 하녀장, 샐리 모트는 깐깐한 눈매로 레티시아를 훑어보듯 바라보았다.

“저희 집안이 원래 키가 작아서요.”

레티시아는 곧바로 받아쳤지만 콩닥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집에서 공부만 하는데도 키가 껑충하게 큰 패딩턴과 달리, 그녀는 고향 마을의 또래 여자아이 중 가장 몸집이 작았다.

샐리는 전혀 납득하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결국엔 채용 서류를 건네주었다.

“하기야 우리도 지금 뭘 가릴 처지가 아니지. 이름은 쓸 줄 알지? 여기 써.”

운 좋게도 레티시아는 읽고 쓰는 법과 간단한 산수를 산골 아이들을 위한 반년짜리 이동 교실에서 배웠었다.

“적힌 것처럼, 석 달을 못 버티고 나가면 급여는 전부 몰수다. 도망쳤다간 다시는 이 나라에 발 못 붙이게 해 줄 수 있으니 그렇게 알도록.”

“알겠습니다.”

“다른 질문은 없고?”

“없습니다.”

샐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지원자들과 달리 항의하지 않는 레티시아가 마음에 들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는 항의를 듣는 것도 지겨웠고, 싫으면 방금 서명한 서류 찢고 나가라는 뻔한 대답을 해 주는 것도 넌덜머리가 났던 참이었다.

물론 아예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까막눈이 아니라는 점도 무척 마음에 드는 요소였다.

이 정도면 공고한 나이보다 몇 살 어린 정도는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이번 신입은 쓸 만하겠어.’

“베스!”

샐리는 ‘베스’라는 하녀를 소리쳐 불렀다.

금방 나타난 베스는 깐깐한 눈매가 샐리와 똑 닮아, 혹시 친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신입 좀 데려가.”

“어디로 배치할까요?”

“빈자리 아무 데나.”

“네.”

베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레티시아의 등을 살짝 밀며 재촉했다.

“어서 가자. 일손이 급해.”

쾅.

그들의 등 뒤로 문이 닫혔지만 베스는 복도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레티시아를 훑어보았다.

“두 살 속였군.”

“…….”

“상관없어. 수도에서 열두 살처럼 보이는 열네 살짜리를 받아 줄 곳은 여기밖에 없을 테니, 열심히 하겠지.”

베스의 말이 맞았다.

레티시아가 샐리가 말한 조건에 항의하지 않았던 이유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부잣집에서 받은 첫 월급은 수도에 올라오고 일자리를 찾는 일주일 동안 물 흐르듯 빠져나갔다.

그동안 레티시아는 하녀를 구하는 모든 곳에 지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몸집이 작은 그녀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고용주들은 진짜 나이를 말하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레티시아는 시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식자재를 사던 하녀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제퍼슨 남작가에서 또 세 명이 뛰쳐나왔대.’ ‘사람이 남아 있기는 해?’ ‘돈이야 많이 주니까.’ ‘많이 주면 뭐 해. 새 남작 부부가…….’ ‘쉿.’

그 이후 그들은 날씨 얘기로 화제로 돌렸지만 레티시아는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었다.

레티시아는 바로 제퍼슨 남작가를 수소문했다. 제퍼슨 남작가는 귀족 가문이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력 사무소에서는 취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인력난으로 인해 추천서 한 장 없는 지원자들도 모두 받아 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들 모두,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한 달 만에 제 발로 튀어나왔지만.

레티시아는 베스에게 최대한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하려 애썼다.

“열심히 할게요.”

“석 달 뒤에도 여기 남아 있으면, 그때 그 말을 믿어 주지.”

“믿게 해 드릴게요.”

베스는 코웃음을 치며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으리으리하지만 세심하게 관리가 되지 않은 티가 나는 남작저의 회랑을 지났다.

“청소, 요리. 골라 봐.”

“요리가 좋아요.”

레티시아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평생을 하녀로 일할 생각은 없었다. 먹고살기엔 지장이 없을지 몰라도 돈을 많이 벌기엔 부족한 직업이었으니까.

전생의 기억은 레티시아에게 한 가지 진리를 알려 주었다. 돈을 벌어라, 그러면 모든 게 따라올 테니.

레티시아는 하녀로 일하며 돈을 모으다, 성인이 되면 작은 식당이나 카페를 열 생각이었다.

다양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남작저의 부엌 하녀로 시작해서, 더 나아가 요리사가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 베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안하게 됐는데, 어떻게 하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레티시아는 금방 이어질 말을 알아차렸다. 베스는 레티시아를 절대, 부엌으로 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넌 청소 일을 하게 될 거야.”

“청소도 좋아요.”

레티시아는 실망감을 삼키며 방긋 웃어 보였다. 이곳에서 오래 버티다 보면, 원하는 자리로 갈 기회도 올 것이다.

지금은 고향에서 받은 월급의 세 배나 주는 남작저에서 버티는 게 최우선이었다.

“원랜 옷을 지급하는데… 넌 너무 작아서 맞는 옷이 있을지 모르겠네. 찾아보고 있으면 줄게.”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잘 버텨 봐.”

베스는 문을 하나 열더니 레티시아의 등을 밀치듯 밀어 넣었다.

넘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균형을 잡으니, 레티시아보다 머리가 하나 정도 더 큰 하녀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티시아는 밝게 인사했다.

“레티시아 우즈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갈리 엔더.”

갈리는 인사 하나 없이 자신이 쥐고 있던 걸레를 건네주었다.

“닦아.”

레티시아는 그제야 자신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응접실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작저의 응접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생긴 지 오래된 듯한 얼룩들은 덤이었다.

“여기 청소만 끝나면 쉬어도 좋아.”

“제 방은 어딘가요?”

“우리 방은 4층에 있어. 빈 침대 아무 데나 자리 잡으면 돼.”

갈리는 남는 걸레를 집어 들고는 높은 장식장과 화장대를 닦기 시작했다. 자연히 나머지는 레티시아의 몫이 되었다.

한 시간 후.

레티시아는 창문을 정성 들여 닦고 있는 갈리에게로 다가갔다.

“손이 닿는 데는 다 닦았어요. 더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벌써?”

갈리가 놀란 듯 치켜뜬 눈으로 응접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먼지 한 톨 없이 광이 나는 응접실이 눈에 들어왔다. 갈리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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