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래도 되겠나? 정식으로 이런 경험이 많은 선생을 초빙하는 것이…….”
“그냥 글자인데요, 뭘. 그리고 혹시나 소문이 새어 나갈 수도 있고요.”
여태까지 미카엘의 스승을 자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학식이 높기로 유명한 명망 있는 학자들이었다.
그들이 미카엘에게 그 무엇을 가르치든, 황태자 궁을 드나드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기저귀도 떼지 못할 정도로 어린 귀족 도련님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들은 달랐다.
아무리 가정교사의 입을 철저히 막는다고 해도, 가정교사가 황태자 궁을 드나든다는 사실만으로도 온갖 해괴한 소문이 나돌 것이다.
다행히 호르헤 경 역시 레티시아의 말에 바로 수긍했다.
“그렇군.”
“제가 누굴 가르쳐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 볼게요.”
레티시아는 수줍게 말했다.
물론 호르헤 경이 미카엘에게 글자를 가르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호르헤 경의 자신감은 땅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알파벳을 익히는 간단한 일 정도는 레티시아 혼자서도 충분히 미카엘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레티시아는 바로 미카엘에게 알파벳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알파벳을 모두 익혔다.
하루 만에 알파벳을 모두 술술 써 내는 미카엘을 보니, 지금 모두의 속을 터지게 하는 그의 화법이 사실 연극이 아닌지 언뜻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엔 생각처럼 되는 일보다 그리되지 않는 일이 많은 법이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웬만큼 글자를 익히자마자 바로 받아쓰기로 들어갔다.
언제까지나 미카엘이 자신과 함께 글자만 익히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맛있는 자두를 먹었다.”
미카엘은 순식간에 무언가를 써 냈다. 종이를 확인한 레티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씨앗
그 후, 어떤 문장을 말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문장을 똑같이 베껴 쓰라고 해 보아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물론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쓴 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맛있는 자두를 먹으면 무엇이 남겠는가? 씨앗이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미카엘의 글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미카엘…….”
레티시아는 간신히 한숨을 삼켰다. 전 제국에서 미카엘의 편이라곤 오직 자신과 호르헤 경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미카엘이 멍청해 보이면 멍청해 보일수록 기뻐할 테니까.
게다가 레티시아는 분명 미카엘이 몇 년 뒤면 평범하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열심히 돕는다면 그보다 훨씬 빨리 청산유수로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하, 이제 저랑은 여기까지만 하면 될 것 같아요. 호르헤 경께 말씀드려서 다른 선생님을 초빙해 달라고 할게요.”
“…레티시아.”
“저는 전하를 더 가르칠 수 없어요. 배운 게 없는걸요.”
“바위.”
미카엘은 만약 레티시아가 아닌 다른 선생님이 자신을 가르친다면,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전하께선 어차피 안 움직이잖아요. 선생님들이 항상 여기까지 오시는데요, 뭐.”
“침대.”
“침대에서 안 내려오신다면, 선생님들이 침실까지 가실걸요?”
“…….”
“대신, 어느 선생님이 오시든 제가 전하의 곁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선생이란 선생은 모두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윽박지르는 사람들이니 충분히 무서워할 만했다.
“이름.”
“네.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요. 어차피 저는 전하가 깨어 있는 동안은 계속 옆에 있어야 한다고요. 그렇게 호르헤 경이랑 계약했거든요.”
미카엘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레티시아를 덥석 껴안았다.
“전하, 숨 막혀요!”
“평생.”
미카엘이 뜻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말하는 건 극히 드물었기에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평생까지는… 못 있겠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은 앞으로 몇 년만 미카엘의 곁에 있을 생각이라고 하려다 그가 미래의 폭군이라는 점을 떠올리고 간신히 수습했다.
“제가 전하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평생을 곁에 있겠어요?”
“관.”
“하하, 관에 들어갈 때까진 곁에 있으라고요? 전하, 겨우 열 살에 그런 얘기를 하시면 부정 타요!”
레티시아는 웃어넘기며 종이와 필기구, 교재를 정리했지만 미카엘의 집요한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다들 오랜만이군요.”
놀랍게도 호르헤 경은 새로운 선생 대신, 텟사 슈베러 교수를 데려왔다.
“안… 안녕하십니까.”
레티시아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슈베러 교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책을 펴 볼까요?”
슈베러 교수는 그들에게 일전에 주었던 책과 정확히 같은 책을 나누어 주었다.
“이제 전하께서 글을 읽으실 줄 안다고 들었어요. 그때는 조금… 소통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군요.”
“조약돌.”
“동의한다고 하시네요.”
슈베러 교수가 안경을 치켜올렸다.
“시작하기 전에, 우즈 양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요.”
“제,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고… 우즈 양도 내 수업을 열심히 들었으면 좋겠는데.”
“네!”
레티시아는 큰 자신이 없었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은 미카엘에게 매달린 금붕어 똥과 비슷한 존재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열심히 듣는 척만 하면 될 것이다.
“물론 저번엔 열심히 듣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단지, 이해를 못 한 게 너무 티가 나더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나요? 학생이 이해하지 못한 수업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건 교사인데요.”
슈베러 교수는 레티시아를 향해 싱긋이 미소 지었다.
“앞으로 우즈 양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한마디라도 있으면 알려 줘요.”
“왜, 왜 저한테……. 전하께서는 다 이해하시는걸요.”
“미카엘 전하께서 이해를 하시는지, 못 하시는지 그걸 알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즈 양에게 맞추기로 한 거랍니다.”
슈베러 교수의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레티시아는 그 어떤 반박도 먹힐 상대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기에 더더욱 반박할 수가 없었다.
미카엘이 슈베러 교수의 강의를 아무리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한들, 자신이 중간에서 번역기 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면 슈베러 교수는 다시 문을 박차고 나갈 것이다.
“최선을 다해 볼게요.”
예상대로, 레티시아는 5분에 한 번꼴로 슈베러 교수에게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알려야 했다.
당연히 수업은 슈베러 교수가 원래 계획했던 시간을 훨씬 넘겨서야 끝났다.
‘계속 이런 식으로 미카엘과 선생님만 방해할 수는 없어.’
레티시아는 슈베러 교수의 수업 내용들이 황족의 기준에서 결코 어려운 편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무엇보다도 수업 내내 바보가 된 기분이 드는 것이 너무나 비참했다. 레티시아는 그런 기분을 가장 꺼려 했다.
1년 전, 충분히 맛보았으니까.
그래서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침실로 들여보내자마자 호르헤 경에게 부탁했다.
“혹시, 저도 따로 수업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예요. 저도 따로 공부를 하고 싶어서요. 자꾸 미카엘 전하의 발목만 잡는 느낌이라……. 당연히 비용은 제가 낼게요! 급료에서 제외하고 주시면 돼요.”
호르헤 경은 난처한 얼굴이었다.
“교사를 따로 구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우즈 양은 미카엘 전하의 곁에 계속 붙어 있어야 하지 않나.”
“…….”
레티시아의 말문이 막혔다.
듣고 보니 호르헤 경의 말이 맞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도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카엘이 허락만 해 준다면 언제든지 함께 따로 쉬운 레벨의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자신이 이전에 걱정한 애먼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건 어떤가?”
호르헤 경이 갑자기 밝아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실 도서관 출입증을 가져다주겠네. 24시간 내내 불이 꺼지지 않고 열려 있는 곳이니, 언제든 가서 책을 볼 수 있을 거야. 서재보다 훨씬 다양한 책이 있으니, 수준에 맞는 책들도 쉽게 찾을 수 있겠지.”
도서관.
레티시아의 머리가 낯선 단어의 의미를 찾아 헤맸다.
분명 평소에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단어였지만 레티시아는 분명 그 단어를 알고 있었다.
‘아……!’
전생의 기억 속에 파묻혀 있는 단어였다. 의미를 기억해 낸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을 향해 밝게 웃었다.
“좋아요.”
* * *
“미카엘 전하, 좀 더 크게 휘두르십시오!”
“아주 잘하셨습니다.”
“열 번만 더 휘두르십시오.”
“하나, 둘, 셋, 넷……!”
연무장 안에 호르헤 경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레티시아는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푹신한 소파에 앉아 호르헤 경에게서 열심히 검을 배우는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수업 내내 시큰둥한 기색이었던 미카엘은 호르헤와의 검술 수업에는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호르헤는 왜 진작 자신이 검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기뻐했다.
‘전하께선 서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건 못 견디신 거지. 암, 부친께서도 그랬으니.’
레티시아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미카엘은 이미 세상은 펜대만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호르헤 경에게서 배운 검술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될까.’
쓰라린 생각에 레티시아의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레티시아!”
“……?”
레티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미카엘을 올려다보았다.
“저, 전하?”
“물.”
“물이요……?”
미카엘은 무언가를 꿀꺽, 삼키는 시늉을 해 보았다. 레티시아는 미소 지었다.
“안 아파요. 약 먹을 필요는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정말 대단하군.”
호르헤 경의 하루 이틀이 아닌 추임새도 들려왔다.
“나한테도 항상 물이라고 말씀하시던데… 걱정하시는 거였나.”
“상황에 따라 달라요.”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목이 마를 때도 물이라고 하시고… 마실 걸 권하실 때도 물이라고 하시죠.”
“나도 우즈 양만큼 전하를 잘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제가 항상 곁에 있잖아요.”
호르헤 경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노련한 기사의 사람을 속속들이 꿰뚫는 듯한 눈빛은 항상 부담스러웠지만, 오늘만큼은 어딘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호르헤 경이 조용히 말했다.
“신께 감사해야겠군. 우즈 양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