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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150)

12화

레티시아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했다.

제퍼슨 남작이 그녀에게 부여한 새로운 신분은 이용할 가치가 있는 족쇄였다.

호르헤 경은 한숨을 내쉬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쩌다 이런 하녀를 전하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같이 비천하고 무례한 하녀는 황태자 전하께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니 당장 남작님께 가서,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씀해 주세요.”

“그럴 순 없지.”

호르헤 경이 레티시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

“그래, 촌수가 멀다고는 하나 남작이 직접 인정한 남작가의 숙녀. 아직 정식 입궁도 안 한 상황에서 낯선 남자와 함께 마차를 타는 건 부적절하다. 혼자 타도록.”

레티시아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 내렸다. 절반의 승리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패배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황태자 궁에 도착할 때까지 전속력으로 달릴 테니,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라.”

호르헤 경은 빈말을 하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난생처음으로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차를 겪어 보게 되었다.

그 전에 탄 마차들은 달팽이가 기어가는 속도로 느껴질 정도였다.

“아악!”

레티시아는 비명을 질렀다.

의자엔 푹신한 쿠션이, 바닥엔 깔개가 깔려 있었지만 딱딱한 나무 천장은 그대로였다.

그 탓에 마차가 울퉁불퉁한 길을 달릴 때마다 허리와 엉덩이엔 둔탁한 충격이, 머리엔 아릴 정도로 아픈 통증이 느껴졌다.

결국 레티시아는 제대로 앉아 있는 걸 포기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폭신폭신한 쿠션을 끌어안았다.

‘황태자 궁에선 하녀에게도 이런 쿠션을 주는 걸까.’

레티시아는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호르헤 경이 자신을 황태자 궁의 하녀로 삼으려는지는 몰라도 최대한 빨리 달아나야 했다.

그간 레티시아는 하녀가 얼마나 하찮은 부속품 취급을 당하는지 보아 왔고, 이번 일에서 역시 어느 정도 겪기도 했다.

나름 신분이 보장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황궁의 하녀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장차 폭군이 될 황태자의 하녀보다야, 고향 마을에서 월급을 받는 족족 부모님께 빼앗기는 하녀로 사는 쪽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생각해, 레티시아! 어떻게든 달아날 방법을!’

하지만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차에서 달아날 방법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레티시아의 발버둥이 무색하게 그들은 금세 황태자 궁에 도착했다.

‘……?’

마차가 멈추기가 무섭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란이 크게 일었다. 그 와중에 호르헤 경이 무어라 호통치는 소리도 들렸다.

레티시아는 귀를 기울였지만 온갖 소음이 뒤섞여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됐어. 이유야 상관없으니까.’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지금이 달아날 기회인지, 아닌지뿐이었다.

레티시아는 눈에 띄는 새빨간 머리채를 옷 안으로 집어넣은 다음, 마차 문을 슬쩍 열어 보았다. 예상대로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빠르게, 하지만 눈에 띄지는 않게 인파로부터 빠져나왔다. 문을 닫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잠시 후 더욱 큰 소란이 일었지만 그녀 때문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힘들었다. 레티시아는 그저 소음으로부터 먼 방향으로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정원?’

그녀는 어느새 머리 위로 껑충 자란 나무들과 꽃들로 가득한 공간에 도착했다.

‘정말 정원이… 맞나?’

이곳은 레티시아가 여태까지 봐 온 귀족 저택의 정원들과 많이 달랐다.

보통 일반적인 귀족가의 정원은 잘 가꾸어진 잔디 위에 조형수와 아름다운 꽃들이 군데군데 자리했다.

하지만 이 정원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처럼 온갖 희귀한 꽃과 나무들이 뒤엉켜 자라 있었다.

마치 정글처럼.

누군가가 숨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레티시아는 아무 생각 없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침 자신은 하녀 복장이었으니, 정원사라도 만나면 제퍼슨 남작을 수행하러 온 하녀인데 길을 잃었다고 둘러대면 될 것이다.

다행히도 정원사는 보이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점점 더 정원 깊숙이 들어갔다.

오늘 하룻밤은 이곳에서 보내고 아침 해가 뜨면 황태자 궁에서 나갈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가명을 써야겠어.’

호르헤 경이나 되는 사람이 도망친 하녀를 품을 들여 쫓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어떻게든 귀족이 아닌 부유한 가정에 취직한다면 호르헤 경이 자신을 찾을 확률은 무척 떨어진다.

수도에서 벗어난다면 더 좋고.

‘…미로?’

레티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자신은 꽃 덩굴이 엉킨 가시나무로 만든 벽들로 이루어진 미로에 들어와 있었다.

‘상관없어. 아침까지 버텼다가 해가 뜨는 방향으로만 걸으면 되니까.’

하지만 미로에 들어와 있다는 점 자체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일단 여기에서만 빠져나가자.’

레티시아는 빠져나가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왜인지 미로는 끝나지가 않았다.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혹시나 들킬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주저앉기 일보 직전, 레티시아는 벅차오르는 기쁨과 희망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가시나무 벽 사이로 난 작은 샛길을 발견한 것이다.

레티시아는 지친 몸을 움직여 샛길에 몸을 간신히 집어넣었다.

몸집이 조금이라도 더 컸다면 가시나무에 몸이 잔뜩 긁혔을 정도로 작게 난 샛길이었다.

샛길을 간신히 빠져나가자 찬란한 풍경이 펼쳐졌다.

“……!”

금안이 흔들렸다.

마구잡이로 자란 수풀 사이로 보이는 인공 폭포 때문도, 서로 경쟁하듯 자라난 화려한 꽃들 때문도, 달큼한 향기가 나는 과일 덩굴 때문도 아니었다.

“미카엘?”

조금은 자란 듯한 미카엘이,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카엘은 그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레티시아를 집요하게 바라보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나도 헛것을 보는 것 같아. 이거, 꿈 아니지?”

“스키잔드라.”

미카엘은 조용히 말하며 레티시아에게 찔레꽃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검붉은 무늬가 있는 꽃을 한 움큼 건네주었다.

산속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스키잔드라였다.

레티시아는 금세 그 뜻을 알아차렸다. 스키잔드라의 꽃말은 재회였으니까.

“다시 만날 줄 알았다고? 설마, 미카엘 같은 귀족 도련님이랑 내가 어떻게 만나겠어.”

“운명.”

“……?”

레티시아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1년 전의 미카엘은 거듭 생각해야 알 수 있을 정도로 빙빙 돌린 단어들을 말했다.

하지만 지금, 미카엘은 그녀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한마디를 들려주었다.

운명.

레티시아는 푸스스 웃고 말았다.

운명이란 어떻게든 이루어지는 소설 속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에나 어울리는 말이다.

자신과 미카엘처럼, 등장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미카엘은 레티시아에게로 다가와 가시덤불에 긁힌 옷을 슬쩍 만졌다.

“안 다쳤어.”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안심시켰다.

“그보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여긴 황태자 전하의 정원이잖아.”

“모기.”

“모기……?”

레티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미카엘의 말은 다시 의중을 알아차리기 힘든 수준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내 레티시아는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모기는 몰래 사람을 물었다가 떠나가 버린다.

“몰래 들어왔다는 거구나.”

“수영.”

“수영이라니?”

미카엘은 가쁘게 숨을 내쉬는 체를 했다. 레티시아는 피식 웃었다. 아직 어린 미카엘에게는 수영이 가장 버거운 운동인 모양이었다.

“무척 힘들었나 보네. 그래도 보람은 있겠어.”

미카엘은 대답 대신 주위를 유심히 살피며 레티시아가 처음 보는 과일을 나뭇잎 사이에서 하나 땄다.

사방에 널린 게 과일 덩굴에 과일나무라, 혹시 이곳이 낙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레티시아는 얼떨결에 새콤하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노란색 과일을 미카엘이 따 주는 대로 받았다.

“이거, 어떻게 먹어?”

미카엘은 인공 폭포로 다가가 손을 씻더니 손으로 과일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도 미카엘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하얀 솜털이 붙은 주황색 속살이 나타났다.

레티시아는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어 보았다.

“……!”

새콤하고 달콤하고, 얇은 속껍질에 싸인 자잘한 과육들이 입에서 통통 튀었다.

“맛있어.”

“개미.”

이곳에 이런 과일들이 개미 떼처럼 많다는 뜻이리라.

“역시 황태자 궁은 과일도 다르구나. 이걸 먹었다고 대역죄인이 되는 건 아니겠지?”

“거품.”

거품처럼 금세 사라져 버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 정도는 이제 쉽사리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알았어. 괜한 걱정을 했구나. 그럼 실컷 먹을게.”

미카엘이 계속해서 따다 주는 과일로 배를 채운 레티시아는 그들이 있는 공간을 좀 더 자세히 둘러보았다.

10월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꽃들과 달콤한 과일들, 그리고 몸을 씻어도 될 정도의 규모인 인공 폭포까지. 심지어 바닥에 깔린 잔디마저 값비싼 이불처럼 폭신폭신했다.

게다가 유일한 출입구는 자신이 방금 통과한 샛길뿐. 이곳은 어쩌면 황태자의 명으로 만들어진 비밀 공간일지도 몰랐다.

‘내일까진 확실히 들키진 않겠어.’

조금 안심한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빤히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향후 폭군이 될 잔악한 황태자의 궁. 아무리 미카엘이 지체 높은 귀족 도련님이라 한들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들쑤시고 다닐 만한 곳은 아니었다.

“또 가출한 거야?”

“…….”

“너도 참, 대단하다.”

이제 보니 미카엘은 상습 가출범이었다. 같은 처지가 제법 반가워진 레티시아는 과일을 하나 더 베어 물며 조잘거렸다.

“사실은 나도 가출했거든. 알고 보니 부모님도, 할머니도, 하나뿐인 오빠도… 모두 내 편이 아니었어.”

“…….”

“그래도 수도에 오니까 좋더라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그래서 즐겁게 지냈는데, 호르헤 경이 와서 날 억지로 끌고 왔어. 호르헤 경이 누군지 아니?”

“손가락.”

본인의 손가락만큼 속속들이 안다는 뜻이었다.

레티시아는 피식 웃었다. 무려 황궁에 들어올 정도로 고위 귀족의 자제에게 호르헤 경을 아냐고 묻는 자신이 조금 바보같이 느껴진 탓이었다.

“하기야, 미카엘이 모를 리가 없지. 그 무서운 황태자 전하의 최측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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