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50)

23화

순간, 호르헤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런 거였군.’

그제야 호르헤의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 조각들이 짜 맞추어졌다.

아주 오래전, 그는 페르 공작의 차남이자 태어날 때부터 백작 위를 부여받은 호르헤 페르 백작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카엘의 아버지, 안소니 데브란트를 따르기 위해 성도 작위도 버려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호르헤의 형이 요구한 조건이었고, 호르헤는 저항 하나 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가문에 반납했다.

하지만 호르헤는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안소니 데브란트는 그가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으니.

십수 년이 흐르는 동안 호르헤는 단 한 번도 그가 떠나왔던 가문과 연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문은 그에게 멍청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부 과거로만 여겼었는데…….’

호르헤는 끓어오르는 증오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연극은 단지 그를 가문에 다시 복속시키기 위함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 나라의 황태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한 상황에 빠진다는 건 황제나 페르 공작가의 계산에 들어 있지 않았으리라.

‘…….’

호르헤는 침묵 속에서 페르 공작을 쏘아보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독사에 발목을 물렸지만, 그대로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물린 발목은 잘라 내면 되는 문제이니.

* * *

레티시아는 반쯤 얼어붙은 채 페르 공작과 호르헤 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페르 공작가는 슈베러 교수와의 수업에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이름이었다.

‘호르헤 경이, 페르 공작의 숙부라니…….’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도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호르헤 경을 단순히 실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페르 공작가에 복속시키기 위해서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눈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이 해야 할 대답을 알았다.

호르헤 경은 페르 공작의 말에 따라야만 했다.

‘그래야 호르헤 경이 살아.’

만약 호르헤 경이 거부한다면 그의 현 지위는 물론이고 목숨마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물론 호르헤 경이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미카엘과 레티시아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거부하더라도 마찬가지 결과로 이어지리라.

셋이 죽는 것보다는 둘이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

‘어차피 소설에서도 호르헤 경이 이때 공작가의 손을 잡아서 목숨을 부지했을지도 몰라.’

소설 속에서 폭군 미카엘의 어린 시절은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았으므로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레티시아는 제발, 호르헤 경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길 바라고 또 바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호르헤 경이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일리야.”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호르헤 경……!’

페르 공작은 그다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숙부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페르 공작은 하려던 말도 잊어버릴 정도로 경악하며 아래만 내려다보았다. 주위의 모든 귀족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호르헤 경이 무릎을 꿇더니, 무척이나 비굴한 표정으로 페르 공작을 올려다본 것이다.

페르 공작이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호르헤 경의 입이 열렸다.

전장에서의 호령으로 다져진 또렷한 음성이 무도회장 전체에 울렸다.

“이미 지고하신 황제 폐하와 공작 각하께선 제 죄를 알고 있으신 듯하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고백하겠습니다.”

“경,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페르 공작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호르헤 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저는 여태까지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속여 왔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주위에 빼곡히 모인 귀족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께서는 황태자 전하께서 아둔하기 그지없다는 소문을 들으셨을 겁니다.”

동조하는 웅성임이 일었다.

“그 소문은, 제가 퍼뜨린 거짓 소문입니다.”

레티시아는 입을 벌렸다. 말려야만 했다. 호르헤 경이 자진해서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르헤 경이 냉담한 목소리로 그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았으니까.

“황태자 전하께선 그 부친과 마찬가지로 영민하십니다. 저는 그 사실을 여태까지 의도적으로 숨겨 왔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호르헤 경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어린애 팔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시니까요.”

사방이 그 어느 때보다도 소란스러워지더니, 제법 지체가 높아 보이는 남자 귀족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럼 벙어리라는 말인가?”

호르헤 경이 고개를 저었다.

“말을 전혀 하지 못하시는 건 아닙니다. 단지, 가까운 사람만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어렵게 말씀하실 뿐입니다.”

레티시아는 순간적으로 혀를 깨물 뻔했다.

그동안 자신이 그렇게나 원망해 왔던 호르헤 경의 반쪽짜리 진실을 교묘하게 돌려 말하는 화법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동시에 그녀는 호르헤 경의 진정한 의도를 깨달았다.

‘미카엘을 위해서야.’

호르헤 경은 황제가 파괴해 버린 이 무도회의 본디 의도를 되살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저는 전하의 그 성향을 부추기고, 이용해 왔습니다. 전하께서 충분히 영특함을 드러낼 수 있는 자리에서조차 가려 왔습니다.”

호르헤 경은 회한에 잠긴 듯한 한숨을 잠깐 내쉬었다.

“오늘 이 자리 역시 그럴 생각으로 준비했지만, 폐하께선 이미 모든 걸 눈치채신 듯하군요.”

경악으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누군가가 귀족들 사이에서 뛰쳐나왔다.

레티시아는 처음 보는 남자 귀족이었는데, 호르헤 경의 몸이 잠시 움찔거린 걸 보면 아는 사이인 듯했다.

“호르헤, 대체 목적이 뭐였나! 황태자 전하께선 자네가 그렇게나 충성했던 안소니 전하의 하나뿐인 혈육이시잖나!”

“목적이라……. 머리가 있는 자라면 전부 알 텐데.”

호르헤 경은 차갑게 웃었다.

“당연히 실각이지.”

“……!”

레티시아의 커질 대로 커진 눈이 흔들렸다.

‘호르헤 경, 어쩌시려는 거예요…….’

사방에서 더욱 큰 웅성거림이 일었다. 레티시아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호르헤 경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저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황태자… 미카엘 님께선 황태자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이 자리는 죽은 사람이 앉는 자리지. 산 자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레티시아는 신음을 삼켰다. 호르헤 경은 단 몇 분 만에 너무나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꾸며 냈다.

“안소니 전하의 독자를 시체로 만들 수는 없었다.”

“…내가, 사람을 한참 잘못 봤었군.”

이름 모를 귀족은 바닥에 침을 탁 뱉더니 뒤로 물러섰다.

쿵.

호르헤 경이 검을 검집째로 바닥에 떨어트리는 소리였다.

‘아…….’

레티시아는 우는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뺨을 타고 바닥에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은 막지 못했다.

호르헤 경은 그녀를 흘낏 보더니 페르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각하, 소란은 이 정도로 충분할 듯합니다. 제 발로 감옥까지 걸어가기를 원하십니까?”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페르 공작이 소리쳤다.

“근위대, 호르헤 경을 체포하라.”

한 명씩 구역을 나눠 경호를 도맡은 근위대원들이 무도회장 곳곳에서 일사불란하게 뛰어오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레티시아는 속으로 기적이 일어나길 빌었지만 모든 건 정해진 수순대로 진행되었다.

호르헤 경은 그들에게 체포되기 직전, 레티시아를 향해 입을 소리 없이 움직였다.

레티시아는 입술 읽는 재주는 없었지만 그의 마지막 말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호르헤 경이, 입버릇처럼 항상 하던 말이었으니까.

‘전하를 잘 부탁하네.’

* * *

‘빌어먹을……!’

페르 공작은 욕을 내뱉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번처럼 공작가와 황가의 이익이 합치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미카엘 황태자를 고립시키고자 하는 황제와, 호르헤를 복속시키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가 완벽하게 맞물렸기에 계획 자체가 가능했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페르 공작은 고개를 들었다.

근위대원들에게 붙들린 호르헤 경이 무도회장 밖으로 사라지자, 모든 귀족들이 페르 공작만을 돌아보고 있었다.

기분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숙부는 원래 없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이번 계획은 일차적인 상호 이익 외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바로 공작가와 황가의 협력이었다.

비록 공작가는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실패했지만, 황가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얻는 이익이 있을 터였다.

‘폐하께선 미카엘 황태자를 최대한 고립시키라고 하셨지.’

본인에게는 불행하게도, 숙부는 지나치게 유능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황실엔 황태자가 생각보다 영특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분명 황제는 그런 말을 지껄이는 모두를 지하 감옥에 집어넣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좋든 싫든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황제 본인이 책봉한 황태자인 데다 화살받이로서의 이용 가치가 충분했다.

결국 황제는 미카엘의 수족을 잘라 버리고, 백치 황태자라고 전 제국에 공표할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을 도와주는 대가로 공작가는 떨어진 수족을 주워 가기로 했고.

이미 황제의 목표는 반절 성공했다.

‘황태자까지,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

현재 무도회장에 자리한 각 귀족들에게 미카엘은 겁에 질린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측근 호르헤가 사실은 사기꾼이었다는 게 밝혀진 후가 아닌가.

“그럼…….”

평정을 되찾은 페르 공작이 말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어린아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무도회장에 울려 퍼졌다.

“전령.”

웅성거리던 무도회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모든 눈들이 일제히 열 살배기 황태자만을 바라보았다. 페르 공작은 솥뚜껑만 한 눈으로 미카엘을 내려다보았다.

“전하, 뭐라고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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