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남작 부인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호르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저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은식기들이라서요.”
“아닙니다.”
호르헤는 고개를 저었다.
“저라도 양해를 구하고 바로 찾았을 것 같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송구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남작 부인은 연신 눈물을 찍어 냈는데, 그런 것치고는 손수건은 제법 말라 있었다.
호르헤는 짜증을 속으로 삼켰다.
레티시아 우즈를 찾는 건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많은 인력 사무소들이 시골에서 올라온 비쩍 마른 빨강 머리 소녀를 기억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그 소녀가 일자리를 어디에서도 구하지 못했다고 얘기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열네 살 시골 소녀가 수도에서 갈 곳 역시 하녀 자리밖에 없다.
결론을 내린 호르헤는 일손을 급하게 구하는 저택들에서 그녀를 찾았다.
단 세 번 만에 레티시아 우즈의 위치가 드러났다.
그녀에게 접근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황태자 궁으로 데려오는 건 어린애 손목 비트는 것보다도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호르헤는 단순히 미카엘에게 레티시아 우즈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미카엘이 원한 누군가였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존재였다.
여태까지 미카엘이 말한 무수한 단어 중 호르헤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단어.
레티시아.
분명 그녀의 역할은 단순히 황태자의 장난감에 그치지 않으리라.
그런 사람을 아무런 절차도 밟지 않고 황궁에 데려올 순 없었다.
황궁은 일개 주방 하녀마저도 보통 이상의 신분을 가지고 있어야 했으니까.
만약 미카엘이 평범한 황태자였다면 호르헤는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레티시아를 황궁에 데려왔을 것이다.
문제는 미카엘이 무척 불안정한 자리에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호르헤는 어린 주군에게 티끌 하나만큼이라도 누가 되는 일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레티시아를 황태자 궁에 들여야 했다. 그 매개체가 바로 제퍼슨 남작이 될 예정이었고.
제퍼슨 남작 부부는 현재 수도의 사교계에 발을 전혀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사교계에 연을 이어 주겠다고만 하면 일개 평민 하녀를 남작가의 먼 친척으로 위장시켜, 정식 하녀로 입궁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 정도야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뜬금없이 은식기 도난 사건이 일어나면서 호르헤의 계획은 크게 틀어졌다.
‘왜 하필…….’
호르헤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우연이겠지만 상황은 그가 전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그동안 레티시아는 줄곧 브로치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고된 부엌일을 하던 도중 실수로라도 잃어버릴까 봐 침대 매트리스 사이에 숨겨 놓았던 게 화근이었다.
은식기를 숨길 만한 곳을 수색하던 사람들이 브로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레티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훔친 게 아니에요.”
남작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럼 네 것이라는 소리군.”
“…….”
“누구한테 받았지?”
“몰라요.”
“모른다고?”
남작은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럼 이것이 원래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겠군.”
“네.”
“차라리 주웠다고 하지 그랬나.”
“주웠으면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했을 거예요! 이렇게 비싼 물건을 그냥 제가 가질 순 없으니까요.”
“그래, 믿겠다.”
“……!”
레티시아의 볼이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워낙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어 걱정했는데, 남작은 생각보다 양식 있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귀족의 사용인이 분수에 맞지 않게 값진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인에게 들키면 귀중품을 모조리 빼앗긴 다음 쫓겨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안도감은 단 몇 초 만에 산산이 조각났다.
“하나만 솔직하게 말하면 네 말을 믿어 주지. 뭔 짓을 저지르는 대가로 이걸 받았나?”
레티시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곰처럼 거대한 남작이 위압적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냥, 도와줘서요.”
“도와줬다고?”
“네. 산에서…….”
레티시아는 산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려고 했지만 남작은 그녀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네 입으로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군.”
“그 무슨……!”
남작은 브로치를 그녀의 코앞에 가져다 댔다.
“이게 정녕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말이냐?”
위압감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하!”
남작이 웃음을 토해 냈다.
“본래대로라면 이건 절대 네 손에 들어갈 수가 없는 물건이다.”
“그건 알아요.”
“안다고?”
남작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레티시아는 용기를 내어 산에서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려고 했다.
“지금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그건 제가…….”
쾅!
레티시아의 말은 갑자기 응접실 안에 들이닥친 한 무리의 하녀들 때문에 끊겼다.
남작도, 레티시아도 놀란 나머지 하녀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낯익은 얼굴들을 알아본 레티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대부분이 루스와 에밀리를 위시한 부엌 하녀였지만, 레티시아가 부엌으로 옮기기 전 알던 얼굴들도 제법 있었다.
“남작님.”
하녀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레티시아는 놀라 숨을 삼켰다.
베스였다.
남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제가 보증합니다. 레티시아는 은식기를 훔칠 만큼 간이 크지 않습니다. 무슨 얘기를 듣고 지금 레티시아를 문초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속으신 겁니다.”
베스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루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저 역시 보증합니다. 레티시아는 어젯밤, 방에 들어가는 것까지 제가 확인했습니다.”
“저, 전 레티시아의 바로 옆 침대를 씁니다. 레티시아가 어젯밤 수상한 행적을 보였다면 제가 눈치챘을 거예요!”
갈리였다.
레티시아는 눈물이 넘치기 직전 간신히 소맷자락으로 훔쳐 냈다.
남작 부부를 귀신보다도 무서워하는 동료들이 그녀를 위해 나서 주고 있었다. 사실 정말로 레티시아가 은식기를 훔친 범인일 가능성이 있는데도.
남작은 크게 화가 난 것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는 입을 열었다.
“…의견들은 잘 들었다. 어서 돌아가도록.”
하지만 누구도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루스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레티시아와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뭐라고?”
“지금 주방에 일손이 부족합니다. 레티시아가 없으면 일이 되지 않습니다.”
‘루스…….’
큰일이었다. 잠시라도 긴장을 놓았다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레티시아를 안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동료들이 그녀를 진심으로 위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첫인상이 최악이었던 베스조차 가장 먼저 나서서 자신을 감쌌다.
불행히도 남작의 얄팍한 인내심은 오래 버텨 주지 않았다.
“다들 뭘 하자는 거지? 당장 본인 자리로 돌아가도록!”
“레티시아를 데려가기 전까진 갈 수 없습니다.”
“그깟 은식기 때문에 내가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나!”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창문이 꽁꽁 닫혀 있는데도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들이닥친 기분이 들었다.
레티시아는 간신히 용기를 내어 뻣뻣하게 굳은 몸을 돌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인상의 중년 기사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사람들로 가득 찬 이 방 안에 오직 그녀 한 명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소름이 쭈뼛 돋았다. 레티시아는 남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 기사를 부르기 전에 이미 그의 정체를 알았다.
“호르헤 경!”
“대대로 내려온 은식기 때문에 이러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 그것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남작을 보는 호르헤 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희 사이에 할 이야기가 꽤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그는 레티시아를 포함한 하녀 무리를 가리켰다.
“이들은 이만 돌려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남작이 버럭 고함을 쳤다.
“다들 귀라도 먹었나? 제자리로 돌아가!”
레티시아는 다른 하녀들과 함께 방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루스가 그녀의 등을 내리쳤다.
“얼른 가자고. 할 일이 태산이야.”
“무, 무슨 일인지 안 물으세요?”
“그렇게 쥐 잡듯 잡힌 게 네가 처음인 것 같아?”
루스가 코웃음을 쳤다.
“은식기도 누가 가져갔는지 뻔하지.”
“누구죠?”
“샐리. 사실상 나리와 마님의 자작극이야.”
“……!”
“이런 일이 처음인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그동안 한 번씩 이런 일이 일어나곤 했어. 이번엔 우리 차례였던 거지.”
“그런데 왜 하필 호르헤 경이 오신 날에 가져갔을까요?”
“호르헤 경은 갑자기 방문했잖아. 예상치 못한 일이었던 셈이지.”
더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 같았지만 루스는 더 이상의 질문은 받아 주지 않았다.
“할 일이 산더미 같아서 널 데려가야겠다고 한 건 거짓말이 아니거든? 얼른 가서 일이나 해. 그게 네가 여기 있는 이유니까.”
* * *
“이제 말해 보십시오. 무엇 때문에 그 하녀를 추궁하신 겁니까?”
제퍼슨 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것 아닙니다. 경이야말로 제 아내와 함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큰 소리가 들리길래, 부인께 양해를 구하고 살펴보았습니다. 재미있는 광경이 보이더군요.”
남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분명 그 하녀들 때문이었으리라.
마음만 같아선 모조리 해고시키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저택의 운영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남작 부인이 종종 꾀하는 도난 소동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남작 부인은 그 방법을 통해 충성스러운 고용인들을 가려낼 수 있다고 했지만, 그가 보기엔 들어가는 품에 비해 실제로 얻는 이익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의외의 소득이 생길 줄이야.’
레티시아 우즈.
이름 한번 들어 본 적 없는 신입 하녀의 침대에서 황가 문양의 브로치가 발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