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만약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레티시아는 계획보다도 더 빨리 이 일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미카엘만으로도 언제 폭군의 기색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위험부담이 있는데, 호르헤 경마저 그녀를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면 달아나는 수밖에.
하지만 호르헤 경의 이어지는 말은 레티시아의 예상을 깨부수었다.
“넌 이 브로치를 애지중지했잖나.”
“……?”
레티시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만 벌렸다.
“왜 그런 멍청한 표정을 짓지? 남작가에서의 일은 다 잊어버린 건가?”
“아……!”
그제야 레티시아는 자신이 브로치를 돌려받기 위해 남작에게 애원한 건 물론, 호르헤 경을 가장 두려워할 때조차도 그에게 브로치를 돌려 달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왜 달라졌지? 나는 우리가 계약을 한 바로 그 당일에, 네가 브로치를 요구할 줄 알았다.”
“그건…….”
레티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멍청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그냥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렸다고?”
호르헤 경이 기가 막힌 얼굴로 되물었다.
“아무리 관심이 없고 무식하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황실의 보물을 잊어버릴 수가 있나?”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잖아요.”
“그건 답이 되지 못해.”
레티시아는 머리를 굴렸다. 사실은 자신도 너무 바빠서 잊어버렸다는 게 그다지 제대로 된 답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이 브로치를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겼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차근차근 짚어 보았다.
‘……!’
금안이 충격에 흔들렸다.
“그래, 답을 찾아냈나?”
“…네.”
호르헤 경은 말해 보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제가 이 브로치를 소중히 여긴 건… 미카엘이, 줬기 때문이에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호칭을 정정하지 않았고, 호르헤 경 역시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힘들고 고될 때마다 미카엘을 만난 그날을 떠올리면서 브로치를 쥐었어요. 미카엘 말고는, 그 누구도 두렵고 힘들 때 제 곁에 있어 주지 않았거든요. 근데 브로치를 쥐고 있으면, 미카엘이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레티시아는 말을 끝맺지 못했지만 호르헤 경은 필요한 대답은 모두 얻은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당연히 필요가 없겠지. 그래서 전하께서 지적한 다음에야 생각났다는 거군.”
“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브로치를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저 이 상황을 피하고만 싶었다.
호르헤 경이 품속에서 천천히 무언가를 꺼냈다.
“무도회에 하고 나가게.”
“…….”
레티시아는 말없이 브로치를 받았다. 사자는 미약한 조명 아래에서도 만물의 왕처럼 빛났다.
호르헤 경이 조용히 말했다.
“언제까지나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지낼 수는 없어. 그게 우즈 양의 신분이자 위치가 될 거야.”
레티시아는 손바닥에 올려진 브로치를 바라보았다.
미카엘을 만난 그날부터 집을 떠날 때까지의 1년 동안 이 브로치는 레티시아의 유일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레티시아는 이 브로치를 달고 무도회장에 나간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자신이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브로치만큼은 찬란하게 빛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브로치를 단 그녀를 황가의 일원으로 대우할 것이다.
굳이 제퍼슨 남작저의 일원 행세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일개 남작가의 먼 친척이라는 신분은 브로치가 주는 위압감에 비하면 없으니만 못 할 테니까.
레티시아가 아무리 비천한 신분이더라도 고위 귀족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그녀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무도회장에 브로치를 하고 나가지는 않겠어요.”
호르헤 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지?”
“저는… 영원히 전하의 곁에 머무를 생각이 없어요.”
레티시아는 그동안 이 말을 할 기회를 엿보았고, 지금이 마땅한 때였다.
“이 브로치를 하고 무도회에 나간다면, 전 평생 전하의 곁에 머물러야 하겠죠.”
“꼭 그렇지만은 않지. 우즈 양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계약을 깰 수 있어. 그게 계약이니까.”
“말장난은 하지 말아 주세요.”
레티시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호르헤 경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계약서에 의하면 레티시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황궁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로치를 한 모습을 공식 석상에 내보이는 순간 계약서는 휴지 쪼가리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그 브로치는 단순히 미카엘의 선물이 아닌, 황태자가 사가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황족의 징표였으니까.
레티시아는 그 무게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평생을 묶이는 것보단,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게 나아요.”
레티시아 역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라는 점이 달갑지는 않았다.
이따금 누가 신분을 물으면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하녀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허울뿐인 위치를 위해 평생을 미카엘에게 저당 잡힐 수는 없었다.
“…알겠다.”
호르헤 경은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레티시아를 한동안 응시하더니,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 *
애슐리에게 듣기로는, 미카엘이 책봉된 후 열린 황실 무도회는 모두 여섯 번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하께선 그 어떤 무도회에도 나가지 못하셨죠. 핑계야 전하께서 너무 어리다는 거였지만…….”
애슐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레티시아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았기에 굳이 뒤를 캐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동안 미카엘이 왜 초대받지 못했느냐가 아니라, 왜 하필 지금 초대받았느냐였다.
그건 애슐리가 대답해 주지 못하는 문제점이었고.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레티시아 님께서 걱정하실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만약 제가 실수라도 한다면…….”
“비밀 하나 알려 드릴게요.”
애슐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레티시아 님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도 모를 거예요. 조금만 능력을 선보이셔도, 깜짝 놀랄걸요?”
“…그게 비밀인가요?”
“천하의 레티시아 님도 모르시는 눈치였으니 비밀이죠.”
레티시아는 웃고 말았다.
“애슐리를 만나서 너무 행운이에요.”
“저도 레티시아 님을 모셔서 행운이랍니다.”
애슐리는 예쁘게 손질한 레티시아의 머리에 월계수 모양 머리 장식을 달아 주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시는 게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티시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처음부터 애슐리에게 자신의 어정쩡한 위치 때문에 눈에 띄고 싶지 않으니, 수수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 때문에 과연 자신의 모습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르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울 속 레티시아는 분명 평소의 그녀와는 달랐다. 훨씬 차갑고 흠 한 점 없을 듯한 인상의 레티시아였다.
“완벽하네요.”
“그렇죠?”
애슐리는 피식 웃었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완벽한 레티시아 님.”
* * *
오늘은 레티시아가 미카엘을 침실 앞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는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였다.
레티시아는 미리 무도회장에 은근슬쩍 들어가 있다가, 미카엘이 성대하게 입성하면 그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사실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자신과 함께 입장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어린아이의 투정을 일일이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레티시아는 무도회장에 들어가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황태자 궁에서 지낸 몇 달 동안 화려한 건물에는 이골이 났다.
하지만 황태자 궁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미카엘과 호르헤 경을 제외하면 레티시아가 동류라고 생각하는 고용인이 전부였다.
무도회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차려입은 귀족들로 가득 차 있었고, 레티시아는 화려한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레티시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그냥 긴장을 풀고 사람들에 섞여 있으면 된답니다, 우즈 양.’
레티시아가 믿을 것이라곤 오직 플로렌스 부인의 말뿐이었다.
그녀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인파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꼬마 아가씨, 이름이 뭐죠?”
그녀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중년의 귀족 부인과 마주치기 전까진.
“네?”
“보호자 없이 다니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군요.”
귀족 부인은 먹잇감을 찾은 까마귀처럼 그녀에게 집요하게 캐물었다.
“보아하니 수십 분 동안 이 주위만 빙글빙글 돌던데, 부모님을 잃어버렸나요?”
“아, 아뇨.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레티시아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고 했으나 귀족 부인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혹시 초대장도 없는데 호기심에 몰래 들어온 거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요. 요즘 폐하의 심기가 불편하셔서 아가씨의 집안까지 불똥이 튈지도 몰라요.”
레티시아는 의례적인 대답조차 잊은 채 소스라쳤다.
사실 바로 이런 대화가 레티시아가 이곳에 미리 들어온 이유이기는 했다. 다른 귀족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으니.
하지만 레티시아가 예상한 건 남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지, 이렇게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레티시아를 의심하는 귀족과.
“놀라는 걸 보니 내 추측이 맞는군요. 자, 어서 돌아가요. 입구까진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저, 초대받았어요.”
“그래요? 그럼 초대장이 어디 있죠?”
레티시아는 자신의 침실 보석함에 고이 모셔 놓은 브로치를 떠올렸다.
만약 자신이 그 브로치를 가슴팍에 달았더라면 이런 질문을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 결과, 초대장 한 장 받지 않고 황태자의 측근 자격으로 들어왔으면서도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제퍼슨 남작가는 별 도움이 안 돼.’
호르헤 경은 제퍼슨 남작가가 황궁에 출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런 초라한 하급 귀족의 먼 친척이라고 해 보았자, 상대방의 의심만 증폭시킬 뿐이리라.
레티시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우두커니 서 있을 때, 시종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