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미카엘은 침묵했지만, 레티시아는 개의치 않고 조잘거렸다.
“아, 미카엘이 나보다 황태자 전하를 잘 알겠구나. 소문처럼 엄청 무서운 분이지? 그래서 그분의 하녀가 되기 싫어. 어떻게든 도망가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미카엘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안. 너무 어려운 이야기만 했네. 여긴 내일 아침까지만 있을게. 그때면 너도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미카엘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알았어, 알았어.”
레티시아는 웃으며 인공 폭포로 향했다. 해 질 녘이었기에 손이 얼어붙을 듯한 느낌을 각오했는데, 신기하게도 폭포에선 딱 기분 좋을 만큼의 물이 흘러나왔다.
세수까지 마친 레티시아는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평생 여기서 살아도 되겠다.”
“거품.”
“알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할게.”
레티시아는 살짝 우울해졌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미카엘의 생각이 맞았다. 이곳에서 평생을 지낼 수는 없었다.
“미카엘은 여기에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야? 가출이면 오래 있을 생각이겠네.”
“쳇바퀴.”
쳇바퀴는 굴러도 굴러도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미카엘은 결국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가출이 아니잖아.”
조금 기가 막힌 레티시아가 중얼거렸다.
“가출은… 영원히, 훌쩍 떠나 버리는 거라고. 절대 그 사람들이 나를 찾아낼 수 없는 곳으로.”
“유니콘.”
유니콘은 불가능한 존재의 대명사였다. 레티시아의 마을 사람들도, 뭔가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나면 ‘유니콘 같은 일이네!’라고 말하곤 했다.
“불가능하다니. 나는 이미 해냈는걸.”
“…….”
“그럼, 결국 돌아갈 건데도 가출한 이유는 뭐야?”
“…….”
“괜찮아.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가출하는 이유야, 비슷할 테니까.”
레티시아는 수도에서 자신처럼 가출한 소녀를 몇 명 만났다.
모두 자신처럼 가족이 싫어서, 가족이 있는 집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나온 소녀들이었다.
“나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할머니도, 패딩턴도… 다 싫어서 집을 나왔어. 전부 나를 속이고 이, 이용했었거든.”
어느새 레티시아의 목소리는 울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뺨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창피했지만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카엘에게 자신이 그동안 가족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리고 집에서 어떻게 도망쳤는지를 들려주었다.
벼락을 맞았다는 이야기만 빼고.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충격이 큰 이야기일 테니까.
미카엘은 중간중간 아리송한 단어들을 하나씩 내뱉었다.
레티시아는 그 말들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하나같이 그녀를 위로해 주기 위한 말들이었다.
그러다 레티시아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아, 브로치!”
“무덤?”
레티시아는 미안한 마음에 숨을 들이켰다. 미카엘은 브로치를 주었던 그날처럼 잘 숨기지 않았냐고 묻고 있었다.
“미안해. 빼앗겼어.”
일순간이었지만 미카엘의 얼굴이 분노로 화르르 달아올랐다. 레티시아는 잠시 움찔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잘 숨겨 놨었는데, 도둑이 다른 걸 훔치면서 하녀들 모두가 수색받았어. 그걸 발견한 제퍼슨 남작님께 빼앗겨서… 지금은 호르헤 경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
미카엘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하필 호르헤 경이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뻔하지. 비싼 것이라 가져간 게 틀림없어.”
“…….”
“혹시 나한테 줬다고, 부모님께 엄청 야단맞지 않았어? 정말 미안해. 혹시나 움직이다가 잃어버릴까봐 침대에 숨겨 놨는데…….”
레티시아는 다시 울먹이다가, 자신보다 어린 소년에게 자꾸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따뜻한 손이 그녀의 두 손을 슬그머니 얼굴에서 떼어 내더니, 부드러운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그날처럼.
“고, 고마워.”
레티시아는 최대한 빨리 눈물이 마르기를 바라면서 눈을 깜박거렸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미카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메랑.”
“돌려받겠다고? 어떻게?”
“빙어.”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빙어는 날것 그대로 씹어 먹는 생선이었다.
미카엘은 호르헤에게 자신이 직접, 모든 사실을 얘기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호르헤 경께 직접 얘기해서 돌려받겠다고? 말도 안 돼!”
미카엘은 대답 대신 레티시아를 꼭 껴안았다. 레티시아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미카엘은 분명 레티시아보다 조금 작은 키였는데도 두꺼운 이불로 감싼 듯한 포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 때문에 네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할 필요는 없어, 미카엘.”
“참새.”
“그래. 호르헤 경은 참새처럼 전혀 위험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달라. 네가 괜히 그런 일을 해서, 너랑 네 부모님이 황태자 전하께 밉보이면 어떻게 하려고?”
“유니콘.”
“불가능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미카엘의 고집은 도통 꺾이지를 않았다. 결국, 레티시아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 버렸다.
“알겠어, 미카엘. 하지만 이것 하나만 알아줘. 나는 그 브로치를 돌려받지 않아도 괜찮아. 단지 네가 준 건데, 잃어버린 게 미안해서…….”
레티시아의 말이 갑자기 끊어졌다.
“있잖아, 나 너희 집의 하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생각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레티시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원래부터 내가 미카엘의 하녀가 될 예정이었다고 하면 돼.’
레티시아는 이미 모든 이야기를 꾸며 냈다.
그녀는 산속에서 미카엘을 구해 낸 덕에 그의 집안에 하녀로 취직할 예정이었다. 그 증거가 바로 브로치였다.
미카엘이 산을 급하게 떠나면서 브로치를 떨어트렸고,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다시 만날 때까지 돌려주기 위해 고이 보관했다.
미카엘의 부모님이 얼마나 높은 귀족인지는 지금으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황궁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정도면 제법 지위가 높은 귀족일 것이다.
황태자 역시 일개 하녀는 큰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여기엔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미카엘이 레티시아와 말을 적당히 맞춰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녀는 미카엘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 하나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당연히 미카엘에겐 가족과 유모, 친구가 있을 터. 그들 중 누구 하나 정도는 미카엘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겠는가?
레티시아의 속이 타들어 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미카엘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레티시아는 황급히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하녀인지 설명했다.
“나 빨래도 잘하고, 청소도 잘해. 요리도 조금이지만 배웠어. 네가 얼마나, 얼마나 지체 높은 도련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폐는 끼치지 않을 자신 있어. 부족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배울게.”
“포도.”
레티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큼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카엘은 과일을 좋아했다. 분명 긍정적인 의미이리라.
“그럼 괜찮다는 말이지?”
미소가 돌아왔다.
“고마워!”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반쯤 껴안았다.
“정말, 정말 고마워…….”
“뭣 하는 짓이지?”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껴안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호르헤 경이었다.
“떨어져라.”
호르헤 경은 그 어떤 위협도 그녀에게 가하지 않았지만 서늘한 칼날이 느껴지는 듯했다.
레티시아는 황급히 미카엘에게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이, 이것은…….”
“네까짓 게 함부로 접근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
레티시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호르헤 경은 소설 속에서 오직 황제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자로 악명이 높았다.
바로 미카엘 황제에게.
그녀가 잘 안다고 생각한 소년과 이름이 정확히 똑같은!
귀에서 윙 하니 이명이 들리는 듯하고 눈앞에서 별이 깜박거렸다. 레티시아의 머리는 생각을 멈추기 직전 단 하나의 결론을 내놓았다.
그녀가 아는 미카엘과 소설 속의 그 잔악한 미카엘 황제는 동일인이었다.
그때, 레티시아의 혼란에 쐐기를 박는 호르헤 경의 음성이 들렸다.
“전하, 한참을 찾았잖습니까. 만약 조용한 곳에 가고 싶으셨다면 제게 말만 해 주십시오. 언제든지 모시겠습니다.”
호르헤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미카엘은 익숙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살얼음.”
“…….”
호르헤 경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용없대요.”
하늘에 맹세코, 레티시아는 평생 자신이 대체, 왜, 하필 그 순간 그 말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호르헤 경의 얼굴에 스친 절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호르헤 경이 역시나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확인했을 때 미카엘이 내쉰 한숨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레티시아는 그 말을 내뱉었고, 후회했을 땐 이미 한참 늦은 뒤였다.
“뭐라고?”
호르헤 경이 바로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전사의 눈이 어스름 속에서 매섭게 빛났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티시아는 바로 둘러댔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 기사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는 어린 주군의 앞에서 괜한 협박을 하는 대신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열네 살짜리 소녀를 소스라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방법이었다.
“…살얼음을 밟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에 빠지겠죠. 엉뚱한 곳을 밟은 거예요.”
“무슨 뜻이지?”
호르헤 경은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미, 미, 미카엘… 전하께서 그동안 원하는 바를 말씀하셔도 경께서 항상 엉뚱한 곳으로 데려갔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소용이 없는 거고…….”
“방금 전하의 말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호르헤 경은 도저히 믿지 못한 모양인지 거듭 되물었다.
“네가 완전히 꾸며 내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지?”
그때였다.
미카엘이 레티시아를 정확히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