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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19/150)

19화

검술 훈련은 저녁 늦게야 끝났다. 미카엘은 피곤한 기색을 보였고, 저녁을 먹는 것조차 거부한 채 바로 잠자리에 들고 싶어 했다.

황태자에게 음식을 억지로 먹일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레티시아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게 되었다.

“오늘도 도서관인가?”

“그럼요.”

“건투를 빌지.”

호르헤 경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전사를 상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장하게 인사했다.

“오늘도 데려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뵈어요.”

레티시아는 평소처럼 공손하게 인사한 다음 도서관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 갔다.

이제는 치렁치렁한 드레스에도 제법 익숙해졌기 때문에 빨리 뛰어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레티시아는 정치 서고에 기대어 <꼬마 도련님을 위한 칼라스의 정치 입문>을 빼내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미카엘의 번역기가 된 지 석 달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번역기라고 생각하는 편을 더 좋아했다.

누구도 뜻을 알아들을 수 없을 낱말이었지만, 레티시아 스스로가 자신을 번역기라고 칭할 때에만 역할이 분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번역기 노릇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선 항상 미카엘보다 조금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했다.

레티시아에게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는데, 미카엘의 이해력은 항상 슈베러 교수를 놀라게 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미카엘이 레티시아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말을 할 때마다 항상 문제가 발생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을 전혀 해석할 수 없었고, 슈베러 교수는 바로 언짢아했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슈베러 교수도 사정을 이해해 주었지만, 몇 번이나 그만두겠다며 일어서는 슈베러 교수에게 사정하는 건 레티시아의 몫이었다.

‘곧 정치에 들어가니까… 제대로 배워 두는 게 좋겠지.’

슈베러 교수는 며칠 전 수업에서 곧 정치 수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미 역사를 통해 어느 정도 감을 익힌 상태니, 진도를 팍팍 나가겠다고 경고하면서.

슈베러 교수 나름의 배려였지만, 레티시아에겐 선전포고나 다름없게 들렸다.

‘당분간은 잠을 자지 않고서라도 정치를 미리 배워 두어야겠어.’

지금 생각하니, 가정교사를 구해 주는 대신 도서관 출입증을 얻어 준 호르헤 경이 너무나 고마웠다.

만약 일반적인 가정교사였다면 레티시아가 필요로 하는 학습량을 가르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요구했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책을 몇 권 더 빼 들었다. 이 책들을 다 읽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레티시아가 한창 독서에 빠져 있을 때였다.

“레티시아.”

“…전하!”

레티시아는 소스라쳤다. 눈앞에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서 있었다.

“어, 어떻게 여기까지……. 얼른 돌아가세요!”

레티시아는 남에게 들킬까 싶어 소리 죽여 얘기했지만 흥분과 공포를 숨길 수는 없었다.

“난초.”

난초의 꽃말은 ‘보고 싶다’였다.

“네. 제가 보고 싶으셨으면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셨으면 되고요. 아니, 제가 도서관에 간다는 건 한 번도 말씀드린 적 없는데 어떻게 아신 거예요?”

“난초.”

“저도 전하가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볼 거잖아요! 지금 이건 유니콘, 유니콘 같은 짓이라고요.”

레티시아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미카엘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주절거릴 뿐이었다.

“대, 대체 경호를 어떻게 하길래……!”

예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미카엘은 그를 천덕꾸러기로만 보는 사람들에게 방치당하며 자라는 게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눈이 있었고, 그를 진심으로 위하는 호르헤 경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장 삼엄한 경호를 받는 침실에서 홀로 빠져나와, 도서관까지 들키지 않고 들어와서 자신을 찾아내기까지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마술사.”

“전하!”

레티시아는 깜짝 놀라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주로 시장에서 묘기를 부리는 떠돌이 마술사는 높은 평가를 받는 마법사와 달리 사기꾼 취급을 받곤 했다.

미카엘은 지금 당당하게 그가 속임수를 써서 경호들을 따돌렸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분명 일대 소란이 일어났으리라.

레티시아는 결국 읽던 책들을 다시 서가에 꽂아 넣은 다음 미카엘을 꼭 붙들었다.

“전하, 이제 저희는 돌아가야 해요.”

놀랍게도 미카엘은 여태까지의 고집을 꺾고 순순히 레티시아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사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도서관을 몰래 빠져나왔다.

레티시아는 놀라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랠 수가 없었다.

‘속임수를 썼어. 벌써부터.’

물론 레티시아 또한 가출하면서부터 숱하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미카엘은 단지 그녀 자신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속임수를 써 여러 사람들을 따돌렸다.

‘역시 미래는 바뀌지 않는 걸까.’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폭군이 되는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슴 한편에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레티시아의 미래는 이미 바뀌었으니까.

레티시아는 절대 가족들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책 속의 그녀처럼 이용만 당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도 않을 테고.

‘그러니 미카엘도 충분히 바뀔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레티시아는 어느덧 느려진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세웠다. 가쁘게 빠져나오다 보니 다리가 아팠다.

“죄송해요, 잠시만 쉬었다가……. 전하?”

미카엘은 그녀도 정면도 아닌 회랑의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이야.’

레티시아는 곧 미카엘이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미카엘은 하늘을 보고 있지 않았다. 새카만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보름달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미카엘이 감상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 주려고 했지만, 충분히 쉬었는데도 미카엘의 시선은 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달을 왜 그렇게 보세요? 뭔가 이유가…….”

“브로치.”

“……!”

미카엘을 그들이 만났던 날 떴던 보름달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레티시아는 자신이 여태까지 미카엘이 준 브로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귀중한 걸!’

레티시아는 곧바로 미카엘에게 사과하기 시작했다.

“저, 정말 죄송해요. 제가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라… 그냥, 상황이 그동안 너무 정신이 없어서…….”

미카엘은 대답 대신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맑게 웃었다. 어린 소년의 꺄르르 웃는 소리가 회랑에 울려 퍼졌다.

레티시아는 마주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 미래가 다 뭐야. 내가 앞으로 몇 년 동안만 잘 지켜 주면 돼. 그러면 미카엘이 상처받을 일들도 줄어들 거고, 폭군이 되지도 않을 거야.’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레티시아를 엄습했다.

그동안 레티시아는 자신이 체구가 너무 작아 모두가 열두 살로 착각하는 열네 살이라는 점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탓에 하녀를 구하는 면접에서 계속 탈락할 때조차도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몸을 원망해 보았자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하지만 지금만큼은, 레티시아는 자신이 호르헤 경보다도 거대하기를 바랐다.

이 세상 무엇에게서도 미카엘을 지켜 줄 수 있을 만큼.

* * *

“하으암…….”

레티시아는 이불 속에 파묻혀 뒤척거렸다.

아침 햇살이 따갑게 눈을 때리는 걸 보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몇 초라도 더 이불 속에 있고 싶었다.

그때, 하녀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러 일으켰다.

“레티시아 님!”

“……?”

레티시아는 조금 놀라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전속 하녀, 애슐리는 밝고 상냥했지만 별것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떠는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무, 무슨 일인가요?”

“황태자 전하께서 드디어 황실 무도회에 초대를 받으셨대요!”

누군가가 얼음물을 뒤집어씌운 것처럼 잠이 싹 달아났다.

레티시아는 두 가지 방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명색이 황태자인 미카엘이 아직 황실 무도회에 단 한 번도 나서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분명 자신 또한 황실 무도회에 가야 하리라는 점이었다.

물론, 번역기로서.

“어, 언제인가요?”

“열흘 뒤래요. 시간이 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애슐리는 신나게 조잘거렸다.

레티시아는 대체 뭐가 다행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애슐리의 말에 반박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쌓여 있었다.

“호르헤 경께서 일정을 보내 주셨나요?”

“아직은 없어요. 전령에게서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이쪽에 말을 전하신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게 서두를 일이 없는 것 같으니, 천천히 몸단장부터 하시는 게 어떨까요?”

레티시아는 끄응, 신음하며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오늘 너무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아요.”

“실은, 저도 마찬가지예요.”

애슐리가 레티시아의 귀에 속살거렸다. 레티시아는 피식 웃었다.

“알았어요. 힘들어도 밝은 체를 하면 덜 힘이 든다는 거죠?”

“이래서 내가 레티시아 님을 좋아한다니까.”

“저도 이래서 애슐리가 좋아요.”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애슐리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황급히 나간 사이, 레티시아는 겉옷을 걸쳤다. 분명 호르헤 경이리라.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소식은 들었나?”

“네.”

“이런 기쁜 소식이……! 다 우즈 양 덕분일세.”

호르헤 경은 진심으로 감격한 얼굴이었다.

“저, 저는 오히려 걱정되는걸요.”

“그런 걱정은 다 어른들에게 맡겨 줬으면 하네. 우즈 양이 생각해야 할 건 오직 우즈 양 본인과 미카엘 전하뿐이야.”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 생각나는 문제점만 해도 거대한 낭떠러지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여태까지 겪은 바로는, 호르헤 경에겐 다소 대책 없는 면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찡그린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미카엘 전하께서 말을 잘하지 못하신다는 게 드러날 텐데, 그건 어떻게 하죠?”

“이미 폐하께서 다 생각해 두신 바가 있더군.”

호르헤 경은 미소 지었다.

“전하의 약점까지 만천하에 공개하겠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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