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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150)

9화

그 순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귀족 도련님과 피비린내 나는 폭군의 이름이 똑같다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미카엘은 제국에서 제법 인기 있는 남자 이름이었다.

당장 레티시아의 고향 마을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 아저씨의 이름만 해도 미카엘이지 않던가.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의 최측근이 왜 하필이면 자신이 일하는 남작저에 온다는 말인가?

물론 일개 부엌 하녀에게는 별 영향이 없겠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괜찮아. 미카엘 황제가 본색을 드러내는 건 즉위 후부터야.’

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레티시아는 깨진 접시 조각들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 * *

황태자의 측근이 온다는 소식에 발칵 뒤집힌 건 부엌만이 아니었다.

남작저의 사용인들 모두가 부지런히 저택 전체를 쓸고 닦았고,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정원사는 일손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두었던 정원을 부산히 손질했다.

하지만 저택에서 가장 신경이 곤두선 건 다름 아닌 제퍼슨 남작 부부였다.

남작은 초조하게 손을 비비며 응접실을 서성거렸고, 남작 부인은 안락의자에 앉아 엉망진창이 되어 가는 자수를 쉬지 않고 놓았다.

“대체 왜 온다는 건지 모르겠군.”

“이유가 있겠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접대하는 것뿐이야. 하녀들이 조금만 더 쓸 만했으면 좋았을 텐데…….”

남작 부인은 이제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는 자수를 테이블 위에 내팽개쳤다.

“올 거면 일주일 뒤에나 오지, 하필 철없는 것들을 교육할 시기에 올 게 뭐람!”

부인의 한탄에 남작은 얼굴을 찡그렸다.

“하인들 역시 쓸 만한 놈 하나 없어. 호르헤 경의 시중을 안심하고 맡길 놈조차 없다니, 이게 말이 되나?”

“당신 시종을 내줘.”

“…….”

남작은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남작 부인은 결국 그가 호르헤 경에게 시종을 내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후회해?”

“아니.”

남작은 고개를 젓더니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시골의 작은 저택에서 수도로 올라온 지 반년이 지났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게 없었다.

단 반년 전만 해도 그들은 남작 부부가 아니었다. 작위를 이어받은 형이 급사하면서 남작위와 저택, 막대한 유산이 그들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꿈에도 그리던 수도의 귀족 생활은 생각만큼 순탄하지가 않았다.

특히 시골 마을에선 왕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다가, 수도에서 돈만 좀 많은 남작 나부랭이 취급을 받으니 화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지난 반년 동안 그들은 무도회 한번 초대받지 못했다. 견디다 못한 남작은 죽은 형의 지인들에게 운을 슬쩍 떼어 보았다.

그때마다 아직 상중이라 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부르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형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거들먹거리느냐는 핀잔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남작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처한 남작 부부에게 호르헤 경은 가문 날 단비 같은 존재인 동시에 의중을 알 수 없어 의뭉스러운 상대였다.

“호르헤 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남작 부부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불 올려.”

“양파.”

“계속 저어.”

“담아.”

“체에 걸러.”

“계피.”

한동안 부엌에는 루스의 명령과 그에 따르는 하녀들의 헐떡임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쉬지 않고 에밀리가 전달해 주는 대로 신선한 야채를 손질했다.

어느덧 송골송골 맺힌 땀들이 그녀의 옷을 흠뻑 적셨다.

‘이렇게 바쁜 적은 처음이야.’

지체 높은 손님은 보통 방문하기 며칠 전에 알려 주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호르헤 경은 느닷없이 문 앞에 들이닥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황태자의 측근에게 일개 남작가가 불만을 표할 수 있을 리가.

레티시아는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르헤 경의 방문에는 무언가 목적이 있을 터.

‘미리 황태자 편이 될 귀족들을 보러 다니는 걸까.’

평범한 황태자였다면 굳이 황태자의 최측근이 남작가까지 찾아올 필요가 없었겠지만, 아직 그가 모시는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허수아비 황태자에 불과하니 옥석을 가릴 때가 아니다.

레티시아의 추측이 맞다면 오늘이 바로 제퍼슨 남작 부부에게 운명의 날이 될 것이다.

“꺄아아악!”

레티시아는 갑작스러운 비명에 깜짝 놀라 손을 벨 뻔했다.

“은식기가 없어요!”

아직 이름을 외우지 못한 하녀가 비명을 질렀다. 모든 하녀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은식기 보관함으로 달려갔다.

‘……!’

레티시아는 간신히 비명을 삼켰다. 남작 부부가 평소에 쓰는 은식기들은 다소 품질이 떨어져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아도 되었다.

귀한 손님이 오실 때만 내놓는 최상급 은식기들은 따로 보관해 두었는데, 바로 그 보관함이 텅 비어 있었다.

맨 아래층에 댕그라니 놓인 티스푼 하나는 마치 그들을 비웃기 위해 남겨 둔 듯했다.

루스가 이를 악물었다.

“에밀리, 마님께 알려라.”

“하지만 마님도 정신이 없으실 텐데요. 호르헤 경을 접객하고 계실 텐데…….”

에밀리는 영 내키지 않은 얼굴이었다.

“마님 성격을 몰라서 그런 말이 나오는구나. 만약 지금 당장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의 종아리를 치고도 남을 분이다. 그뿐만이냐? 전부 발가벗겨서 은식기의 행방을 찾으려 하겠지.”

“지금 말씀드려도 발가벗기지 않으실까요?”

“지금은 호르헤 경의 눈이 있으니 그러진 않으실 거다. 당장 가!”

루스는 에밀리가 당장 떠나지 않으면 발로 엉덩이를 걷어차기라도 할 기세였다. 에밀리는 재빨리 부엌 밖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꾸민 남작 부인이 헐떡이며 부엌에 도착했다.

보석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남작 부인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밀가루가 날아다니는 부엌 한가운데 서 있으니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루스, 정말이냐?”

“예, 마님.”

“이를 어째……!”

남작 부인은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로 비틀거렸다. 하지만 부엌 하녀 중 그 누구도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만약 호르헤 경과 그를 따라온 시종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감히 은식기를 훔친 범인과 내통한 죄로 종아리를 맞고 있을 것이다.

“당장 범인을 찾아야겠구나. 그러지 않으면 달아날 수도 있으니.”

“예, 마님.”

남작 부인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를 어쩐담……. 호르헤 경께서 계시는데.”

“마님, 호르헤 경께서 떠나실 때까지 기다리다간 은식기가 이미 팔려 나간 뒤일 겁니다.”

“그렇지.”

“호르헤 경께 양해를 구하고, 지금 당장 범인을 찾으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우선 은식기를 숨길 만한 공간부터 찾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레티시아는 루스의 대담한 발언에 놀라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려 황태자의 측근이나 되는 귀한 손님이 남작저에 방문했는데, 그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라니.

“역시 루스야.”

놀랍게도 남작 부인은 루스의 제안을 무척 흡족하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범인은 너희들 중에 있겠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은식기들을 마지막으로 닦은 건 어제저녁이니까요.”

“루스, 너야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잘 모르겠지만, 나는 확률의 문제를 얘기하는 거란다.”

남작 부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부엌을 나섰다.

루스가 손뼉을 쳤다.

“뭘 그렇게 멍하니들 서 있어? 은식기가 없어졌다고 호르헤 경께서 식사를 안 하시겠다던? 당장 평소에 쓰는 은식기를 준비해.”

레티시아는 억지로 야채를 손질하기 시작했지만 집중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조금 전 에밀리가 남작 부인을 불러오는 사이, 루스는 아직 비슷한 사건을 겪지 못한 하녀들에게 겁을 잔뜩 주었다.

남작저에선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저택답게 도난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

그때마다 범인은 멀리 달아나고 애꿎은 무고한 고용인들만 크게 혼이 났다.

월급이 다른 곳의 곱절은 되는데도 여러 명이 한꺼번에 그만두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그뿐만인 줄 아니? 이제 너희들은 한 달간 숨도 쉬면 안 돼. 이 저택의 죄인이라고 생각하라고.”

루스는 직접 겪어 보라며 더 이상의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다.

“저… 누가 그렇게 계속 훔치는 거죠? 왜 계속 훔치는데도 잡히지 않나요?”

레티시아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신입 하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루스는 그 하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웃음을 쳤다.

“너, 그렇게 멍청해서야 여기서 한 달은 버티겠니?”

곳곳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웬만한 고참들은 모두 루스의 말을 이해한 듯했다.

레티시아의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질 때였다.

“레티시아 우즈!”

처음 보는 하인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레티시아를 찾았다.

“무, 무슨 일이시죠?”

하인은 레티시아를 반강제로 일으키더니, 부엌 밖으로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세요!”

“…여기서 말하면, 너에게 더 안 좋을 텐데 괜찮겠어?”

그 말에 레티시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수십 개의 눈길이 벌벌 떠는 레티시아의 등에 일제히 꽂혔다.

하인은 제퍼슨 남작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레티시아를 데려갔다. 레티시아는 아주 조금 안도했다.

‘다행이야. 호르헤 경은 없구나.’

남작 부인은 호르헤 경을 접대하고 있는 모양인지, 응접실 안엔 남작 한 명뿐이었다.

아마 남작 부부는 호르헤 경에게 일개 하녀를 문초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건 큰 실례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레티시아는 발을 들이자마자 무릎을 꿇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나리, 저는 은식기에 손 한번 댄 적이 없습니다. 전 항상 요리사님과 있었으니 그분께 물어보시면……!”

“은식기 때문에 널 부른 게 아니다.”

제퍼슨 남작이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는 깜짝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무, 무슨 일이시죠……?”

“이게, 네 침대에 감춰져 있더군.”

“……!”

레티시아는 간신히 터져 나올 뻔한 비명을 삼켰다.

제퍼슨 남작의 손엔 1년 전, 미카엘이 그녀에게 주었던 사자 모양 브로치가 들려 있었다.

저녁 햇살을 받아 사자가 포효하듯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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