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50)

7화

“네.”

딱딱하던 갈리의 태도가 풀어졌지만, 레티시아는 칭찬에 기뻐할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바로 달콤한 칭찬 때문이 아니었던가.

갈리는 떨떠름해하는 레티시아의 반응은 눈치채진 못한 듯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오래 버티면 좋겠다.”

“갈리는 오래 있었어요?”

“1년.”

갈리는 반짝반짝 광이 나는 창문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구정물로 가득한 양동이를 집어 들었다.

“첫날이니 이만 가서 쉬어. 고용인 층계를 따라 4층까지 올라가면 고용인들이 쓰는 방들이 보일 거야. 우리 방은 제일 좌측 여섯 개니까, 개중 빈 침대를 고르면 돼. 침대가 전부 비어 있는 방은 쓰지 말고.”

“물은 제가 버릴까요?”

“괜찮으니까 얼른 가서 쉬어. 아직 저택 구조도 잘 모를 테니까.”

“고마워요.”

“별걸 다 고마워한다.”

갈리는 툴툴거리며 먼저 응접실을 나서더니 레티시아에게 고용인 층계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레티시아는 층계를 오르면서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남작저는 레티시아가 일했던 부잣집보다 몇 곱절은 컸다. 내부 장식 역시 그에 걸맞게 으리으리했다.

하지만 도저히 귀족의 저택으로 보이지 않았다. 먼 옛날엔 귀족의 저택이었던 곳이라면 모를까.

사람 손이 닿기 힘든 곳엔 하나같이 먼지가 한가득 쌓였고, 거미줄도 곳곳에 보였다.

일을 하는 고용인은 있으나, 수가 부족하고 꼼꼼하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4층에 도착한 레티시아는 하녀들에게 배정된 방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방 두 개는 완전히 비어 있었고, 나머지 방들엔 남는 침대가 두 개씩 있었다.

레티시아는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방을 골랐다. 그녀는 침대에 고된 몸을 뉜 채 오늘 하루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이 정도니까 나를 뽑은 거구나.’

그 말은, 이 정도 수준의 저택이 아닌 다음에야 수도에 레티시아가 갈 곳은 없다는 말이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버텨야 해.’

제퍼슨 남작저는 한번 나간 고용인은 다시는 받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샐리와 베스, 갈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샐리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지만 하녀장인 이상 신입 하녀인 자신과 마주칠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하녀들을 관리하는 건 베스처럼 보였는데, 심술궂은 사람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갈리의 경우 첫인상은 무뚝뚝했지만 친절했다.

‘베스의 마음에 들어야겠어.’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잘 수 있을 때 자 두어야 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세브란을 캐고 집안일을 하며 깨달은 철칙이었다.

* * *

“더는 못 하겠습니다. 차라리 벽 보고 말하는 게 낫겠다고요!”

“개니트 경, 조금만 참아 보심이…….”

“저 바보가, 이 나라의 황태자라니!”

개니트는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벽에도 귀가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개니트는 멈추지 않았다.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호르헤 경도 어서 살길을 찾으십시오. 저 바보 황태자만 믿고 있다간, 언젠가 목이 날아가거나 비렁뱅이로 길바닥에 나앉을 겁니다.”

“미카엘 전하께선 바보가 아닙니다.”

개니트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 세상에 오직 호르헤 경 한 명뿐일 겁니다.”

“…….”

개니트는 의기양양하게 사라졌다.

‘개자식.’

호르헤 볼머는 개니트의 뒷모습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이래서 학자들은 안 돼.’

칼 한번 들어 보지 않고, 오직 학문에서의 업적만을 가지고 기사 작위를 받은 학자 나부랭이가 충성심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호르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두가 미카엘이 미쳤거나, 최소한 지능이 떨어지는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르헤의 생각은 달랐다.

현 황제와 오촌 관계였던 미카엘의 아버지는 그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이리저리 치이는 게 정상인 방계 황족이 공작가의 기상을 위협할 정도로 떵떵거리며 잘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증거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잘산 게 문제가 되었다.

미카엘의 부모는 어느 날 의문사했고, 갓난아기였던 미카엘은 그날로 황제의 명에 의해 시골의 별장에서 극비리에 키워지게 되었다.

그게 9년 전 일이었다.

9년 동안 그를 키운 자들은 유모라기보단 철저히 훈련된 용병에 가까웠고, 미카엘에게 애정 하나 없었던 모양이었다.

‘평범한 유모가 키웠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호르헤는 1년 전, 드디어 옛 주인의 아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을 생생히 떠올렸다.

“미, 미카엘 전하?”

“…….”

“안소니 전하를 모셨던 호르헤 볼머라고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황궁으로 모셔오라고 명하셨습니다.”

“…….”

“전하, 전하의 존함은 이제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 이 제국의 황태자이십니다!”

“나무.”

“예……?”

“나무.”

처음엔 호르헤는 미카엘이 자신을 놀리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곧 그는 미카엘이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르헤는 그 누구보다도 찬란했던 자의 아들이 이렇게 초라하게 컸다는 충격에 반쯤 미쳐 버릴 뻔했다.

“어떻게 보고 하나 올리지 않고!”

호르헤는 당장 칼을 뽑아 그동안 미카엘을 돌보았던 용병들을 죽일 것처럼 윽박질렀다.

한 용병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르헤 경, 저희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항상 황제 폐하께서 직접 답장을 보내주셨지요.”

“뭐, 뭐라고 하셨나!”

“아주 잘하고 있으니, 그대로 두라고 하셨습니다.”

호르헤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을 때에야 겨우 회상에서 벗어났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간 일을 아무리 돌이켜 보았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호르헤는 문을 열고 미카엘이 교육을 받는 서재로 들어갔다.

“미카엘 전하, 저런 자를 들여보내서 죄송합니다. 제가 단단히 혼을 내서 내쫓았으니…….”

“레티시아.”

“저, 전하?”

호르헤는 귀를 의심했다.

여태까지 미카엘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이름이나 호칭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를 키웠던 용병들의 증언 역시 동일했다.

미카엘은 못 알아들었냐는 투로 또박또박 그 이름을 다시 읊었다.

“레티시아.”

* * *

“레티시아!”

베스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열심히 왁스를 칠하던 레티시아는 자신에게로 성큼 걸어오는 베스를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부엌에 일손이 하나 빈대.”

“……!”

“그건 갈리한테 맡기고 가 봐. 가기 전에 그 더러운 손 씻는 거 잊지 말고.”

갈리가 축하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레티시아의 어깨를 툭 쳤다.

레티시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베스에게 다가갔다. 제퍼슨 남작저에 온 지 일주일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딱히 과로사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무리하는 대신, 할 수 있는 만큼만 일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실망하는 기색을 제법 보였던 고향 마을의 부잣집과는 달리 이 저택의 하녀들은 레티시아의 일솜씨에 하나같이 감탄하고 즐거워했다.

그간 레티시아는 그 칭찬들이 아무리 진심처럼 들려도 꺼려졌다.

가족들이 주는 칭찬에만 젖어 있다가 정작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방금, 베스는 칭찬 대신 보상을 주었다.

부엌에 일손이 빈다는 건 사실이리라.

‘하지만 그 일손은 내가 이 저택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비어 있었겠지.’

레티시아가 원래 소망했던 부엌으로 보내 준 건, 분명 베스가 그녀에게 보이는 호의였다.

“가, 감사합니다.”

“일손이 비었다니까? 갈리야 뭐, 이만하면 이 집에선 베테랑이니 혼자서도 너끈히 해낼 수 있겠지.”

갈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베스에게 애원했다.

“꼭 다음 신입도 저한테 주셔야 해요…….”

“알았어, 알았어. 지원자가 있다면 말이지.”

“제발 가지 마,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은 후, 베스와 함께 부엌을 향해 날아갈 듯한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제대로 된 요리를 배운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나올 것만 같았다.

물론 몇 년간 가족들이 먹을 하루 세끼를 혼자 힘으로 차렸기에 요리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레티시아가 생각하기에도, 평범한 가정에서 쉽게 만들고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식당에서 잘 팔릴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돈을 쓸 법한 음식들을 익혀야 해.’

새로운 기억은 레티시아에게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전생의 레티시아는 요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직접 요리를 하는 대신 맛있는 음식들을 먹기 위해 돈을 펑펑 쓰고 다녔다.

레티시아는 바로 전생의 자신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돈을 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저택의 부엌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워야만 했다.

“무슨 애가 이렇게 비쩍 말랐대?”

남작저의 요리사, 루스 벅은 레티시아를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렸다.

“죄송해요.”

“베스도 참, 이렇게 마른 애한테 어떻게 주방 일을 시킨다고. 에밀리, 점심에 먹고 남은 사과 파이 좀 꺼내.”

레티시아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부엌 하녀, 에밀리가 재빨리 찬장에서 사과 파이를 꺼냈다.

레티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태까지 그녀가 먹은 빵이라곤 검은 빵과 흰 빵, 단 두 종류뿐이었다.

당연히 전생의 그녀는 다양하고 맛있는 빵들을 먹었지만 지금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차갑게 식었는데도 은은하게 풍기는 달콤한 냄새에 저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침 떨어지겠다. 어서 앉아.”

레티시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부엌 한구석에 있는 거대한 탁자 앞에 앉았다.

‘너무 말랐으니, 배불리 먹인 후 청소나 하라면서 내쫓으려는 걸까?’

레티시아는 루스가 직접 잘라 준 큼지막한 사과 파이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

바삭바삭한 파이지와 침과 함께 녹아내릴 정도로 달콤하고 부드러운 사과가 혀 위에서 춤을 추었다.

“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 봐요.”

“당연히 그렇겠지.”

루스는 무척 뿌듯한 얼굴이었다.

“원래는 하녀장쯤은 되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니까.”

“제가 먹어도 괜찮은 건가요?”

“이런 걸 먹을 수 없다면, 누가 부엌에서 일하려고 하겠어?”

루스는 허겁지겁 파이를 먹는 레티시아를 안쓰럽게 바라보더니, 차가운 우유 한 잔을 내어 주었다.

“천천히 먹어. 더 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