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50)

15화

“우즈 양의 의무.”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호르헤 경이 이마를 찌푸렸다. 분명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지 고심하는 듯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의 말을 알아듣는 것보다도, 지금 상황이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지 파악하는 일이 훨씬 어려웠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듣게, 우즈 양. 사실 우즈 양의 본래 신분대로라면 황궁에 들어올 수조차 없어. 하녀가 되기에도 훨씬 부족한 신분이지.”

별로 새로운 사실도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알아요. 그래서 제퍼슨 남작님께 별 이상한 연극을 시키신 게 아니었어요?”

“잘 알고 있군.”

“그러면 하녀가 되면 되잖아요. 미카엘 전… 전하의 개인 하녀라면 얼마든지 곁에 있을 테고요.”

레티시아에겐 아직도 ‘미카엘’과 ‘전하’라는 단어가 서로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익숙해져야만 하리라.

어차피 미카엘이 평범한 귀족 도련님이었더라도 그녀와 미카엘 사이엔 결코 건너뛸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미카엘이 황태자라는 사실은, 그 벽을 거대한 산으로 만들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대체 뭐가 문제죠?”

“나는 우즈 양의 위치가 단순히 하녀에 머무를 거라곤 생각하지 않네.”

“네……?”

“아니, 그래서는 안 되지.”

호르헤 경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는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도 같은 눈빛으로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우즈 양, 생각해 보게. 나를 제외한 이 궁의 모든 사람들이 미카엘 전하를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백치로 생각하고 있네.”

“설마요!”

레티시아는 조금 분개하며 소리쳤다. 미카엘은 말을 조금… 아니, 좀 많이 특이하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백치라니?

“조금도 과장하지 않았다고 장담하지.”

“하지만 기사님은 이미 미카엘 전하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어요. 제퍼슨 남작님도 그 소문을 알아서 두려워하셨고요. 다들 전하께서 백치라고 생각한다면, 남작님이 기사님을 왜 그렇게 두려워한 거죠?”

호르헤 경이 코웃음을 쳤다.

“제퍼슨 남작은 수도에 올라온 지 6개월밖에 안 되는 변방의 촌뜨기에 불과해. 그자가 뭘 알겠나?”

“…….”

“뭐, 미카엘 전하의 말을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건 나름 극비긴 하지. 황실의 위엄과도 관련이 있는 문제니까. 대부분은 그냥… 아둔하다고만 알고 있어.”

그제야 레티시아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황실은 필사적으로 황태자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제했다.

그 덕에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다소 아둔한 황태자라고만 제국에 알려졌다.

그래서 훗날 황위에 오르는 과정에서도 그가 어린 시절엔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미카엘 전하께서 영민하다는 사실을 모든 이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건 오직…….”

“저뿐이군요.”

“그래.”

레티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일개 하녀에게 시킬 순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서 제가 ‘아무것도’ 아닌, 단지 제퍼슨 남작가의 일원으로 이곳에 있게 된 거군요.”

“정확해.”

호르헤 경은 서류철에서 단 한 장의 서류만 빼내더니, 나머지는 필요가 없다는 듯 바닥에 던져 버렸다.

수백 장의 서류들이 떨어져 사방에 휘날렸다.

“이제 알았을 테니, 서명하도록.”

하지만 레티시아는 펜을 다시 쥘 생각이 없었다.

“황궁에 하녀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시녀도 있고, 여자도 얼마든지 문관이…….”

레티시아는 미련을 내비쳤지만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퍼슨 남작을 구슬려서 만든 네 신분은 황실 하녀를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다. 시녀가 되기엔 턱없이 모자라지. 문관이 되려면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

레티시아의 침묵이 길어지자, 호르헤 경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하룻밤 동안 생각한 방안들을 털어놓았다.

“실은 몇 가지 방법이 더 있긴 하지. 심지어 약혼녀도 생각을…….”

“약혼녀요?”

레티시아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소스라쳤다.

“본디 우리 데브란트 제국의 황태자는 즉위할 때까지 약혼을 하지 않아. 그 이유를 아나?”

“감도 안 잡혀요.”

“잘 죽으니까.”

“…약혼녀가요?”

“둘 다.”

“…….”

레티시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애초에 미카엘이 황태자가 된 이유 자체가 화살받이였으니 짐작은 했지만, 약혼 자체를 할 수가 없을 수준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자랑스러운 우리 데브란트의 전통이지.”

“그 위험한 자리에 저를 내세우시려고 하셨군요.”

“잠깐 생각만 했다. 당연히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자리니 반대하는 자도 없겠지. 오히려 어디 만만한 집안의 여식이 화살받이로 끌려왔구나, 하고 안쓰럽게 볼걸?”

“…….”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건 금방 알았네. 바보 황태자를 바보가 아니게 만들어 주는 게 바로 황태자의 약혼녀라면, 금방 암살당하고 말 테니까.”

“저도 방금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즈 양은 이 궁에서 아무것도 아닌 위치로 지낼 수밖에 없는 거야. 이제 모두 이해했나?”

“…네.”

레티시아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호르헤 경은 레티시아 못지않게, 어쩌면 레티시아보다 훨씬 더 이 궁 안에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걸 어쩌겠는가.

“유니콘.”

“뭐라고 했지?”

“불가능한 일이라고요. 미카엘 전하께선 이 표현을 자주 쓰시니까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

그날, 레티시아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킬 테니 제발 미카엘의 약혼녀가 되어 달라는 호르헤 경을 진땀을 빼며 말려야 했다.

* * *

발끝까지 끌리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는 부드럽고 예뻤지만, 뛰고 달리기에는 불편했다.

쿵!

이제는 노파심을 숨기지 않는 하녀가 바로 달려왔다.

“레티시아 님, 역시 항상 치맛자락을 붙잡아 줄 아이를 부르는 게 좋겠어요.”

“괜찮아요. 좀 있으면 익숙해지겠죠.”

레티시아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기려고 노력하며 곧바로 일어섰다.

“저, 어차피 전 여기에서 아무것도 아닌데… 좀 더 간편한 옷을 입을 수는 없을까요?”

딱 자른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레티시아 님의 현재 위치는 일시적일 뿐이라는 게 호르헤 경의 전언이십니다. 그에 걸맞은 옷을 입으셔야 하고요” 레티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호르헤 경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대우하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은 몇 년 동안만 다른 사람들이 미카엘의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해 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걸 뭐라고 했더라…….’

그녀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분명 전생의 자신이 살던 세상에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느 날 레티시아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기억은 책처럼 늘 펼쳐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몇 달 전 단 한 번 겪은 기억에 불과했기에 제대로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레티시아는 전생의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외국 글자를 해석할 때 쓰곤 했던 기구를 가까스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번역기!’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평범하게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랄 때까지의 몇 년 동안만 번역기를 맡는 셈이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지금 이렇게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멋을 내는 것이었고.

“레티시아 님, 너무 굳어 계세요. 차라도 한잔 가져다드릴까요?”

“네. 감사드려요.”

레티시아는 사실 쓴맛만 나는 차를 싫어했지만, 하녀의 호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아 웃으며 대답했다. 곧 하녀는 차와 쿠키를 가져다주었다.

레티시아는 맛없는 차에는 입 한번 대지 않고 쿠키를 우물거리며 호르헤 경이 보내 줄 시종을 기다렸다.

정식으로 미카엘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주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기에 제법 긴장되었다.

“다 준비되었나?”

놀랍게도, 레티시아를 데리러 온 사람은 호르헤 경 본인이었다. 레티시아는 그를 따라나서며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기사님께서 직접 저 같은 것을 데리러 오셔도 괜찮아요?”

“너 같은 것?”

호르헤 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미카엘 전하의 경호가 비게 되잖아요. 그때 남작저에 오신 것도 그렇고……. 황태자 자리가 그만큼 위험하다면서요.”

“아하.”

그제야 호르헤 경은 레티시아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깨달은 듯했다.

“상관없어. 누구도 미카엘 전하를 해치지 않을 거다.”

“네……?”

“전하를 해쳤다간, 본인이 즉위시키려는 자가 황태자로 책봉될 수 있으니까.”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호르헤 경의 짤막한 설명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카엘이 황제의 명이 아닌 다른 자에 의해 죽게 된다면, 빈 황태자 자리에 누군가가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거당하겠지.’

어차피 다른 경쟁자들이 보기엔 지금의 미카엘은 모자란 바보이니, 결국엔 황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당파를 떠나 당분간은 미카엘을 살려 두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네가 일을 잘한다면,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지.”

호르헤 경의 이어지는 말 역시 미카엘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는 순간 위험해질 것이라는 뜻이었다.

“차라리 제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요? 기사님과 함께 있을 때만 전하께서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알려 드릴게요.”

“…….”

호르헤 경은 복도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섰다.

“우즈 양, 분명 자네가 나타나면서 미카엘 전하는 위험해졌어. 그건 사실이야.”

레티시아는 자신이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호르헤 경이 자신을 억지로 붙들었기 때문에 미카엘이 위험해졌다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나는 미카엘 전하를 저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왜요?”

레티시아는 진심으로 물었다. 분명 미카엘이 바보 취급을 받는 건 그에게나 호르헤에게나 비참한 일이리라.

하지만 미카엘이 충분한 준비가 될 때까지, 암살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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