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레티시아.”
“제 말이 맞다고 하시네요.”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호르헤 경의 눈은 이제 반쯤 튀어나와 허공에 걸린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설마……. 말도… 안 돼.”
“뭐가요?”
호르헤 경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렸다. 미카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더니, 한마디를 조용히 내뱉었다.
“가시.”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레티시아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가시 달린 걸 만질 때는 조심해야 하잖아요……. 기, 기사님?”
레티시아는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중년 기사의 흉터투성이 얼굴에 물기가 서렸기 때문이었다.
“레티시아 우즈 양.”
호르헤 경은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그는 몇 시간 전 그들이 나누었던 숙녀의 처신에 관한 이야기는 잊어버렸는지 레티시아를 덥석 껴안았다.
“정말… 정말 고맙다.”
호르헤 경은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자식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넋 놓아 울더니, 레티시아의 손을 꼭 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제발 미카엘 전하 곁에 머물러 다오.”
“저, 전…….”
“미카엘 전하의 말을 알아들은 건 네가 처음이다. 그동안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나조차도.”
“……!”
레티시아는 충격에 휘청거렸다.
“손에 물 한 방울 묻지 않을 게다. 그저 전하의 곁에 있으면서, 네가 이해한 전하의 말씀을 알려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당황한 레티시아는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호르헤 경은 레티시아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당연히 강제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네 존재가… 나에게도, 전하께도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 다오.”
레티시아는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미카엘이 아무리 어리고 순진해 보인다고 한들 그는 미래에 사람을 무수히 죽이는 폭군이 될 예정이었다.
당연히 레티시아는 거절 의사를 밝히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미카엘이 레티시아와 호르헤 사이에 끼어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레티시아.”
“…미카엘, 전하.”
레티시아의 목소리엔 울음이 반쯤 섞여 있었다.
이제 그녀와 미카엘의 사이엔 낭떠러지처럼 절대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미카엘의 작은 입에서 또렷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문고리.”
문은 열거나, 열지 않을 수 있다. 그중 무엇을 할지는 문고리를 쥔 사람의 선택이다.
미카엘은 레티시아에게 선택은 오롯이 그녀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눈물을 머금은 금안이 흔들렸다.
“전하, 저는…….”
그 순간,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이 작은 황태자에게 매여 버렸다는 사실을.
14
“레티시아.”
“제 말이 맞다고 하시네요.”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호르헤 경의 눈은 이제 반쯤 튀어나와 허공에 걸린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설마……. 말도… 안 돼.”
“뭐가요?”
호르헤 경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렸다. 미카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더니, 한마디를 조용히 내뱉었다.
“가시.”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레티시아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가시 달린 걸 만질 때는 조심해야 하잖아요……. 기, 기사님?”
레티시아는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중년 기사의 흉터투성이 얼굴에 물기가 서렸기 때문이었다.
“레티시아 우즈 양.”
호르헤 경은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그는 몇 시간 전 그들이 나누었던 숙녀의 처신에 관한 이야기는 잊어버렸는지 레티시아를 덥석 껴안았다.
“정말… 정말 고맙다.”
호르헤 경은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자식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넋 놓아 울더니, 레티시아의 손을 꼭 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제발 미카엘 전하 곁에 머물러 다오.”
“저, 전…….”
“미카엘 전하의 말을 알아들은 건 네가 처음이다. 그동안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나조차도.”
“……!”
레티시아는 충격에 휘청거렸다.
“손에 물 한 방울 묻지 않을 게다. 그저 전하의 곁에 있으면서, 네가 이해한 전하의 말씀을 알려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당황한 레티시아는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호르헤 경은 레티시아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당연히 강제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네 존재가… 나에게도, 전하께도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 다오.”
레티시아는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미카엘이 아무리 어리고 순진해 보인다고 한들 그는 미래에 사람을 무수히 죽이는 폭군이 될 예정이었다.
당연히 레티시아는 거절 의사를 밝히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미카엘이 레티시아와 호르헤 사이에 끼어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레티시아.”
“…미카엘, 전하.”
레티시아의 목소리엔 울음이 반쯤 섞여 있었다.
이제 그녀와 미카엘의 사이엔 낭떠러지처럼 절대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미카엘의 작은 입에서 또렷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문고리.”
문은 열거나, 열지 않을 수 있다. 그중 무엇을 할지는 문고리를 쥔 사람의 선택이다.
미카엘은 레티시아에게 선택은 오롯이 그녀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눈물을 머금은 금안이 흔들렸다.
“전하, 저는…….”
그 순간,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이 작은 황태자에게 매여 버렸다는 사실을.
Chapter 3. 황태자의 번역기가 된다는 건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화려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과 푹신한 매트리스가 느껴졌다. 기억은 천천히 돌아왔다.
‘하겠어요. 하녀든 뭐든… 여기에 있을게요.’
레티시아는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미쳤어! 레티시아, 드디어 완전히 미쳤구나!’
놀란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레티시아 님,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신가요?”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신 뒤에 붙여진 낯선 존칭에 잠이 싹 달아나는 듯했다.
질 좋은 드레스에 새하얀 앞치마를 두른 하녀가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지?’
하녀는 레티시아의 혼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으신데……. 그래도 밤늦게까지 정원에 계셨으니 많이 힘드실 거예요. 아침 드시겠어요?”
“네? 네.”
“그럼 바로 내오겠습니다.”
레티시아의 머리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핑핑 돌아갔다. 호르헤 경은 분명 자신을 일개 하녀로 취급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황태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어떻게 무를 순 없을까.’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미 무르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카엘처럼 얘기하자면, 유니콘이었다.
단순히 지금 그녀가 달아난다면 호르헤 경이 세상 끝까지 쫓아올 기세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미카엘에게서 떠날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누구도 미카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니…….’
당연히 미카엘의 부모님만큼은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자신이 너무나 멍청하게 느껴졌다.
화살받이 황태자로 내세우기 위해 키워진 방계 황족.
미카엘의 친부모는 오래전 죽어 땅에 묻혔으며 황제가 미카엘이 어떻게 자라든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누구도 미카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의 세상을 향한 증오심은 나날이 자라났을 것이다.
그런 그를 유일하게 위해 주었던 사람이 호르헤 경이었으니, 그가 죽자마자 미카엘이 미쳐 날뛴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
레티시아는 천장을 노려보았다.
수 명의 화가가 달라붙어 완성했을 듯한 천장의 그림에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두 연인이 담겨 있었다.
‘까짓것, 해보자.’
어쨌거나 자신은 정식 하녀로 황태자 궁에 입궁했다.
남작저의 하녀보다야 황실의 정식 하녀가 훨씬 돈을 많이 벌 것이다.
‘어쨌든 미카엘은 황제로 즉위하기 꽤나 전부터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어.’
소설상에선 과거의 일이었기에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황태자 시절의 미카엘이 여러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교류했다는 것 정도는 나와 있었다.
황제로 즉위하고 난 이후엔 필요 이상으로 말을 잘했고.
전생의 레티시아는 폭군 미카엘에 관한 부분들을 흥미 없이 대충 읽어 내렸다.
하지만 지금의 레티시아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큰 가치가 있는 대목이었다.
‘몇 년만 버티면 돼. 평생 미카엘이 저렇게 얘기하는 건 아니니까.’
미카엘이 현재 열 살 정도일 테니, 레티시아가 그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해석해 주어야 하는 건 길어 보았자 사오 년 정도일 것이다.
그동안 받는 월급을 꼬박꼬박 모은다면 궁을 나서자마자 바로 자그마한 식당을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도 부엌으로 보내 달라고 하면 보내 줄까……. 아, 미카엘 곁에 붙어 있어야겠지.’
생각에 푹 잠긴 레티시아의 코를 맛있는 냄새가 간질였다.
“레티시아 님, 식사는 테이블에서 하시겠어요, 침대에서 하시겠어요?”
“네?”
“침대가 아무래도 편하시겠죠?”
밝은 목소리의 하녀는 큰 은쟁반을 레티시아의 코앞에 내려놓았다.
“고, 고맙습니다.”
레티시아는 쟁반 가득 놓인 음식에 잠시 넋을 빼앗겼다.
제퍼슨 남작저의 주방에서 열심히 만든 음식들보다도 훨씬 호화로워 보이는 음식들이 쟁반 가득 담겨 있었다.
적어도 세 사람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듯한 양이었다.
“주방에서 레티시아 님이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다양하게 준비했대요.”
레티시아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아마 요리사는 몇 번이고 까탈스러운 미지의 손님에 대해 화를 내었을 것이다.
아래 직급의 하녀들은 요리사의 눈치를 보며 조금의 흠도 없으려고 노력하며 음식을 만들었을 테고.
아마 자신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손님 취급을 받는 듯했다.
레티시아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과일과 흰 빵, 파이를 좋아해요. 아침마다 다른 음식들까지 힘들게 준비해 주실 필요는 없다고 전해 주세요.”
“그럴까요?”
하녀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제퍼슨 남작가에서도 손님이 남긴 음식들을 보고 취향을 짐작하곤 했다.
“네.”
“알겠습니다.”
레티시아는 하녀가 나가기 직전, 조금의 사치를 부릴 용기를 냈다.
“저, 신선한 우유도 부탁드려요.”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호르헤 경이 도착했다.
그는 전날 밤의 흥분은 가라앉힌 모양인지 평소의 무뚝뚝하고 사나워 보이는 기사로 돌아가 있었다.
“아직 안 도망쳤군.”
“왜 도망치겠어요? 도망쳐 보았자, 전 제국을 뒤져서라도 절 찾아내실 거잖아요.”
“정확히 알고 있어서 기쁜데.”
빈말이 아닌지 호르헤 경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자리했다.
레티시아는 그가 안정을 되찾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만약 어제처럼 계속 흥분한 상태였다면, 진심으로 도망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호르헤 경은 그녀의 손에 서류 뭉치를 들려 주었다.
“황실 하녀 계약서인가요?”
“아니.”
호르헤 경이 고개를 저었다. 레티시아는 화들짝 놀라 서류의 가장 첫 장을 읽어 보았다.
<비밀 유지 서약서>
‘……?’
어리둥절해진 레티시아는 계속해서 서류를 읽어 보았다. 모두 비밀 유지 등 그녀가 지켜야 할 의무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많은 서류들 중 황실의 의무는 단 한 장이었다.
매달 지급하는 급여와 매년 인상분이 적혀 있었는데, 레티시아의 눈이 튀어나오게 만들기엔 충분한 액수였다.
‘제퍼슨 남작가에서 받던 급여의 열 배야!’
레티시아는 곧바로 펜을 들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서명 직전 호르헤 경이 이것이 황실 하녀 계약서가 아니라고 말한 점을 생각해 냈다.
그녀는 탁, 소리를 내며 펜을 테이블 위에 보란 듯이 내려놓았다.
“하녀가 아니라면, 전 뭐가 되는 거죠? 그건 알고 서명하겠어요.”
“생각보다 멍청하지 않군.”
“네. 그러니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뭐가 되는 건지, 왜 다른 하녀분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건지…….”
호르헤 경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크게 결심한 듯 한 단어를 내뱉었다.
“아무것도.”
“네……?”
순간 미카엘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라니, 이 생뚱맞은 말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자네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우즈 양.”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인 레티시아는 두꺼운 서류철을 흔들어 보이려다, 손목이 나가는 듯한 통증에 통째로 떨어트릴 뻔했다.
그녀는 서류철을 거의 호르헤 경의 코에 들이밀듯 물었다.
“그럼 이건 다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