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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150)

22화

“……!”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쏠렸다.

레티시아는 그 기회를 틈타 귀족 부인에게서 도망쳤다.

“아가씨!”

귀족 부인이 소리쳤지만 레티시아는 멈추지 않고 미카엘을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인파에 합류했다.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미카엘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적어도 숨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폐하께서도 곧 오시겠지.’

황제가 미카엘의 상태를 공표하고 나면, 그때부터 그녀의 역할이 시작된다.

지금은 괜한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 틈바구니에 숨어 있는 게 상책이었다.

누구도 레티시아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무리들이 서로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데.”

“생긴 것만 멀쩡하지, 속은 완전히 아둔하다고 들었어.”

“아둔하다 뿐인가? 나는 백치라고 들었는데.”

“설마.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체면이 있는데, 백치를 황태자로 내세웠겠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자네들, 전부 입 다물게! 지금 여기가 어딘지는 잊었나?”

레티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들은 곧 대놓고 미카엘의 자질에 대해 논하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폐하께서 원하시는 걸지도.’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서 오시면 좋겠어. 내 역할이나 잘 수행할 수 있게.’

그렇게 레티시아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씩은 더 큰 귀족들 사이에 끼여 황제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넘도록.

‘뭐지……?’

레티시아는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미카엘이 도착하고 나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황제의 도착을 알리는 시종장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레티시아만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건 아닌 모양인지 주변에서 의아해하는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그동안 미카엘은 호르헤 경의 곁에서 허공을 무심하게 응시하기만 했다.

‘미카엘…….’

레티시아의 가슴이 저려 왔다.

차라리 황제가 참여하지 않는 무도회였다면 황태자인 미카엘이 저렇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자신과 호르헤 경의 도움으로 다른 귀족들과 교류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 상황은 조금 달랐다.

호르헤 경과 자신은 황제가 미리 짜 둔 계획에 따라야 했고, 그가 직접 나타나기 전까진 미카엘을 위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명색이 무도회이건만, 악단은 땀만 뻘뻘 흘리며 제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화를 내는 기색을 보이거나 무도회장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위세 높은 카일 대공 일가마저 그랬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전령이 도착했다.

“폐, 폐하께서 편찮으신 관계로 오늘 무도회는 불참하십니다.”

호르헤 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전령에게로 다가갔다.

“그럼 무도회는 중지인가?”

그의 목소리엔 어딘가 간절함마저 엿보였다.

‘그래, 차라리 중지가 맞아.’

레티시아는 정말로 황제가 아프고, 그래서 무도회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미 눈치챘듯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아닙니다. 폐하께선 황실의 손님들을 이렇게나 오래 기다리게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결례를 끼쳤으니, 뒤는 황태자 전하께서 이어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방에 수군거림이 일었다.

동시에 레티시아는 깊은 절망을 맛보았다.

황제가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부터 반쯤 예상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상만 하는 것과, 실제로 그 상황이 들이닥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이다.

“명, 받들겠나이다.”

호르헤 경은 무릎을 꿇었다가 다시 일어서더니, 일그러진 얼굴로 미카엘을 돌아보았다.

“미카엘 전하.”

레티시아는 이제 자신이 나설 때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인파를 헤치며 미카엘과 호르헤 경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 하나 두지 않았기 때문에 퍽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작은 테이블로 착각한 듯 팔을 걸치거나 모자를 얹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마침내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곁에 도착했을 때, 애슐리가 열심히 손질해 준 붉은 머리칼은 반쯤 산발이 되어 있었다.

분명 출발하기 전 화장대의 거울 안에서 보았던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비쳐지리라.

‘최악의 상황이네.’

레티시아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황제는 분명 이 상황을 의도했다.

황제가 직접 공식적인 자리인 황실 무도회에서 미카엘이 영특하나 말이 아직 늦될 뿐이라고 공표한 다음, 레티시아를 통해 미카엘이 그 사실을 입증하는 게 본디 이 자리의 취지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이미 귀족들은 미카엘이 그 누구에게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는 점을 눈치챘다.

심지어 최측근이라 알려진 호르헤 경과도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미카엘이 단지 말을 이상하게 할 뿐이고, 그 말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레티시아뿐이라고 주장해 보았자 어설픈 거짓말로만 보일 것이다.

미카엘은 백치로, 호르헤 경은 사기꾼으로 만들어 황실에서 더더욱 고립시키는 것.

그게 황제의 목표였다.

‘잠깐만.’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어차피 미카엘은 황실 내에서 사실상 바보 취급을 받고 있었다. 타격이 가기는 하겠지만, 언젠가 영특함을 보여 준다면 충분히 되돌릴 수 있는 피해였다.

하지만 호르헤 경은 달랐다.

백치 황태자를 영특한 인재로 꾸민 사기꾼 취급을 받게 된다면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질 뿐만 아니라, 미카엘의 유일한 측근 자리에서도 쫓겨날 것이다.

‘이 일의 타깃은, 호르헤 경이야.’

레티시아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비틀거렸다.

호르헤 경은 소설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어린 미카엘의 유일한 우군이었다.

레티시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호르헤 경이 지금 실각되었다면, 분명 소설 속에서 언급되었을 거야.’

하지만 소설에서 호르헤 경은 미카엘의 어린 시절부터 그 자신이 암살되기 직전까지 줄곧 미카엘의 곁을 지켰다고 언급될 뿐, 실각을 암시하는 그 어떤 문장도 없었다.

레티시아는 공포로 덜컹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그래, 이건 그냥 일시적인 위기야. 호르헤 경은 몰락하지 않아.’

어떤 방식으로든 호르헤 경은 위기를 벗어날 것이다.

* * *

“뒤는 황태자 전하께서 이어 가라고 하셨습니다.”

전령의 눈빛이 그와 미카엘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호르헤는 일그러진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폐하……!’

비통한 외침은 오직 속으로만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미카엘을 돌아보았다.

“미카엘 전하.”

“…….”

“이제 전하께서 이 무도회를 주관하셔야 합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평소의 미카엘이라면 무어라 대답이라도 했겠지만, 오늘은 겁을 먹은 모양인지 입은 뻥긋조차 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호르헤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괜찮으실 겁니다. 곧 우즈 양이 올 테고…….”

미카엘보다도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들이었다.

호르헤는 바싹 마른 입 안을 적셨다. 사실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보았자 모든 건 황제의 의도대로 흘러갈 것이다.

이제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아둔하다는 소문만 떠도는 황태자에서 백치 황태자가 되리라. 지금으로선 최대한 의연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미리 눈치챘어야 했어.’

어린 주군이 드디어 황제의 인정을 받았다는 희열감이 그동안 자신의 눈을 가렸다. 마냥 기뻐하지만 않고 떨떠름했던 레티시아의 반응이 떠올랐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는 건가.’

호르헤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데려오기 전까진 황궁에 발 한번 들이지 못한 열네 살짜리 소녀보다도 못한 선구안을 가졌다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자신의 안일함이 미카엘에게 큰 피해를 끼치지 않았는가.

호르헤가 고문처럼 느껴지는 미카엘의 침묵을 감내하고 있는 와중에, 드디어 레티시아 우즈가 그들 곁에 도달했다.

“우즈 양.”

호르헤는 자신이 안도하며 그녀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왜지?’

이미 황제가 모든 판을 깔아 둔 이상, 레티시아 우즈의 존재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레티시아가 그들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안도감을 느꼈다.

호르헤가 그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해 보려는 찰나,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숙부님.”

“……!”

호르헤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작새처럼 치장한 귀족들 속에서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한 젊은 남자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인파를 뚫고 나올 필요도 없었다. 주위 귀족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 주었으므로.

“…페르 공작 각하.”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제 유일한 숙부 아니십니까.”

이제 서른도 채 되지 않은 페르 공작은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예전처럼 일리야라고 불러 주십시오, 숙부님.”

“…….”

호르헤는 입을 열었다간 이 상황에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이를 꽉 악물었다.

페르 공작은 미카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카엘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침묵이 흘렀다.

호르헤는 나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감히 황태자와 공작 사이의 대화에 일개 기사 신분인 자신이 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페르 공작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숙부님, 소문이 헛된 건 아니었나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지나치신 말씀이십니다, 공작 각하. 전하께선 조금 긴장하셨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하기야 처음으로 무도회에 나오셨으니, 긴장하셨을 수도 있겠군요. 저는 아홉 살부터 연회를 주관했지만 개인차가 있는 법이니…….”

페르 공작은 미카엘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고 호르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느덧 청년 공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가셔 있었다.

그는 정확히 호르헤와 미카엘, 그리고 미카엘의 곁에 그림자처럼 바싹 붙은 레티시아만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말을 내뱉었다.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제가 숙부님만큼은 어떻게든 살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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