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슈베러 교수는 사교계에 잘 나타나지 않았고, 간혹 나타나더라도 춤 한번 추지 않은 채 가까운 사람들과만 교류하고 돌아갔다.
그런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섰다? 내일은 황태자와 호르헤 경이 아니라 슈베러 교수가 귀족들의 최대 관심사가 될 터였다.
“저는 그동안 황태자 전하께 정치와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전하께선 석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두 과목만큼은 아카데미의 학생과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셨습니다.”
모두가 경악하는 와중에 페르 공작만큼은 놀라지 않았다. 그가 이미 모두 보고받은 내용이었으므로.
페르 공작은 피식 웃으며 보고 중 슈베러 교수의 주장에 타격을 입힐 만한 내용을 골라냈다.
“그 말은… 필담은 된다는 소리입니까?”
슈베러 교수는 언제나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보다시피 말은 통하지 않고, 글 역시 통하지 않으면 그냥 전하께 무엇을 가르치든 가만히 계시니, 대충 알아들었으리라 지레짐작하신 게 아닙니까?”
“공작 각하.”
슈베러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이 페르 공작에게 똑바로 꽂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움찔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시선이었지만, 페르 공작은 그대로 맞받아쳤다.
“제국 아카데미의 청강생이던 시절보다 머리가 많이 나빠지신 모양이군요. 방금 황태자 전하와, 우즈 양이 어떤 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는지 보여 주지 않았나요?”
페르 공작의 입꼬리는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 초라한 계집아이 말입니까? 마치 주인 아가씨의 옷을 훔쳐 입은 하녀처럼 보이는?”
“우즈 양이 입고 있는 옷은 전하께서 우즈 양에게 하사하신 옷입니다. 말을 조심하는 습관을 들이셔야겠군요.”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슈베러 교수, 정말로 저 하녀의 말이 사실입니까?”
“제 명예를 걸고 말하겠어요. 우즈 양이 조금 전 한 말은 모두 사실이며, 전하께선 분명 우즈 양이 옮긴 뜻대로 말씀하셨다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러워졌다.
모두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한마디씩 하는 바람에 거대한 벌집이 웅웅거리는 듯한 소리가 무도회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탓에 슈베러 교수가 덧붙인 ‘우즈 양은 하녀가 아니랍니다.’라는 말은 묻히고 말았다.
페르 공작은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석 달 동안 실제로 문답해 본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요. 우즈 양은 학교 한번 다녀 본 적 없는 평민 출신입니다.”
레티시아에게로 시선이 쏟아졌다.
아무리 겉을 꾸몄다 한들 속은 학교 한번 제대로 다니지 않은 평민 계집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레티시아는 그 시선들을 고스란히 감내했다.
“수업을 함께 듣긴 했으나 절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하지만 전하께선 제가 그 어떤 주제로 묻든 통찰력 있는 대답을 내놓으셨습니다.”
어느덧 페르 공작의 얼굴에서 능글거리는 웃음기는 완전히 가셨다.
그는 슈베러 교수가 이 정도로 미카엘 황태자를 비호할 줄 꿈에도 몰랐다.
페르 공작의 밀정들은 슈베러 교수가 미카엘 황태자에게 일말의 정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보고했다.
오직 호르헤 경이 대신 갚아 주기로 약속한 막대한 빚 때문에 황태자의 스승을 자처하는 것 같다는 분석까지 내어 놓았다.
호르헤 경이 끌려간 지금 슈베러 교수가 황태자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건 계산을 크게 벗어난 일이었다.
“하하하하하!”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페르 공작이 선택한 건 과장된, 하지만 제법 먹힐 듯한 폭로극이었다.
“여러분, 모두 들었습니까? 통찰력 있는 대답이라니!”
“공작 각하, 다시 충고드리자면… 입을 조심하십시오.”
페르 공작은 슈베러 교수의 경고를 귓등으로 흘렸다.
“여기서 당신의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없소, 슈베러 교수! 당신이 무엇 때문에 황태자 전하의 스승을 자처했는지는 뻔하니까.”
슈베러 교수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더 말해 보라는 신호였다.
“슈베러 교수, 아니, 슈베러 양께선… 집안을 파산시키고도 남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지 않습니까?”
“파산까진 아니지만, 알거지로 만들 만한 빚을 지고 있긴 하군요. 그래서요?”
놀랍게도 슈베러 교수는 페르 공작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페르 공작은 일말의 불길함을 느꼈으나 지금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호르헤 경이, 그 빚을 갚아 주겠다고 접근해서… 모든 명망 있는 선생들이 포기한 백치 황태자의 스승을 맡지 않았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선 백치가 아니며, 각하께 그저 황태자로 불리실 신분이 아닌 것 같군요. 하지만 나머지는… 맞다고 해 두죠.”
“더는 내가 설명할 것도 없군.”
페르 공작은 혼잣말을 무도회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외치더니 뒤돌아섰다.
“여러분, 슈베러 교수가 방금 자신의 입으로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호르헤 경이 빚을 갚아 주었기에, 지금도 새빨간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는 겁니다!”
슈베러 교수는 대답 대신 미카엘 황태자와 레티시아 우즈의 곁으로 걸어가 섰다.
쥐 죽은 듯 고요해진 무도회장은 오직 그녀의 움직임만을 주시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더니, 황태자와 눈을 맞추었다.
“전하, 제가 그동안 전하의 스승으로서 뭔가 잘못된 일을 한 적 있었습니까?”
“엘바라나.”
황태자 옆의 빨강 머리 소녀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과거를 통틀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지금 와서 불만을 가지신 건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석한 이유는?”
“서, 선생님께서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기로는… 엘바라나는 옛날 옛적에 파괴되어, 아무것도 없는 유령도시라고 하셨으니까요.”
레티시아 우즈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망설임이나 머뭇거림은 없었다.
“파괴되기 전까진 무언가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건 지금 와서 중요한 건 아니고요.”
충분한 대답이었다.
슈베러 교수는 잘 보았냐는 미소를 띤 채 다른 귀족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었다.
“평민 아이가 700년 전 사라진 도시에 대해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건, 분명히 전하의 뜻입니다.”
그녀는 페르 공작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각하께서 말씀하신 제 혐의…….”
슈베러 교수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호르헤 경이 갚아 주기로 약속한 그 빚이, 어떻게 진 빚인지는 알고 하신 말인가요?”
“…….”
페르 공작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치다 뒷사람의 옷자락을 밟고 크게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충분히 잘 아시는 듯하군요.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나요?”
“슈, 슈베러 교수…….”
페르 공작은 제발 더는 말하지 말라는 투로 슈베러 교수를 불렀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제가 진 막대한 빚은, 모두 제 연구 비용으로 쓰였습니다. 증빙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아카데미로 찾아오세요. 원본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을 보여 드릴 테니.”
“……!”
무도회장은 모두가 경악에 빠져 슈베러 교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연구는 단순히 학자들 사이의 사상 놀음이 아니었다.
슈베러 교수 덕에 제국의 영토가 수도의 두 배쯤 되는 면적만큼 늘어난 건 누구나 아는 사실.
황실에서 백작 위를 수여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그런 그녀의 연구 비용이 모두 빚으로 쌓여 있다니?
만약 밝히기만 한다면, 대신 빚을 갚아 줄 사람이 줄을 설 것이다.
아니, 애초에 황실의 위신과 관련된 내용이니 황실이 가장 먼저 나서 갚아 주고, 엄청난 액수의 재화와 지위를 내릴 게 뻔했다.
“그동안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실은, 무덤까지 지고 갈 생각도 있었지요.”
슈베러 교수의 눈이 추억을 회상하는 듯 가늘어졌다.
“그러던 와중 호르헤 경이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 미카엘 전하의 교육을 무사히 끝마치면 빚을 갚아 준다고 하더군요. 평소 황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페르 공작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기도 전부터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무도회장 안에서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와 레티시아 우즈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슈베러 교수의 곁에 꼭 붙어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셋 모두 말이 없었지만, 레티시아의 머리는 호르헤 경에 대한 걱정과 미카엘의 처지에 대한 근심, 그리고 미약한 희망으로 어지럽게 움직였다.
‘선생님께서 호르헤 경과 비슷한 위치를 자처해 주시지 않을까?’
하지만 레티시아의 바보 같은 희망은 쉽게 깨지고 말았다.
슈베러 교수는 그들과 함께 황태자 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가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선생님……!”
눈물이 금안에 차올랐지만, 슈베러 교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전하와 우즈 양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나는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하는 일도 많답니다. 그 일들을 하지 않고는 살아도 산 것 같지도 않을 정도로요. 황궁에 갇혀 지낸다면… 여러분이 원하는 역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 그럼 저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레티시아는 슈베러 교수가 일분일초라도 그들과 더 있기를 바라며 매달렸다.
이미 황태자 궁의 고용인에는 페르 공작의 밀정들이 숨어 있는 듯했다.
호르헤 경이 끌려간 지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오직 슈베러 교수뿐이었다.
슈베러 교수는 레티시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분을 제외하곤, 아무도 믿지 마세요. 오늘 이후론 저도 믿지 마세요. 호르헤 경조차 믿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를 진심으로 위한다면요.”
“……!”
“전하께선 더는 예전의 바보 황태자 취급을 받지 않으실 겁니다. 황좌에 한 걸음 가까워진 건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가능성에선 한 발짝 멀어졌어요.”
슈베러 교수는 더욱 심각한 표현을 위해 잠시 고심하는 듯했다.
“아니, 열 발짝쯤 멀어졌겠군요. 음식을 먹을 땐 항상 은식기를 쓰고, 언제 어디서나 함정과 암살을 조심하십시오.”
“네, 네.”
슈베러 교수는 벌벌 떨며 대답하는 레티시아와 초연해 보이는 미카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전하께서 우즈 양에게 직책을 하나 내려 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 생각에는, 약혼녀가 적당할 듯하네요.”
“제, 제가 미카엘 전하의, 약혼녀요? 그럴 순 없어요!”
“전하께서 무사히 황위에 오를 때까지뿐입니다.”
레티시아는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하고 싶었으나 슈베러 교수가 워낙 확고한 나머지 입만 뻐끔거렸다.
레티시아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그녀는 미카엘의 약혼녀 자리를 감당할 그릇이 되지 못했다.
약혼녀로서 으레 해야 할 일들 앞에서 벌벌 떨고, 휘둘러야 할 권력을 놓아 버릴 것이다.
그 모든 건 미카엘에게 해악으로 돌아갈 터이고.
“…말?”
갑자기 미카엘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한마디 내뱉었다.
레티시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미카엘은 승마를 정말로 싫어했다.
말 자체엔 거부감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태우려고 하면 극도로 거부해 결국 승마를 가르치는 건 호르헤 경조차 포기했을 정도였다.
“네, 전하. 저는… 전하의 약혼녀가 될 수 없어요.”
미카엘은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
슈베러 교수도 할 말을 다 한 모양이었고, 레티시아는 그저 두려움과 부담감에 질려 있었기 때문에 마차 안엔 바퀴가 덜컹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갑자기, 미카엘이 침묵을 깼다.
“비서.”
“네?”
“레티시아, 비서.”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본디 비서는 작위가 없는 평민들의 측근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최근 귀족들 사이에는 일반적인 시녀, 시종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일을 전담하는 비서를 두는 게 유행이었다.
생각해 보니, 일반적으로 비서가 맡는 일들은 어차피 지금 자신이 하는 일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레티시아는 슈베러 교수에게 미카엘의 말을 전달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네……!”
그렇게 레티시아 우즈는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의 비서가 되었다.