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레티시아는 너무 기겁한 나머지 목이 졸리는 느낌을 받았다.
“노,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이 아니네.”
호르헤 경은 웃었다.
“만약 우즈 양이 없었다면 당연히 폐하도 그런 결정을 못 내리시겠지. 미카엘 전하가 바보라고 못 박는 것밖에 더 되겠나.”
“…….”
“하지만 우즈 양 덕분에 미카엘 전하는 단지 말을 좀 특이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 그날 무도회에서 우즈 양의 역할이 클 터이니, 잘 부탁하네.”
눈앞이 아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호르헤 경 역시 무언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카엘 전하가 이렇게라도 인정받았다는 게 기쁜 거야, 호르헤 경은.’
어떻게 보면 호르헤 경은, 예전에 가족들의 자그마한 칭찬 하나를 갈구하던 시절의 자신과 비슷했다.
어쩌면 그 시절의 자신보다도 더 애처로운 상태일지도 모른다.
레티시아는 황제가, 그렇지 않아도 모자라다고 알려진 황태자가 더욱 모자라다고 만천하에 선포하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미카엘이 생각보다 더 똑똑했어.’
그녀가 미카엘의 번역기가 된 이후부터 미카엘은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레티시아를 놀라게 했지만 경호원을 모두 따돌리고 도서관으로 잠입하는 데까지 성공한 것만 보아도 그랬다.
분명 최근 미카엘의 행동거지는 모두 황제의 귀로 들어갔으리라.
‘그래서 미카엘을 완전히 묻어 버리려는 거야. 더욱더 껍데기뿐인 황태자가 되라고.’
하지만 지금 와서 레티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미카엘이 이번 무도회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는 황태자로 낙인찍혀 결국 황위에 오르지 못한다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폭군이 될 가능성 자체가 차단되는 셈이니까.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 꼴을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당연히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폭군이 되는 미래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결심했다.
‘어떻게든 미카엘이 이번 무도회를 잘 넘기게 해 주겠어.’
* * *
“허억, 허어억……!”
레티시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장 춤 선생, 플로레스 부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게 무슨 짓입니까! 무도회장에서도 그렇게 할 생각입니까? 당장 일어나세요!”
“죄, 죄송합니다.”
레티시아는 사과하고는 다시 일어섰다.
대체 왜 자신도 춤을 연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호르헤 경은 만일을 위해 춤을 익혀 놓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쨌든 이번에는 제가 춤을 추지는 않는 거, 맞죠?’
‘못 추는 거겠지. 그 신분으로는 파트너의 어깨에 손을 올리지도 못할 테니까.’
‘그런데 왜 연습을 해야 해요?’
‘지금이 아니라도 나중에는 춤을 출 수도 있으니까.’
결국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위해 춤 선생을 초빙한 지금, 같이 춤을 배워야 한다는 호르헤의 말에 넘어갔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아낄 수 있다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돈은 평생 내다 버려도 남을 만큼 많은 호르헤 경이 그런 말을 한 건 순전히 자신을 꼬드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레슨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미카엘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레티시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재미있으신가요…….”
“자두.”
“하하하, 전하가 좋다니 저도 좋네요.”
미카엘은 그 말이 뭐가 그렇게 기쁜지 활짝 미소 지었다.
문 근처에서 그들을 주시하던 호르헤 경이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투로 말했다.
“플로레스 부인, 미카엘 전하와 우즈 양을 같이 연습시키는 건 어떻소?”
“오!”
플로레스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체격도 비슷한데 말이죠.”
“저랑 저, 저, 전하요?”
“그럼요. 있지도 않은 상대를 상상하면서 연습하는 것보다야 실제 파트너와 함께 연습하는 게 훨씬 실력이 빨리 는답니다.”
“저는 춤 실력이 좋을 필요도 없잖아요!”
레티시아는 기가 막혀 항의했지만 플로레스 부인과 호르헤 경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미카엘 전하는 춤 실력이 좋으셔야지. 폐하께선 당일, 파트너도 발표하신다고 했다. 아마 미카엘 전하와 나이가 비슷한 영애가 될 것 같군.”
“…….”
레티시아의 머리가 아파 왔다. 상황은 점점 제어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미카엘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레티시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최근 들어 저 열 살짜리의 천사 같은 얼굴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하지만 미카엘이 이렇게 웃을 때마다 레티시아의 심장은 바닥까지 떨어지곤 했다.
‘예전엔 잘 웃지도 않았는데…….’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았던 시절을 생각해 보았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 시작할까요?”
플로레스 부인이 활기차게 묻더니, 레티시아의 대답도 듣지 않고 피아니스트에게 연주를 지시했다.
빠른 무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전하!”
레티시아는 소리를 지르며 미카엘에게서 완전히 떨어졌다. 몸이 벌벌 떨렸다.
연습을 시작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자신은 벌써 미카엘의 발을 세 번이나 밟았다.
“괜찮으신가요……. 아뇨, 대답하지 마세요. 안 들어도 알 것 같아요. 안 괜찮으시죠? 너무 죄송해요…….”
“나무.”
레티시아는 잠깐 멈칫했다. 미카엘은 자신이 나무처럼 튼튼하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뭐라고 하시지?”
“너무 아프셔서, 더는 저랑 하기 싫으시대요.”
미카엘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방금 거짓말을 한 것 같은데, 우즈 양. 계약을 깨고 싶은 건가?”
“…아주 튼튼하셔서, 저한테 발을 열 번이고 밟혀도 된다고 하시는군요.”
“딸기.”
“아, 그건 해석해 줄 필요가 없네. 우즈 양의 방금 해석이 맞고, 열 번 밟혀도 좋다고 하신 것 같은데. 맞는가?”
“네.”
“자, 다시 시작해 볼까요?”
플로레스 부인은 이번에도 누구의 대답도 듣지 않고 피아니스트에게 연주를 지시했다.
그리고 레티시아는 5분 만에 미카엘의 발을 또 밟고 말았다.
“저 도저히 못하겠어요! 이러다 전하의 몸을 상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레티시아의 금안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 레티시아는 거짓말은 얼마든지 꾸며 낼 수 있었지만, 눈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정말로 자신이 미카엘을 다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보기에는, 전하의 몸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다만.”
“제 생각에도 그렇네요. 우즈 양, 그렇게 겁먹을 필요가 없어요! 털신으로 밟혀 봤자 아프지도 않으니까, 원한다면 이 기회에 전하를 팍팍 밟아요.”
“정 신경이 많이 쓰인다면 최대한 빨리 춤 실력이 느는 게 답이지 않나. 그러면 전하께도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을 텐데.”
레티시아는 무어라 반박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결국 뻐끔거리다 닫고 말았다.
‘이 사람들, 다 미쳤어……!’
* * *
춤 연습을 마치고 기진맥진한 미카엘을 침실에 집어넣고 난 다음,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을 붙들었다.
“오늘도 도서관을 갈 건가?”
“아뇨.”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피곤하네요.”
“그렇게 보이는군. 그럼 용건이 뭐지?”
레티시아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이제 그녀는 호르헤 경이 무서운 사람이 아니며, 자신이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들어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지금 꺼낼 말은 조금 떨렸다.
“미카엘 전하께서 제게 주신 브로치를 돌려주세요.”
“…….”
“사자 모양 브로치요.”
“나도 그게 뭔지 안다.”
레티시아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호르헤 경은 최근 들어 거의 보이지 않았던 냉담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돌려받고 싶어요. 전하께서 제게 주신 거니까요.”
“…….”
“전하께서도 제가 그걸 하고 무도회장에 가는 걸 원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걸 어떻게 믿지?”
“그야 얘기를…….”
레티시아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체 뭐가 호르헤 경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 호르헤 경의 심기가 불편한 건 분명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놈의 브로치인 듯했고.
호르헤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어떤 브로치인지, 알고 있나?”
“엄청 비싼 브로치요. 제가 평생 벌어도 못 살 정도로 귀하고 값나가는……. 과분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미카엘 전하께서 황태자로 책봉되시기 전, 유일하게 가지고 계셨던 황족의 상징이다. 부친의 유품이지.”
“……!”
“만약 네가 그걸 들고 수도에 나타나, 황족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면 상당히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을 거다. 어쩌면 지금조차도.”
“그런 걸 어찌… 제게.”
레티시아는 달달 떨리는 턱을 간신히 움직이며 대답했다.
미카엘이 그리 귀중한 걸 자신에게 주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레티시아가 느끼는 건 오직 두려움뿐이었다.
“과연 그때, 전하께서 그 사실을 알고 네게 주셨을까?”
“…아니죠.”
레티시아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당시의 미카엘은 겉만 황족이지, 황족이 알아야 할 지식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장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알고 계세요. 분명.”
“…….”
호르헤 경은 입을 다물고 레티시아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레티시아는 굳이 흐르는 침묵을 깨지 않았다.
미카엘과 함께 있으면서,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으니까.
“왜 굳이 지금 달라는 거지?”
레티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랬군.”
“이제 와서 갑자기 달라고 하길래 이상하게 생각하셨나요?”
“아니, 그 반대다.”
“……?”
“왜 내게 달라고 하지 않는지, 그동안 이상하게 생각했지.”
불길한 예감이 레티시아를 엄습했다. 그녀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지는 손바닥을 가리기 위해 주먹을 슬며시 말아 쥐었다.
‘호르헤 경은 내가 보석을 밝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