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50)

8화

호르헤가 ‘레티시아’를 떠올리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미 1년이 넘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호르헤는 비쩍 마른 평민 소녀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미카엘을 구해 준 은인을, 어떻게 잊겠는가.

“그 산속에 있던 빨강 머리 소녀 말씀이시군요.”

“…레티시아.”

“그 소녀를 원하시는 겁니까?”

미카엘은 그 어떤 대답이나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지만 호르헤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린 주군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거렸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빨강 머리에 금안이라는 눈에 띄는 외관을 가진 소녀를 찾아내는 것만큼 손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드디어 어린 주군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르헤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하지만 세상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기사님, 제발 우리 레티시아 좀 찾아 주세요!”

“딸을 찾아 주시기만 하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죽어야지…….”

호르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물범벅이 된 우즈 일가를 바라보았다.

마을의 촌장은 그가 ‘레티시아 우즈’를 찾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우즈가의 집을 알려 주었다.

촌장이 별로 놀라지도 않길래 기이하게 여겼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 가족들이 툭하면 촌장에게로 달려가 딸을 찾아 달라며 떼를 썼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레티시아 우즈가… 집을 나갔다는 말이오?”

“우리 딸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우즈 씨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소리쳤다.

“분명 웬 놈팡이의 꾐에 속아 넘어갔을 겁니다!”

“하여튼 납치나… 살인 사건. 뭐 그런 건 아니라는 거, 맞소?”

호르헤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레티시아 우즈가 범죄에 휘말렸다면 아주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이었다.

“기사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우즈 부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사라졌소?”

“우리 딸은 정말 착했어요. 첫 휴일에는 꼭 집에 오겠다고 했죠. 그게 이 주일 전이에요.”

우즈 부인은 다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타툼으로 가는 마차를 탔다고 하는데, 대체 어디 있을지. 나쁜 짓을 당하지는 않았을지…….”

타툼은 이 시골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다.

부부는 여태까지 모아 둔 돈을 다 써 가며 타툼을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딸아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감동적인 이야기였지만 호르헤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 산속에서 본 그 여자아이는 아무리 1년이 지났다 할지라도 하녀로 일하기엔 너무 어렸다.

하지만 이런 시골 마을의 아이들은 잘 먹지 못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레티시아 우즈도 그런 케이스일 가능성이 컸다.

“대체 딸아이가 몇 살이오?”

“열네 살입니다, 기사님.”

“열네 살…….”

호르헤는 신음을 흘렸다. 남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기엔 너무 어리지 않은가.

하지만 그보다 더 어린 딸을 남에게 팔아 버리는 빈민들도 종종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 부부가 그들의 말만큼 딸아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호르헤는 결론을 내렸다.

‘도망쳤군.’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한 시골 소녀가 첫 월급을 받자마자 도망쳤다는 흔하디흔한 이야기.

이 부모가 레티시아 우즈를 기를 쓰고 찾았던 이유 역시 자식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호르헤는 더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우즈 일가의 집을 나섰다.

뒤에서 울며불며 매달리는 추한 인간들을 무시하려고 애쓰면서.

중요한 건 레티시아 우즈의 행방이었지, 속이 뻔히 보이는 속물들은 알 바가 못 되었다.

‘어디로 갔으려나.’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하녀 일밖에 없는 어린 소녀.

타툼의 저택이란 저택은 이 부부가 다 찾았을 테니 소녀는 다른 도시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컸다.

‘수도군.’

호르헤는 바로 알아차렸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시골 소녀가, 부모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택한 장소.

제국의 수도, 티아체 말고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호르헤는 한숨을 내쉬었다.

티아체에서 레티시아 우즈를 찾는 일은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어 보였다.

전 제국의 남녀노소가 일자리를 찾기 위해 티아체로 몰려들었고, 하녀를 구하는 저택 역시 티아체에는 널리고 널렸다.

레티시아 우즈를 찾으려면 그녀의 목에 현상금을 달지 않는 이상 제법 품을 많이 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타인의 눈에 띄는 방식으로 찾을 수는 없었다.

‘수도의 인력 사무소들을 모조리 뒤져 보아야겠어.’

레티시아 우즈는 추천서 한 장 없이 달아났으니, 당연히 인력 사무소를 통해 일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을 터.

호르헤는 처음으로 보았던 미카엘의 밝은 얼굴을 떠올렸다.

평생을 모시리라 맹세한 어린 주군이, 난생처음으로 원하는 바를 밝혔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어.’

* * *

“맛있어요!”

레티시아는 행복한 한숨을 내쉬었다.

부엌 소속이 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여태까지 식칼 한번, 빵 반죽 한번 만져 보지 못했다는 섭섭함은 맛있는 음식 앞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지난 한 달 동안 레티시아는 아침부터 식기들을 정리하고, 요리가 끝나면 엉망이 된 주방을 쓸고 닦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는 덤이었다.

하지만 고된 노동을 마치면 항상 맛있는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루스와 함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남은 음식은 모두 그들의 차지였다.

“더 먹고 싶어?”

“네.”

레티시아는 아쉬운 얼굴로 텅 빈 접시를 쳐다보았다. 루스가 피식 웃었다.

“남아 있는 건 다 줄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아침으로 먹든가. 대신 뭐 하나만 물어보자. 왜 부엌에 오고 싶어 했지?”

“요리를 배우고 싶어서요.”

숨길 일이 아니었기에 레티시아는 바로 대답했다.

“역시 그랬군.”

루스는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많이 실망했겠는데?”

“…조금요.”

“거짓말은 하지 말렴.”

“처음엔 많이 실망했는데, 여기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너무 맛있어서 아무 생각이 없어졌어요.”

“하하하하!”

레티시아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루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아니.”

루스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맛있어?”

“행복할 정도로요.”

루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설거지는 하지 마라.”

“네?”

“우선 양파를… 아니, 감자부터 깎아. 요리를 가르쳐 주마.”

“요리사님!”

레티시아는 루스를 껴안으려다 멈칫거렸다. 루스가 피식 웃으며 레티시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대신, 열심히 해야 한다.”

“저, 열심히 하겠다는 말만 열 번 하고 여기 들어왔어요.”

“그래, 바로 그 자세야.”

바로 그다음 날부터 레티시아는 산더미처럼 쌓인 감자의 껍질을 능숙하게 깎아 나가기 시작했다.

본디 야채를 손질하던 하녀는 따로 있었는데, 왜인지 행복한 표정으로 설거지를 기꺼이 맡겠다고 말했다.

곧 레티시아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감자나 당근, 비트는 하루 종일이라도 손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파와 마늘, 파는 달랐다.

매운 기운 때문에 레티시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행복했다. 그녀가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채소들을 다룰 기회였으니까.

그녀가 야채 손질 담당이 된 지 일주일이 흘렀다.

점심의 뒤처리를 끝내고, 모두가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급사 소년이 부엌에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요, 요리사님.”

급사 소년은 덜덜 떨며 겨우 말을 시작했다.

“마, 마님께서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라고…….”

루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귀한 손님이 오시나 본데?”

“화, 황태자 전하의 측근이신 호르헤 경께서 오십니다!”

쨍그랑!

접시가 레티시아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죄송해요!”

레티시아는 연신 사과하며 깨진 접시 조각을 치웠다.

다른 하녀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루스와 급사 소년 사이의 대화에 집중했지만, 레티시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호르헤 경.

레티시아는 그 이름을 알았다.

제국 역사상 가장 무자비했던 폭군,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의 최측근으로서.

미카엘 황제는 하급 관리에 불과한 소설의 여주인공까지 즉결 처형에 대한 두려움에 벌벌 떨 정도로 잔악한 폭군이었다.

그런 그를 그나마 제어해 주는 사람이 바로 호르헤 경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 복잡했다. 미카엘 황제는 본래대로라면 황위의 근처에도 올 수 없는 방계 황족이었고, 선황에겐 일곱 명이나 되는 적자가 있었다.

하지만 치열한 황위 다툼으로 인해 1황자부터 3황자까지 암살당하자 선황은 기묘한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

바로 부모가 없는 열 살짜리 방계 황족을 황태자로 데려와 앉히는 것.

당연히 선황에겐 그 허수아비 황태자를 황제로 즉위까지 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의 역할은 화살받이였다.

선황이 점찍은 후계자가 무사히 성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존재만으로도 위태로운 황태자 자리에 그저 앉아만 있는 것.

호르헤 경만이 허수아비이자 화살받이인 황태자에게 충성을 바쳤다. 황태자 역시 호르헤 경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얄궂게도 선황은 후계자의 성인식 직전 그만 돌연사하고 말았고,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가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미카엘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전 제국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고, 오직 어릴 적부터 자신을 유일하게 보호해 주었던 호르헤 경만을 신뢰했다.

잔인하게 처형하려던 정적도 호르헤 경의 한마디에 지하 감옥에 평생 감금해 두는 자비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호르헤 경이 쉰을 갓 넘은 나이에 암살당하자, 누구도 미쳐 날뛰는 미카엘 황제를 감히 가로막지 못했다.

어느 날, 미카엘 황제가 암살당할 때까지.

‘그러고 보니, 그 귀족 도련님의 이름도 미카엘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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