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호르헤 경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레티시아를 빈방으로 이끌었다.
“미카엘 전하께서 기다리실 텐데요.”
“기다리시면 더 좋아하시겠지. 수업을 원체 좋아하지 않으시니.”
“오늘 일정이 수업이었나요?”
일정에 대해 전혀 듣지 못한 레티시아는 조금 놀라 눈을 깜박였다.
“일정이 중요한가?”
“중요하죠! 저, 저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호르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일 일정을 일일이 알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걱정 같군.”
“…네?”
레티시아는 멍하니 되물었다.
“전, 제가 필요할 때만 불려 가는 게 아니었나요? 미카엘 전하께서 경이나,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을 때에만…….”
“우즈 양, 이것 하나만 물어보지.”
“뭔가요?”
“우즈 양이 생각하기에 대화를 할 때와, 하지 않을 때라는 게 있나?”
“…아.”
“굳이 따지자면 깨어 있을 때와 잠을 잘 때 정도 되겠군. 우즈 양도 그에 맞추어 미카엘 전하를 보필하면 되겠어.”
“미카엘 전하와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한다고요?”
“왜, 싫나?”
“아, 아뇨. 싫은 건 아니지만…….”
레티시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제 보니 급료가 그렇게 엄청났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
미카엘이 일어날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니!
레티시아는 최선을 다해 미카엘이 빨리 평범하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까 물어본 사항에 대해 대답하자면…….”
“뭐, 뭐였죠?”
레티시아는 그제야 그들이 이 빈방에 들어온 이유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으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정작 그 이유를 깜박하고 말았다.
호르헤 경이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레티시아를 쳐다보았다.
“왜 내가 전하를 그냥 이대로, 안전하게 내버려 둘 수 없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나.”
“맞아요.”
호르헤 경은 그들이 빈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모양인지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카엘 님은… 누구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척 원통해하신다.”
“네?”
“밤마다 우시지. 늘 모른 척해 드리고 있지만.”
“…….”
레티시아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하며 제국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될 미래의 폭군이 지금은 밤마다 베갯잇을 적시고 있다니.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미카엘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소년이었다.
레티시아 못지않게 외롭고 고립된 소년. 동시에 상냥하며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여린 구석이 있는 소년. 그게 레티시아가 아는 미카엘이었으니까.
“…열심히 일할게요.”
“그래야지.”
호르헤 경은 흡족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단 30분 후.
레티시아는 자신이 조금 전 한 말을 땅을 치고 후회하고 말았다.
서재 안에는 미카엘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선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르헤 경의 말에 따르면 어렵게 모셔온 명망 높은 아카데미의 교수, 텟사 슈베러였다.
반백발을 양파 모양으로 꽁꽁 틀어 올린 슈베러 교수는 레티시아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매서운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어서 와요. 레티시아 우즈 양이죠?”
“네.”
레티시아는 벌벌 떨면서 대답했다.
“늦었지만 첫날이니 이 정도는 봐주겠어요. 어서 가서 자리에 앉아요.”
슈베러 교수는 미카엘의 바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대륙 전체에서 제일가는 목재로 꼽히는 흑단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비단 덮개를 씌운 의자였다. 당연히 레티시아의 주제에 어울리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다른 의자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오직 그곳뿐이었다.
“제가 자리에 앉는다고요?”
“내가 듣기로는, 오늘 제 수업을 들을 사람은 두 명이라더군요.”
레티시아는 도움을 요청할 호르헤 경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문밖으로 나선 후였다.
“뭔가 착오가 있을 거예요. 저는 글자만 겨우 읽을 줄 알아요. 아카데미를 다닌 적도, 준비한 적도 없고요.”
“글자를 읽을 줄 안다고요? 대단하군요. 알파벳을 가르칠 수고는 덜었어요.”
레티시아는 슈베러 교수가 자신을 놀리나 싶어 빤히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진지한 얼굴엔 금 하나 가지 않았다.
“만약 내 수업을 듣기 싫다면, 나가도록 해요. 나는 학생을 제외한 사람은 교실에 들이지 않으니까.”
결국 레티시아에게 선택의 여지는 남지 않았다. 그녀는 미카엘의 옆자리에 최대한 숨을 죽이며 앉았다.
미카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였기에, 제법 긴장되었지만 미카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슈베러 교수는 그들에게 교재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표지에 ‘데브란트의 역사’라는 글자가 금박으로 박힌 아주 두꺼운 책이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직접 만들어 나갈 교재입니다.”
“네?”
“펼쳐 보세요.”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거의 동시에 표지를 넘겼다.
“……!”
레티시아의 금안이 흔들렸다.
‘책이 아니야.’
표지를 넘기니 온통 백지장뿐인 공책이었다.
“앞으로 그 책에 배운 것들을 써 나가면서, 여러분만의 교재를 만들게 될 겁니다.”
“저, 역사만 배우나요?”
레티시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그 어떤 질문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그럴 리는 없겠죠?”
슈베러 교수는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본디 황태자 전하께는 여러 스승이 각자의 전문 분야를 알려 드려야 하겠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가 맡을 수 있는 과목은 모두 맡기로 했습니다. 전하께선 역사, 정치, 수학을 제게서 배우실 겁니다.”
레티시아는 안도했다. 세 과목 정도면 그리 많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슈베러 교수는 레티시아의 기대를 망가뜨리는 데 재주가 있었다.
“물론 황태자 전하께서 세 과목에 숙달되시면 다른 과목들도 시작해 볼 수 있겠죠.”
“…….”
“자, 시작해 볼까요?”
이어지는 수업 내용은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 레티시아는 단 한 문장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슈베러 교수는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로 기억나는 내용만 공책에 적으라고 말했다.
“…죄, 죄송해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괜찮아요. 그럼 전하께선 얼마나 적으셨는지 볼까요?”
미카엘 역시 백지를 내밀었다. 슈베러 교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두 분 다 이 교재를 쓰는 데 익숙하지는 않나 보군요. 그럼 한번 문답을 해 볼까요?”
“자두.”
레티시아는 바로 튀어나온 미카엘의 대답에 놀라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간신히 자신의 역할을 깨닫고 설명했다.
“조, 좋다는 뜻일 거예요. 전하께선 과일을 좋아하시거든요.”
“다행이군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두 분 중 답을 아는 분이 있다면 아무나 대답하셔도 좋습니다. 시황 바흐체예프께서 우리 데브란트 제국을 건국하시기 전엔, 대륙은 수없이 많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레티시아는 조금 안도했다. 그녀는 도저히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각 나라들의 영토 크기는 무척 작아서, 지금으로선 작은 시골 영지도 자신들이 독립된 국가라고 선언했다고 하죠. 심지어 시황 바흐체예프 또한 그다지 크지 않은 나라 출신이셨습니다. 실은, 지금 우리의 수도보다도 작은 나라 출신이셨죠.”
레티시아는 집중력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대체 뭔 질문이 이렇게 길단 말인가?
“여기서 질문. 왜 당시 대륙은 그렇게 작은 나라들로 이루어져 있었을까요?”
“……?”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의외로 질문은 그다지 어려운 말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고, 덕분에 이해하기가 무척 쉬웠다.
하지만 대답은 다른 문제였다.
‘시황께서 제국을 세우기 전이었으니 당연히 작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물론, 레티시아는 자신의 생각이 결코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정도론 영리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때, 미카엘이 한마디 내뱉었다.
“안킬로스.”
레티시아는 크게 당황했다.
미카엘의 대답이 정곡을 찔러서도, 의외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도, 크게 빗나가서도 아니었다.
그녀는 미카엘이 방금 한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안킬로스?”
슈베러 교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레티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하께서 뭘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건가요?”
“모, 모르겠어요.”
레티시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안킬로스라는 단어 자체가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미카엘은 대체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레티시아를 쳐다보며 다시 한번 더 말했다.
“안킬로스.”
“모르겠어요…….”
레티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다 그만두었다.
도망치다가 별 도리가 없으면 덤불 속에 고개를 박는다는 너구리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다.
슈베러 교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 나는 우즈 양을 통해서 전하와의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요?”
“여, 여태까지는 이해가 다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레티시아는 고장 난 자동인형처럼 ‘모르겠어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슈베러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두 사람의 손에서 책을 수거해 갔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으니 더 이상의 수업은 진행할 수 없습니다. 호르헤 경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리지요.”
그녀는 문을 나서기 직전, 두 명을 한번 돌아보며 뼈아픈 충고를 던졌다.
“다음 선생이 있다면, 부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레티시아는 고풍스러운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미카엘… 전하, 대체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하신 거예요?”
미카엘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금세 그 이유를 깨달았다. 미카엘은 레티시아마저 자신의 말을 영영 해석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전하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제가…….”
호르헤 경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바람에 레티시아의 말이 끊어졌다.
‘…….’
레티시아는 조금 놀라는 한편 비참해졌다.
그녀는 당연히 자신이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니 호르헤 경이 분노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호르헤 경은 레티시아의 가슴이 아릴 정도로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즈 양.”
“죄송해요.”
호르헤 경은 슈베러 교수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죄송할 건 없지. 그냥, 뭐가 문제였는지만 말해 다오. 네 능력이 사라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