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저, 별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전하께서 안킬로스라고 말하셨는데 그게 뭐였는지 모르겠어요.”
“안킬로스?”
호르헤 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전하께서 만들어 낸 단어인 걸까요?”
“……!”
호르헤 경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고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우즈 양, 안킬로스가 뭔지 모르나?”
“처, 처음 들어 봤어요. 태어나서 처음이요.”
“그거였어!”
호르헤 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가요?”
“우즈 양, 동물원에 가 본 적이 있나?”
수도 어딘가에 동물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곳에 갈 돈도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상상만 할 뿐이었다.
“아, 아뇨.”
“안킬로스는 바다 건너에서 온 동물이네. 제국엔 단 한 마리도 살지 않아. 우즈 양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그럼 전하는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야 안킬로스는 황궁에 한 달 정도 전시된 다음 동물원으로 보내졌으니까.”
“……!”
“전하께서 그때 제법 안킬로스에 흥미를 보이셨던 기억이 나는군. 그래, 그거였어…….”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히, 미카엘과 자신이 다른 세상의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카엘에겐 일상인 무언가가 그녀에겐 상상조차 못 할 일이라는 건 조금 견디기 힘들었다.
앞으로 자신과 미카엘의 격차는 수없이 발견될 것이다.
그때마다 자신의 유일한 가치인 해석 능력은 바닥으로 떨어질 테고. 레티시아는 고개를 들고 호르헤 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킬로스를 그린 그림이 있나요?”
“그림?”
호르헤 경은 책장을 한참 살피더니 책을 한 권 꺼냈다.
<제국 바깥의 맹수들>
그는 안킬로스가 그려진 페이지를 찾아 레티시아에게 보여 주었다.
“생각보다 못 그렸군. 이것보다 훨씬 이빨이 사납게 생겼어. 색도 여기 쓰인 것보다 훨씬 알록달록했고…….”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의 말을 흘려들으며 그림을 찬찬히 살폈다.
안킬로스는 레티시아가 여태껏 본 그 어떤 동물과도 닮지 않은, 굉장히 특이하게 생긴 동물이었다.
가장 큰 특징은 거북이처럼 넙적한 등에 나 있는 돌기들이었다.
마치 돌출된 척추뼈처럼 단단하고 크다고 적힌 돌기들은 안킬로스의 등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금안이 커졌다.
레티시아는 안킬로스 그림과 미카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제 알겠어요.”
“정말인가?”
호르헤 경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투였다.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께서… 저희한테 물어보신 건 제국이 건국되기 전엔 대륙에 작은 나라가 왜 그렇게 많았는지였어요.”
레티시아는 자신이 질문을 제대로 기억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호르헤 경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아주 헛소리는 아닌 듯했다.
용기를 얻은 레티시아는 말을 이어 나갔다.
“등에 돌기가 잔뜩 나 있잖아요. 이건 마치… 산맥처럼 보여요.”
“……!”
“우, 우리 데브란트엔 산만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산이 많으니까요. 저도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자랐고요.”
“그래, 그렇군. 우즈 양의 말이 전부 맞아.”
호르헤 경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산뿐만이 아니라 온갖 지형들이 데브란트 전역에 존재하지……. 도로가 정비되기 전까진 각지로 물자 수송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정도였어.”
“네. 전하께선 바로 그 점을 말씀하신 듯해요. 우리 제국엔 산처럼 험준한 지형이 많고, 그래서 작은 나라들이 많았다고요.”
호르헤 경은 대답 대신 미카엘을 진심으로 감동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건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제대로 못 하기는! 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게. 우즈 양은 아주 잘하고 있어.”
“하지만 서, 선생님께서 나가 버리셨는걸요.”
“…….”
호르헤 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선생님께서 가 버리신 건 전부 저 때문이에요! 미카엘 전하는 제대로 대답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선생님을 직접 찾아뵈어서 전, 전부 설명이라도…….”
“그럴 필요까진 없다.”
호르헤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슈베러 교수는 단 한 번의 기회라고 강조했지. 떠났으니, 돌아오지 않을 게다.”
“그럼 어쩌죠?”
레티시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호르헤 경은 슈베러 교수를 모셔오는 데 굉장한 공을 들였을 것이다.
이미 무수한 선생들이 미카엘을 떠났고, 슈베러 교수마저 떠났으니 대체 누가 미카엘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내 생각에는…….”
호르헤 경의 말이 뚝 끊어졌다. 그는 무릎을 굽혀 아직 앉아 있는 미카엘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전하.”
“…….”
“당분간 제가 전하를 가르치는 건 어떠십니까? 당연히 전하의 수준에 걸맞은 선생은 되지 못하겠지만, 다른 선생을 구할 때까지만 말입니다.”
“딸기.”
“좋으시대요.”
미카엘이 미소 지었다.
* * *
호르헤 경이 가지고 온 건 놀랍게도 레티시아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역사 교재였다.
화려한 그림이 많아 척 보기에도 어린아이를 위해 만든 교재였지만 레티시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난무하는 슈베러 교수의 수업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
레티시아는 신나게 교재를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재밌네?’
제국의 건국 이전, 아주 먼 옛날부터 시작된 교재는 재미있는 이야기책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레티시아가 잘 아는 이름들도 곳곳에 등장했다. 하늘을 다스리는 우라노스, 대지를 다스리는 가이아…….
레티시아는 교재에 푹 빠져 있다가, 간신히 배우러 온 건 자신이 아닌 미카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놀랍게도 호르헤 경은 무척 침울해 보였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슬쩍 곁눈질했다.
“……?”
미카엘은 첫 페이지만 유심히 살펴볼 뿐, 도통 넘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하, 마음에 안 드십니까?”
“종이.”
“종이 재질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호르헤 경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미카엘은 어딘지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반복해서 말했다.
“종이.”
쿵!
레티시아의 손에서 책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책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미카엘만 빤히 쳐다보았다.
“미카엘 전하.”
“…….”
“혹시… 글을 못 읽으시는 건가요?”
“글.”
미카엘은 곧바로 레티시아의 추측이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 그렇대요.”
호르헤 경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칼을 빼 들었다. 따뜻한 서재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칼날이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기사님!”
“그 자식들을… 모두 찾아내서 죽여 버려야겠어.”
“누, 누구를요?”
“그동안 전하를 키운, 아니 키웠다고 생각한 경호들.”
레티시아는 섬뜩한 칼날에 벌벌 떨면서도 호르헤 경을 말리려 애썼다.
책 속의 호르헤 경은 폭군과 대비되는 온화한 오른팔에 가까웠는데, 이렇게 보니 다혈질이 따로 없었다.
“그들을 죽이면 전하께도 누가 될 거예요!”
“모두 일개 용병들에 불과해! 내가 목을 베어 광장에 전시한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기사님은 그럴 분이 아니잖아요.”
호르헤 경은 카펫에 털썩 주저앉았다. 레티시아가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 두었지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평생 바닥을 기면서 살아야 할 것 같군. 전하께 사죄하면서.”
“기사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내 잘못이 맞다.”
호르헤 경은 바닥을 주먹으로 쾅 쳤다. 바닥에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육중한 주먹질이었다.
“그동안 나는 멍청하게 폐하의 명에만 따르며 살았다. 그게 미카엘 님께 도움이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미카엘 님이 어떻게 사시는지 한번 보러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미카엘 님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도, 당연히 글자 정도는 경호들이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했지……. 그치들이 그럴 작자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전부 내 죄다.”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가 그 자신을 비수처럼 찌르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맞는 말이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여태까지 그 누구도 미카엘이 글자를 읽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게 참 이상했다.
말을 제대로 못하는데, 글은 어떻게 읽겠는가. 황족이라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글자를 익히고 태어나는 것도 아닐 텐데.
‘아……!’
순간, 전생의 기억이 레티시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생의 세계에는 호르헤 경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사실, 전생의 자신 역시 그러했다.
그 세계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글자를 배웠으니까. 열 살짜리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생은 전생일 뿐이었다.
당장 레티시아의 고향 마을에만 하더라도 글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따금 마을에 찾아와 글과 산수를 가르쳐 주는 1년짜리 간이 교실은 5년에 한 번씩 올까 말까 했고, 운 좋게 그 시기에 배우지 못한다면 평생 배우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귀족들은 또 다르겠지.’
레티시아는 귀족 도련님, 아가씨들이 어떻게 자라는지는 잘 몰랐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분명 말문을 막 떼기 시작할 때부터 글자를 배울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글자를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으리라.
‘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데, 글자를 제대로 배웠을 리가 없어.’
레티시아에겐 너무나 당연한 추론이었지만 호르헤 경이나 다른 귀족들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미카엘이 아직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호르헤 경에게로 다가갔다.
“전하……?”
“햇빛.”
“전하는 괜찮으시대요. 결국, 다 잘될 거라고…….”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을 향해 미소 지었다. 결국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설령 해가 뜨지 않는 날이라고 해도 낮만 되면 햇빛은 세상을 비춘다.
“전하…….”
호르헤 경은 금방이라도 감동의 눈물을 흘릴 기세였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렇다면 전하께 글자부터 가르쳐 드려야겠군.”
“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조금 전부터 가슴에 맴도는 말을 입 밖으로 내자니 제법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가르쳐 드려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