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50)

24화

“전령.”

“예?”

“전령.”

미카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이 오직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내뱉었다.

레티시아는 달달 떨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호르헤 경의 끌려가는 모습을 본 이후에도 미카엘의 말을 완벽히 해석할 수 있을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동안 오직 이날을 위해서 훈련했잖아.’

그동안 레티시아는 단순히 호르헤 경이나 주위 고용인들에게 미카엘의 의사를 전달하는 수준이 아니라, 공식 석상에서 미카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화법과 말투를 익혔다.

호르헤 경은 매우 깐깐한 선생이었으며 레티시아가 말실수라도 하면 코웃음을 치곤 했다.

짜증이 불쑥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제법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귀족 중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미카엘 전하께서는 아직 무도회가 끝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뭐라고?”

여태까지 레티시아가 투명인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페르 공작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수작이 아닙니다. 미카엘 전하께서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단 한 마디만 하셨다. ‘전령’이라고. 그 어디에 그런 뜻이 있지?”

“예. 그리고 아까 들어온 황제 폐하의 전령이, 무도회는 황태자 전하께서 이어 가라는 폐하의 명을 전해 주었습니다.”

레티시아는 페르 공작이 반박할까 봐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폐하의 명을,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시는 미카엘 전하의 의지를 거부하시겠습니까?”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의 말을 기억했다.

‘네가 약하게 보인다면, 미카엘 전하 역시 마찬가지로 보일 게다.’

페르 공작은 헛기침을 몇 차례 하더니 미카엘을 향해 물었다.

“전하, 이 계집아이가 그냥 말을 꾸며 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아니다’라는 아주 간단한 말 한마디만 해 주길 빌었으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품.”

미카엘의 목소리는 또렷했으나 무도회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문에 빠트렸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곤.

“거품?”

페르 공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여러분, 이제 모든 진실이 드러난 듯하군요. 역시 미카엘 전하께선…….”

기계처럼 무미건조한 소녀의 목소리가 페르 공작의 말을 끊었다.

“미카엘 전하께서는 공작께서 거품처럼 사라질 무의미한 질문을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페르 공작은 홱 몸을 돌렸다.

“대답해라. 넌 누구지? 누구길래 이런 삿된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브로치 사건 이후, 얼마간 고민이 많아 보이던 호르헤 경은 황제가 그녀의 위치를 직접 정하기로 약속했다고 전해 주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허상에 불과했고, 레티시아는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로 돌아가 버렸다.

“저는 호르헤 경께서 말씀하신, 미카엘 전하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레티시아는 조금 전 호르헤 경이 그랬던 것처럼 교묘하게 말을 돌렸다.

미카엘의 말을 세상에서 오직 그녀 한 명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기로만 보일 것이다.

그녀는 페르 공작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군중 속에서 터져 나왔다.

“저 아가씨는 아까 내가 본 사람이에요! 부모도 없고, 어느 집안 아가씨인지도 말을 못 하더군요!”

레티시아가 미카엘이 무도회장에 입장하기 전 만난 귀족 부인이었다.

“당연히 몰래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황태자 전하의 전속 하녀쯤 되는 것처럼 보이네요. 그런데도 수치를 모르고 귀족 아가씨처럼 꾸미고 들어왔다니, 뻔뻔해라!”

페르 공작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기쁜 기색은 감출 수 없었다.

“하녀라고 하기에도 너무 어린 것 같습니다만.”

주변에서 동의하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레티시아는 그 속에서 ‘기껏해야 열두 살’, ‘직책이 있을 리가 없다’ 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미카엘이 그녀의 오른손을 꼭 쥐었다.

“전하……!”

레티시아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지금 미카엘이 그녀에게 친분을 보이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상대로 귀족들의 웅성거림은 더욱더 커져 갔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자신의 손보다 훨씬 부드러운 손이 두려움으로 달달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품.”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녀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미카엘 전하께선, 부인께서 하신 말씀 역시 들을 가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조약돌.”

“제 해석이 바르다고 하셨습니다.”

“검.”

“…….”

레티시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미카엘이 말하는 검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상황에선 호르헤 경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문제는 호르헤 경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 미카엘에게 좋을 게 없다는 점이었다.

레티시아의 침묵이 길어지자 미카엘이 그녀를 재촉했다.

“검.”

순간, 강한 갈등이 그녀를 엄습했다.

레티시아는 얼마든지 미카엘의 말을 본래 의도와 다르게 꾸며 낼 수 있었다.

미카엘은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므로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미카엘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잠시 속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니야.’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미카엘의 곁에서 번역기 노릇을 하며 느낀 점이 있었다.

미카엘은 오직 그녀를 통해 타인과 소통했다.

그런 그녀가 미카엘의 의도와 전혀 다른 말을 꾸며 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면?

미카엘의 레티시아에 대한 신뢰가 산산이 조각나지 않겠는가.

결국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떠나야 할 테고, 미카엘의 곁에는 그 누구도 남지 않으리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바보 황태자를 진심으로 따를 사람은, 오직 호르헤 경뿐이었으니까.

“미카엘 전하께서는… 호르헤 경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유니콘.”

“호르헤 경께서 경 본인이 말한 이야기와 같은 사람이라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벌.”

“그동안 호르헤 경께선 전심전력을 다해 전하를 도왔고, 그에 전하도 깊은 감사를 표한다고 하셨습니다.”

“덫.”

“호르헤 경이 체포된 건 부당한 처사이며, 금방 풀려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미카엘은 ‘덫’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아주 잠시간 흘렀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군중 속에서 외쳤다.

“호르헤 경이 어디서 거짓말 잘하는 평민 고아 한 명을 데려와 옷만 잘 입힌 게 아닐까요?”

곧바로 동의하는 발언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레티시아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주먹을 쥐었다.

이 자리에는 그녀의 존재를 보장해 줄 호르헤 경도, 보장해 주기로 거짓 약속을 한 황제도 없었다.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 혼자뿐이었다.

레티시아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예. 저는 옷만 잘 입은 평민이 맞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아 역시 맞았다. 레티시아에게는 가족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학교 한번 다닌 적 없고, 당연히 가정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일어나면 집안일을 하고 산에 가서 세브란을 캔 이후, 자기 전까지 또 집안일을 하는 게 제 일과였습니다.”

놀랍게도 레티시아가 말을 하면 할수록 모두가 입을 다물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시선들이 오히려 레티시아를 고양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레티시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런 제가, 어떻게 미카엘 전하의 말을 꾸며 내겠습니까? 만약 꾸며 낸다면 전하께선 충분히 제 말이 틀렸다고 의사를 표현하실 수 있습니다.”

작게 동의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그것도 그렇지.”

“아까 보니 고집은 확고하시더구먼.”

“저 평민 아이가 전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확실해 보여.”

웅성거림은 점점 더 커졌는데, 귀족들 대부분이 감히 평민이 즉석에서 황태자의 발언을 꾸며 낼 정도의 기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페르 공작이 사방을 노려보자 레티시아에게 동조하는 웅성거림은 곧바로 줄어들었다.

그는 거만하게 레티시아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말해 보아라, 평민 계집아이야. 네 말이 맞다면 미카엘 전하께선… 영민하시겠지. 하지만 내 눈에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구나.”

곧바로 분노가 성냥불처럼 치밀어 올랐다. 페르 공작은 대놓고 미카엘을 모욕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해 줄 수 있을 것 같군요.”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슈베러 교수였다.

모두가 페르 공작에게 그랬던 것처럼 슈베르 교수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오더니, 미끄러지듯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슈베러 교수에게로 모였다.

“저는 미카엘 전하를 지난 몇 달간 가르치고 있습니다.”

술렁거림이 곳곳에서 파도처럼 일었다.

슈베러 교수는 자신이 누군지 소개하지 않았다. 무도회장에 모인 모두가 그녀를 페르 공작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텟사 슈베러는 페르 공작가 못지않게 위세 높은 후작 가문의 안주인이었다.

하지만 후작과 정략결혼한 귀족 영애치고는 자유분방한 환경에서 자랐던 텟사는 좀처럼 후작가의 안주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길은 이혼이었다.

처음에는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텟사 슈베러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 비웃음은 텟사 슈베러가 제국의 국경을 다시 그은 업적을 통해 아카데미에서 가장 유명한 교수 중 한 명이 되면서 경외감으로 바뀌었다.

지금 역시 사람들은 슈베러 교수가 무슨 말을 할 건지 알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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