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50)

11화

평민들은 물론, 그 같은 하급 귀족도 평생 한번 만져 볼 수 없는 품질의 브로치였다.

당장 강탈해야겠다는 충동이 크게 일어날 정도로.

어차피 하녀 나부랭이가 어디선가 훔친 물건일 터.

신고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라며 윽박지르고 그 자신이 가져야겠다는 욕심이었다.

하지만 이내 이성이 그의 머리를 장악했다.

과연 이렇게 어리고 평범한 하녀가 황실의 브로치를 훔친다는 게 가능한가? 누군가로부터 어떤 대가나, 징표로 받은 게 아닐까?

너무나 타이밍 좋게 방문한 황태자의 최측근, 호르헤 경과 그 브로치를 겹쳐 생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분명 호르헤 경은 단순한 친분을 위해 자신 같은 일개 남작을 방문한 게 아니다.

제퍼슨 남작은 호르헤 경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 그 하녀를 추궁해서 그녀가 자신의 저택에 잠입한 이유와 호르헤 경의 진짜 목적을 알아내려고 했다.

‘그년들만 아니었어도!’

만약 느닷없이 들이닥친 하녀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쯤 레티시아 우즈에게서 정보란 정보는 탈탈 털어 내었을 것이다.

“은식기 때문은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자리를 뜬 이유가 거짓말이라는 게 밝혀졌으니, 해명은 하셔야 할 겁니다.”

“…….”

제퍼슨 남작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오늘의 일이 소문으로 퍼진다면 그는 전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되어, 형처럼 진짜 남작이 될 기회를 영영 날려 버리고 말 것이다.

“이것 때문입니다.”

그는 어딜 보아도 황실의 문양인 포효하는 사자 모양 브로치를 탁자 위에 거칠게 올려놓았다.

“……!”

호르헤 경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지더니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어디 있었습니까?”

“그 하녀가 가지고 있더군요. 일개 하녀가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훔쳤을 거라고 생각해, 추궁하던 참이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크게 당황하는 호르헤 경을 보자 안도감이 들었다. 자신이 그의 허점을 찌른 게 틀림없었다.

“…남작님.”

호르헤 경이 마침내 결론을 내린 듯 평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남작은 코웃음을 쳤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그래, 한번 들어나 봅시다. 제 저택에 하녀를 잠입시키고 느닷없이 방문해 저희 부부를 놀랜 이유가 대체 뭡니까? 경처럼 대단한 분이 일개 남작 위를 원하십니까?”

호르헤 경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하녀를 잠입시키지 않았습니다. 물론, 남작 위에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 뭡니까?”

호르헤 경의 대답을 들은 남작은 소스라치고 말았다.

“이 하녀… 레티시아 우즈가 황실의 정식 하녀로 입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 *

부엌의 하녀들은 다시 루스의 지시를 받아 부지런히 일하기 시작했지만 모두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레티시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빼앗겨 버린 브로치에 대한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분명 남작은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 착각이 무엇인지 제대로 얘기를 해 주지 않아 더더욱 답답했다.

바로 그때, 부엌에 그녀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레티시아 우즈, 호르헤 경께서 부르신다.”

어딜 보아도 호르헤 경이 데리고 온 듯한 말쑥한 시종이 레티시아를 찾았다. 루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지 알려 주기 전까진 저 아이를 데리고 나갈 수 없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시종은 분명 루스보다 신분이 높을 터였으나 주방의 수장에게는 예의를 갖추었다.

“단지, 무조건 레티시아 우즈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

“만약 제 발로 오지 않는다면 직접 내려온다고 하시더군요. 여기까지 경께서 내려오셔야 하겠습니까?”

“…갈게요.”

“시간만 끄는 것처럼 멍청한 것도 없잖아요. 가겠어요.”

레티시아는 결연하게 말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남작의 집무실 문 앞에 도착했다.

청소를 맡았을 때조차 한 번도 들어와 보지 못한 공간이었다.

집무실은 베스 혼자서 청소했고, 개중 귀중품은 하녀장인 샐리가 직접 다룬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었다.

레티시아는 문을 세 번 두드린 다음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집무실 안엔, 예상대로 제퍼슨 남작과 호르헤 경 단둘뿐이었다.

‘……?’

레티시아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분명 마지막으로 그녀가 둘을 보았을 때의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금, 제퍼슨 남작과 호르헤 경은 마치 친우라도 되는 것처럼 웃으며 농을 나누고 있었다.

“어서 오거라.”

레티시아는 더욱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제퍼슨 남작을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레티시아가 일개 하녀가 아닌, 자신의 조카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불렀다.

“저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뭔가 사주를 받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그저…….”

“다 믿는단다. 좀 멀긴 하다만 우리 가문의 일원인 네가, 그런 파렴치한 일들을 저지르겠어?”

“네……?”

“레티시아, 네 어머니는 내 팔촌 누이 되신단다.”

“……?”

레티시아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는 제퍼슨 남작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레티시아의 어머니는 팔촌이 되었건 십촌이 되었건 귀족가와 연이 있을 리가 없는, 평범하디평범한 시골 주민이었으니까.

“왜, 왜 그러세요?”

“못 믿는다는 눈치로군.”

제퍼슨 남작이 호르헤 경을 슬쩍 가리켰다.

“여기 이분께서 널 황태자 궁의 하녀로 데려가겠다고 하시더구나. 그래서 당연히 출신이 불분명한 아이는 데려가실 수가 없다, 황태자 전하께도 누만 될 거라고 했더니 이미 네 신분을 확인하고 오셨다고 하더군.”

호르헤 경은 말없이 고개만 슬쩍 끄덕였다.

레티시아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아 바닥에 살짝 주저앉았다.

더 놀랍게도, 제퍼슨 남작이 파리를 먹은 두꺼비처럼 행복한 얼굴로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나, 남작님…….”

“아저씨라고 부르려무나.”

“아닙니다. 어떻게 제가……!”

“미안하다, 레티시아.”

이건 또 웬 생뚱맞은 사과란 말인가.

남작은 레티시아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속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우리 가문이 일개 남작가에 불과해, 친척인 널 황태자 전하의 시녀로는 들여보낼 수가 없구나.”

레티시아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호르헤 경의 눈에 띄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황태자 궁의 하녀도 충분히 영예로운 자리란다. 그러니 항상 이 아저씨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해 다오. 알겠느냐?”

“제가… 황태자 전하의 하녀요? 말도 안 돼요!”

그제야 레티시아는 자신에게 크나큰 위기가 닥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설 속에는 폭군의 일개 하녀들에 대한 묘사는 없었지만, 숱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폭군이 하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었다.

인간은 본래 가장 만만한 상대에게 화를 푼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저씨, 제발 재고해 주세요. 저는 여태까지 배운 게 없어 가문에 누만 끼칠 거예요.”

“걱정할 것 없단다. 나는 그동안 집안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 잘 몰랐지만, 아내는 네가 원래부터 일을 잘하고 야무져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남작은 인자하게 웃었다.

“그리고 네가 신망을 쌓지 않았다면, 동료들이 널 구하기 위해 달려왔겠느냐?”

“아저씨… 저는 이 집이 좋아요. 이 댁의 부엌 하녀로 계속 있고 싶어요. 특별 대우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퍼슨 남작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굴러떨어질 것처럼 그윽한 눈으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여기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구나. 하지만 그럴 것까진 없단다. 자, 일어나거라.”

그는 무려 레티시아 앞에 무릎을 같이 꿇고 그녀를 반쯤 껴안듯 일으켜 주기까지 했다.

바로 레티시아의 귀에 본심을 속삭이기 위해서.

“정신 차려라. 내가 좋아서 이 연극 놀음에 어울려 주고 있는 줄 아느냐?”

“……!”

레티시아의 금안이 커졌다.

예상하던 바였지만 남작에게서 직접 들으니 충격은 배가되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호르헤 경은 그녀를 황태자의 하녀로 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레티시아의 어머니가 제퍼슨 남작의 팔촌 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까지 꾸며 내면서.

‘내가 뭔 말을 하든 들어 주지 않을 거야.’

레티시에게는 권력도, 능력도, 재물도 없었다. 이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정이 된 것 같군.”

호르헤 경이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우즈 양? 짐은 이미 마차에 있다. 당장 출발해도 되겠지?”

“저, 브로치는…….”

“귀한 것이니 황태자 궁에 도착하면 돌려주지.”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동료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싶어요.”

“내가 대신 전해 주마.”

제퍼슨 남작이 황급히 레티시아의 마지막 구명줄을 잘랐다.

“어서 가거라. 네 신분이 바뀌었다는 걸 자각하고.”

레티시아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이 된 기분으로 호르헤 경의 뒤를 따랐다. 만약 호르헤 경 한 명뿐이었다면 도망치려는 시도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뒤와 옆을 호르헤 경의 시종들이 둘러쌌기에, 레티시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호르헤 경의 등을 바라보며 걷는 것뿐이었다.

호르헤 경이 직접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내려도 된다고 할 때까지, 내리지 말도록.”

레티시아는 들뜬 기색을 숨기려고 애쓰며 물었다.

“저 혼자 타나요?”

“설마.”

호르헤 경이 코웃음 쳤다.

“중간에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머리 굴리는 모습, 잘 보았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전부 남자분들이라, 혼자 타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기가 막힌다는 투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도 일개 하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

“그냥 하녀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저는 제퍼슨 남작가의 일원. 추문이 일어난다면 남작님께도 누가 되지 않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